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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새월 Mar 19. 2023

승리한 가장 간절한 신세계

신세계(2013)



    이 영화의 제목을 깊게 느꼈을수록 이 영화와 잘 맞았다고 판단할 수 있다. 빛나는 배우들과 신기 있는 대사빨, 깔끔한 플롯이 결합된 한국 느와르의 이상향 같은 영화였다. 느와르는 나쁘게 말하면 조폭물, 사시미물이고, 좋게 말하면 범죄 서스펜스 장르다. 이렇게 인식이 갈리는 이유는 등장인물들이 범죄자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행하는 범죄들과 저의가 세세하게 연출되기 때문에 일반 시민의 시선으로 보면 외설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이 장르를 보이콧하는 사람도 봤다. 하지만 느와르는 생각보다 인간의 감정에 대해 진지한 고찰을 하고, 막장처럼 보이지만 어느 장르보다 캐릭터들의 미래를 중요 포인트로 다룬다. 느와르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느와르에 바라는 가장 큰 단어는 ‘낭만’이다. 느와르의 주연들은 범죄의 늪에 빠졌지만 의리나 사랑 같은 반드시 지키는 가치가 있고, 그 가치를 지키지 못하더라도 자기 합리화보다는 납득에 가까운 체념으로 관객들에게 음지의 삶을 정확히 프레젠테이션 한다. 그래서 느와르는 등장인물들의 매력이 매우 중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말마따나 비윤리적인 분출에 그쳐 소수의 사이코패스들을 제외하고는 공감과 인정을 살 수 없기 때문이다. 요즘에 우호죽순처럼 나오는 학교폭력 웹툰이 가소로운 것도 비슷한 맥락으로 설명할 수 있다. 어줍지 않은 학생들이 깡패 연기를 해봤자, 현실성도 감동도 없는 것이다. 그 놈들이 호승심으로 싸움박질을 하는 신빙성 있는 이유가 없어서, 거대한 음지의 조직원들처럼 운명론적인 흐름이 없다는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신세계의 인물들은 전원이 매력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단 멍청한 사람이 없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느와르의 폭력에 집중한 작품들은 힘만 세고 무식한 캐릭터들의 무용담에 불과한, 액션 포르노로 빠지기 쉬운데 이는 영화의 오락성에 장르가 가질 수 있는 가치를 엿 바꿔 먹는 행위다. 판단 하나하나에 목숨이 달려 있는데 짱구를 굴리고 배신과 협작을 일삼는 것은 그들 입장에서는 나름 진지한 기본 소양이다. 여기서 중요한 부분은 그 공작들이 캐릭터들의 특성에 따라 차별화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비열한 캐릭터는 정말 쓰레기 같은 작전을 펼쳐야 하고, 정이 많은 캐릭터는 저울질에 고뇌해야 한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강 과장은 경찰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옹졸하지만 철저한 계획을 세웠고, 우정을 중시하는 정청은 자신의 생사를 걸어서 이자성의 신분을 감춰줬고, 죽기 직전에 그에게 촌철살인을 날렸다. 명석하지만 다소 신경질적인 중구는 자신이 장기짝처럼 굴려질 걸 알아도, 라이벌 정청의 앞길을 막기 위해 자충수를 뒀고, 그 결말을 묵묵하게 받아들였다. 썩은 준치 장수기도 현재 자신의 위치를 정확히 인지해 물밑 작업과 통수 치기에 주저가 없었고, 각성한 이자성은 과거의 싹을 모두 잘라버리는 결단을 내렸다. 모두의 행동이 이해 가고, 저마다 고수하는 지론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의 진흙탕 싸움을 단순 개싸움이 아니라 치열한 투쟁으로 느낄 수 있는 것이다. 


