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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새월 May 11. 2023

'인간=돼지'라는 도식

택시더미아(2006)



1. 불쾌한 이미지의 필연성

   


     택시더미아(2006)는 특유의 그로테스크한 이미지로 매니악한 인지도를 갖는 헝가리 영화다. 거북한 자위 장면과 거구들의 구토, 생생한 박제 장면과 참수까지. 이 영화는 삼대의 이야기를 한 명 씩 그리며 서사를 진행시키지만, 정작 완주하기 힘들기 때문에 안에 담긴 메시지도 묻히는 것 같다. 우리는 종종 불쾌한 장면이 가득하거나 강렬한 영화들을 만난다. 여가와 취미의 일종인 영화 감상에서, 그런 불쾌한 이미지들을 접했어야 할 이유는 분명해야 한다. 서사, 메시지, 감독의 개성이 됐든, 영화는 관객에게 자신들이 고안한 역겨움에 정당성을 부여해야 하며, 이를 소홀히 한 영화는 최악의 경우 스너프필름과 다를 바 없는 취급을 받는다.


    기예르모 델 토로의 셰이프 오브 워터(2017)는 비늘 달린 괴생명체와 말을 못 하는 여인의 사랑을 다루는 이야기다. 만약 이 이야기가 지브리나 픽사에서 제작한 애니메이션이었다면, 이 생명체의 외관이 인간과 거의 다를 바 없이 귀엽게 나왔겠지만, 괴물 캐릭터를 좋아하는 감독답게 정말 흉측하게 디자인 됐다. 하지만 영화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낭만스럽게 잡았고, 설득력 있는 연기가 받쳐줘 흉물스러운 외관은 영화가 담는 사랑의 가치를 극대화했다. 라스 폰 트리에의 안티 크라이스트(2009)의 경우, 영화 후반부에 여배우가 자신의 음핵을 가위로 절제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남녀 모두 차마 보기 힘든 광경이다. 그러나 아담과 이브의 이야기를 연결 지어 인간의 원초적인 욕망을 적나라하게 조롱하는 영화의 특성상, 두 캐릭터의 대립구도를 변형하고, 메시지에 다가갈 수 있는 발판이 되는 중요한 씬이었다. 이 두 영화에서 접하는 부담스러움은 영화의 큰 줄기와 상통했기 때문에 추하지만 예술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2. 세 가지 욕구



    할아버지는 상사의 부인과 동물적으로 내통한 군인이고, 아버지는 빨리 먹기 대회의 잔향에서 벗어나지 못한 실패한 선수고, 아들은 그런 아버지에게 괄시받는 야윈 박제사다. 영화는 세 부자의 이야기를 통해 인간 혐오에 대한 시각을 들이밀었다. 이들은 각각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와 연결된다. 마조히즘에 가까운 자위를 일삼는 할아버지는 성욕, 빨리 먹는 행위에 인생사 모든 관념을 밀어 넣는 아버지는 식욕, 그리고 아들은 수면욕이다. 자신을 사랑해주지 않은 아버지는 어느 날 죽어버렸고, 구애하던 여자, 어렵게 시도한 운동 등 다른 욕구들도 좌절된 아들은 자기 자신을 박제해 영원한 존재가 됐다. 삶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계속되는 꿈같은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영화는 다양한 돼지의 이미지로 인간을 표현했다. 할아버지는 해체된 돼지를 담은 나무통 위에서 자위를 했고, 불륜으로 태어난 아버지는 돼지 꼬리가 있었다. 빨리 먹기 대회 선수들의 경기 모습은 사료를 폭식하는 돼지와 영락없이 일치했고, 움직이지 못할 정도로 살이 찐 아버지는 돼지우리 같은 곳에서 아들의 관리를 받고 산다. 인간과 돼지의 차이는 인간과 다른 동물의 차이와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감독이 굳이 돼지를 차용한 것은 우리가 돼지를 추하다고 인식하기 때문이고, 이를 통해 인간의 추한 부분을 아름다움의 영역에서 논하고 싶었던 것 같다.   

 


3. 핏줄의 의미?



    이 영화 속 세 부자의 이야기는 수평적으로 연결되지 않았다. 돼지라는 노골적인 상징은 아들의 이야기에서는 찾아보기 힘들다. 그리고 감정선의 접점이 없는 할아버지와 아버지랑은 달리, 박제사인 아들은 아버지에게 사랑받고 싶어 했다. 그래서 매일 아버지 집으로 와 궂은일을 도맡아 해 줬지만, 아버지는 아들을 송장 만드는 괴짜취급했다. 참다못해 아버지와 싸우고 다음날에 돌아온 아들은 아버지가 배가 터져 죽은 것을 발견하고, 어떠한 대사나 장면 없이 자기 신체를 박제하기 시작한다. 이 과정은 그리 설득력 있지 않다. 아들을 잘 키우겠다 다짐했던 아버지가 어쩌다 저렇게 망가졌는지도 알 수 없고, 아들이 아버지의 사랑을 왜 이 정도로 갈구하는 지도 헤아릴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아들의 이야기는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이야기에서 보여준 추한 모습에 대한 판단을 내리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서사적, 감정적으로 유려함이 부족한 아들의 자살은 영화의 입장과 비슷하다. 그 근거로, 박제된 아들이 전시회에 출품되는데, 책임자의 연설 중 이런 내용이 있다.


"가족 전체를 전시할 수는 있지만, 칼날이 다가오는 순간 그때의 감정은 결코 전시될 수가 없는 것이다. "


    아들은 죽은 아버지와 아버지가 키우던 고양이 세 마리를 나란히 박제하고, 약물과 기계를 활용해 자신을 박제했다. 내장 기관을 전부 걷어내고, 한 손으로 복부를 꿰매고, 고무줄을 감아놨던 칼날로 자신의 목을 쳤다. 여기서 가족 전체를 전시한다는 말은 세 부자의 이야기 자체를 의미하고, 칼날이 다가오는 순간의 감정은 영화가 충분히 설명하지 않은 아들의 심리다. 그리고 상술했듯이 이 심리는 영화가 1시간 동안 열렬히 묘사한 인간의 추한 모습에 대한 일종의 평가와 결정에 해당한다. 그때의 감정이 전시될 수 없다는 말은 우리가 손가락질하고 기피할 수 있는 것은 추한 모습이지, 그 추한 모습을 하고 있는 당사자의 심경이 아니라는 뜻이다. 이는 인간 혐오를 주장하면서 자기혐오에는 빠지지 않은 특색 있는 방향성이지만, 그 구체적인 정서와 철학이 무엇인지 명쾌히 설명해주지는 못했다.



    종합적으로, 이 영화는 거북한 장면들이 즐비하지만, 이를 명확히 뒷받침할 정도로 매끄럽게 제작된 영화는 아니다. 메시지 전달이 불친절하니, 굳이 세 부자의 이야기로 나눠서 보여줄 필요가 있었는가 하는 의문도 든다. 그러나 이 영화의 마지막 컷은 박제된 아들의 배꼽을 클로즈업하는 장면이다. 이는 다음 세대를 상기하고, 관객이다. 따라서 마지막 씬은 의식을 거행한 아들처럼, 우리도 인간의 추한 모습에서 무엇을 느꼈는지 확실히 정하라는 일침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야 우리가 돼지보다 나은 동물이라고 당당히 주장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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