쏘나티네
몇 군데의 피아노 학원을 다녔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학원의 이름은 ‘아름’ 피아노였어. 당시 선생님의 생김과 목소리가 아직까지 생생히 기억나. 흐트러지지 않는 말투와 정갈한 글씨체를 가진 선생님은 윽박지르는 법이 없이 차분하게 가르쳐주셨어. 지금 선생님들도 아마 그러실 텐데, 숙제를 내주실 때 연습 횟수만큼 동그라미를 악보 위에 그려주셨어. 하나하나 어서 지워지길 바라며 지긋지긋한 연습시간이 어서 끝나기를 짜증 내며 버텼었네.
그 학원에서 어느 날엔 발표회를 했어. 거창한 공연장을 빌려하는 것은 아니었고, 학원 중앙에 배치된 피아노에서 연주하고 관객은 그 뒤 소파에 앉았는데 학생들과 선생님이 관객의 전부인 아주 작은 음악회였지. 소나타인지 소나티네 곡 중 하나였는데 연습할 때부터 자신감이 없어지는 나 자신을 느꼈어. 연습을 좀 더 하면 끝까지, 그리고 잘할 수 있을 걸 알면서도 저 밑 마음속에 발발 기어 다니고 있는 귀찮음, 잘할 수 없을 거라는 불안감이 느껴지면서 어느 이상의 연습을 하지 않고 있는 거야. 지금 생각하면 기가 막혀. 마치 결과가 정해진 것처럼 행동했던 것 같아. 충분하지 않은 연습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 선에서 멈춰버렸어. 해도 안될 거라는 결과가 이미 나온 것처럼 말이야. 결국 엄마는 발표회 때 연주를 하다 중간에 포기를 하고 내려오게 되었어. 속으로 가진 또 하나의 핑계는 ‘학원에서 대충 하는 이런 발표회에서 중간에 포기해도 괜찮아’라는 생각이었어.
이때의 기억이 잊히지가 않아. 느껴지는 감정은 일종의 비겁함이었던 것 같아. 온갖 핑계를 끌어다 엄마의 행동을 합리화했지만, 진실을 스스로 느꼈던 거지. 떳떳하지 못한 느낌, 뭔가 쭈구리가 된 것 같은 느낌이 지워지지 않고 지금까지 남아있네.
엄마가 생각이 많은 편이라 다방면의 이유를 생각하다가 확실히, 제대로 해야 하는 이유를 찾아서 무언가를 하게 돼 버릇하고, 안 할 이유를 떠올리게 되면 추진력이 급하게 떨어지곤 했어. 무언가를 ‘지속’하는 데에 지장을 주곤 했던 거지. 처음엔 정말 즐겁고 나를 흥분시키고 나의 것이라 생각해서 가열하게 시작했지만, 중간에 치고 들어오는 각종 핑계를 제거하지 않으면 ‘지속’ 하지 못하고 중도에 그만두는 경우들이 발생하는 거지. 무언가 제대로 끝까지 해보지 못한다는 생각이 자리 잡기 시작했어. 물론 끝까지 한 것이 아예 없진 않지만, 시작했던 많은 것들 중에 의미 있는 수확을 거둔 것이 무엇일까 생각해 보면 ‘잘 모르겠다’라는 생각이 들어.
결국 깨달은 것은 가장 중요한 것은 각종 핑계와 부정적인 감정, 과정상의 고통 등이 중간중간에 나를 괴롭히지만 저 멀리 그려놓은 목표나 꿈이 있을 때 비로소 그 장애물이 아주 작게 느껴지거나 쳐내버릴 수 있는 힘이 생긴다는 사실이야. 5년 후, 10년 후의 나의 모습을 그려보고, 그때의 내가 되려면 지금의 나는 어떠해야 하는지 생각하는 거지. 그러면 눈을 떠서 무엇부터 하고, 어떤 과제를 하루에 몇 분씩 하고, 한주에 몇 시간을 하고, 한 달에 몇 번을 할지에 대한 계획을 세우는 방향으로 생각이 흐르더라고. 지금 내가 하는 무엇을 통해 얻는 것에 집중하고 하기 싫은, 하지 못할 수만 가지 이유를 희미하게 만들 수 있는 것이지. 강력한 꿈을 그렸다고 괴로움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만, 재미있게 뛰어놀 때 넘어져서 무릎이 까져 생긴 상처가 별로 아프게 느껴지지 않듯이, 꿈이 나에게 주는 엔도르핀, 아드레날린이 고통에 대해 조금은 무뎌지게 해 줄 수 있는 것 같아.
꿈을 뚜렷하게, 구체적으로 그려보자. 우리 딸의 소중한 꿈과 우리 가족 각자의 꿈 모두를 선명한 색으로 칠해 보고 서로 응원해 주면 너무 좋겠다 그렇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