    느와르 영화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또 언급하는 요소가 바로 ‘욕설’이다. 등장인물들이 욕을 달고 살기 때문에 감상에 불편함이 생긴다는 소리다. 내 생각에, 욕 없는 느와르는 cg 없는 정통 판타지와 비슷하다. 말도 안 된다. 험한 행동을 하고 험한 생각을 갖고 사는데, 당연히 입도 험해야 한다. 그리고 매체 속 느와르 등장인물들의 욕설은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개인적으로 욕은 진실을 담는 그릇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현실의 양아치들이 '씨발'을 음성 상징어마냥 쓰는 것은 그냥 천박한 것이겠지만, 적절히 쓴 욕은 무거운 의미를 전달하는 데 용이하다. 그러니 상당한 고민 끝에 작성된 대사 속 욕은 그런 면에서는 걱정 안 해도 된다. 그리고 욕 또한 우리 민족의 얼이고, 언어의 한 종류다. 따라서 욕을 굳이 섞는 것이 아니라, 욕을 해야만이 낼 수 있는 느낌이 있고, 전달할 수 있는 메시지가 있다. 이하의 내 지론을 기저 삼아 느와르를 살펴보면, 등장인물들의 욕설은 그들의 진실과 가까운 삶을 상징한다. 여기서 진실과 가깝다는 뜻은 본받아 마땅하다는 뜻이 아니라 문명사회가 이룩되면서 우리들이 잊었던 본능적인 투쟁의 형태라는 뜻이다. 조폭들의 싸움이 많이 노골적이어서 그렇지, 우리 같은 일반인들도 비슷한 정서를 약한 강도로 느낀다. 7대 죄악을 포함한 여러 자연스러운 감정들을 느끼고 그게 행동에 영향을 끼친다. 그러므로 느와르의 등장인물들은 일반인들보다 원초적인 형태의 삶의 양식을 따르고 있고, 이를 대변하는 요소가 욕설이라는 소리다. 근거로 범죄계 쪽과 경찰 쪽 모두 자신들의 세력 다툼에 깊이 관여하는 인물들은 욕을 입에 달고 살지만, 그 사이에서 외줄 타기를 하고 있는 이자성은 비교적 욕설을 덜 한다. 


    "세 남자가 가고 싶었던 서로 다른 신세계"라는 포스터 카피는 우리에게 여러 의미해석을 꾀한다. 확실히 해둬야 하는 부분은 경찰 쪽과 범죄계 쪽은 법의 선택을 받았냐 안 받았냐의 차이를 제외하면 동일하다는 점이다. 양쪽 모두 자신들의 목적(돈과 정의)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 작동론은 상당히 이성적이다. 사람을 장기짝으로 다루고 계획 이행에 있어서 감정을 억제한다. 신세계 프로젝트의 의도를 생각하면 이를 연상할 수 있는데, 신세계 프로젝트의 목적은 끊임없이 대립하는 릴레이의 종결이다. 골드문을 때려잡아도 다음 조직이 생기고, 경찰 쪽이 골드문에 굽히고 들어가도, 내부 분열로 체계가 격동하면서 균형이 유지된다. 결국 종래의 싸움들은 찰나의 결과를 묵살하는 당번제와 비슷한 셈이다. 강 과장은 이를 답파하고자 이자성 투입을 포함해 치밀한 계획을 세워 골드문을 중간계의 존재로 만들려 한다. 완전히 깨끗하진 않지만 통제 하에 있는, 지독한 이분법의 신경전을 끝낼 수 있는 공간을 말이다. 


    여기서 추가적으로 생각해야 하는 부분이 ‘소속’이다. 어떠한 연유와 과정을 거쳐 한쪽에 서게 됐든, 이자성을 제외한 모든 인물이 그 영역을 벗어나지 않는다. 정청도 이중구와 사이가 나쁘지만 경찰들의 농간을 저지하려 한 것처럼 그들은 선택과 상관없이 자신들의 영역을 고수한다. 종합하면, 앞서 말한 이분법의 세력전에서, 개개인은 소속의 지배를 받는다. 이자성이 주인공은 것은 이 이분법의 불편한 틈새에 끼어있기 때문이다. 유일하게 이자성만이 소속의 굴레에서 자유롭다. 뚜렷한 소속이 없고, 그 과정에서 상당한 스트레스와 갈등을 경험한다. 그래서 자성은 선택을 해야 했고, 갈팡질팡하고 이용당하는 와중에 정청의 진심 어린 조언을 듣고 마음을 굳게 먹었다. 이자성의 마음을 움직인 건 정청의 정이다. 이분법의 세상에서 감정을 죽여야 하지만, 이자성의 정체를 알고도 그를 살려주는 정청은 이성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인물이다. 결국 어떤 영역이든 필수적인 인간성(감정)을 가져야만 고정적인 이분법에서 선택할 수 있고, 그 결단을 내린 이정재의 결과가 그의 ‘신세계’인 것이다. 정청은 삭막한 싸움에서 자성 같이 감정적으로 믿을 수 있는 사람을 신세계라고 생각했고, 강 과장은 상술한 중간계 조직을 관리함으로써 이룩하는 편리한 통솔 체계가 그의 신세계다. 포스터를 보면 강 과장 뒤에 정청, 그 뒤에 자성이 서 있는데, 강 과장의 지시로 시작한 이중생활에서, 정청과 같이 지내며 결단을 내린 이자성의 서사를 단편적으로 시각화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이자성은 강 과장과 정청 사이 중간에 있지 않고 살짝 정청 쪽으로 빠져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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