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1
나는 어릴적부터 돈에 관심이 많았다.
초등학교 시절,
친구들이 즐기던 구슬치기와 딱지놀이를 나는 꽤 잘했다.
그 결과, 우리 동네는 물론 주변 동네에서도 나와 게임을 하기 위해 사람들이 찾아오곤 했다.
그렇게 얻은 구슬과 딱지들을 다시 돈으로 바꿔 팔면서 수익을 냈다.
어린 나이에 이미 작은 경제활동을 시작한 것이다.
겨울이 끝나갈 무렵,
나는 논에서 미꾸라지 구멍을 찾아 미꾸라지를 잡곤 했다.
미꾸라지가 겨울잠을 자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그들을 깨워내는 데 열중했다.
그렇게 잡은 미꾸라지는 어머니가 추어탕을 끓이시고 몸보신 하는 데 쓰이곤 했다.
여름이 오면 장마철 냇가와 논두렁에서 미꾸라지를 잡았다.
거머리에게 피를 헌혈(?)하는 고생도 감수하며 꽤 많은 양을 잡아냈다.
이렇게 잡은 미꾸라지는 시장에 팔았고, 그 돈으로 식용유나 생필품을 사고 남은 돈은 나만의 용돈으로 썼다. 물론 그 돈은 주로 오락실, 나의 여가에 활용됐다.
가을에는 주변의 산에 상수리 나무가 많았었는데 추석 전후즈음이면 상수리 수확시기이다.
나무에 올라가 손과 발로 털거나 큰돌로 나무를 쳐 떨어진 상수리들을 주웠고
그렇게 얻은 상수리들은 그날그날 바로 시장에 되팔아 필요한 물건들을 사곤했다.
나의 집 뒤편에는 군부대 사격장이 있었다
주말에는 민간인의 출입이 가능했기에, 나는 사격 훈련장에서 박혀 있던 탄환을 호미로 캐내거나, 공사장에서 나온 고철과 전선 등을 모았다.
전선을 태워 구리선을 분리하고 고물상에 가져다 팔았다.
그렇게 번 돈으로 오락실에서 친구들과 놀며 새로운 게임에 도전했다.
가위바위보 게임은 50원을 넣고 하는 게임으로 기계와 가위바위보 게임을 하는것이다
게임을 유심히 지켜보고 자주 하다보면 어떤 패턴과 확률이 보였고, 나의 승률을 33%(1/3)정도였다
승리시엔 50원~1000원까지의 상금을 기계에서 받을 수 있었다.
고등학교는 엄격한 규율을 가진 천주교계 남고였다.
기숙사 생활을 하며 주말에도 자율학습을 강요받는 일상이었다.
그 시절 나의 고등학교 생활은 짧고 단조롭게 느껴졌다.
대학생이 되어서는 학업보다 아르바이트에 집중했다.
방학 때는 아르바이트로 번 돈으로 친구들과 전국을 여행했다.
돈이 부족해 가나 초콜릿 하나로 버티며 월출산에 올랐던 일,
기차를 타고 종점까지 갔던 여행,
한여름 바닷가에서 무전여행을 하며 여행온 다른가족들에게 얻어먹은 삼겹살의 맛이 아직도 생생하다.
외딴 섬에서 겪은 밤의 공포와 낙산사 바위섬에서 노숙하다 간첩으로 오인받아 군초소로 끌려갔던 일은 그 시절의 웃픈 추억으로 남아 있다.
해외여행을 목표로 하며 1년 적금을 넣고 떠난 첫 해외여행지는 중국 베이징이였다
그곳에서 전처를 만나게 되었고, 몇차례 중국과 한국을 오가며 1년간의 원정연애를 하면서 결혼을 했다.
첫째가 태어나고 3살터울의 둘째가 태어나고 생활비를 추가로 벌기 위해 새벽 우유배달을 하며 직장 생활을 병행했다.
그 고된 시절도 돌아보면 힘든 날보다 행복한 날이 훨씬 많았다.
주말에는 아이들과 함께 자연 속으로 떠났다.
산과 바다에서 조개를 잡고, 낚시를 하고, 밤을 주웠다.
때로는 놀이공원에서 온종일 놀며 행복한 추억을 쌓았다.
아이들의 동영상과 사진을 컴퓨터에 정리하고 앨범을 만들며 그 순간들을 소중히 간직했다.
돌이켜보면, 나의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의 삶은 많은 경험과 열정, 그리고 추억들로 가득했다.
작은 성공에서 기쁨을 느끼고, 힘든 날에도 웃음을 잃지 않았던 그 시절의 나는 오늘의 나를 만든 가장 중요한 밑바탕이었다.
앞으로도 내 삶에 아이들의 이야기와 함께 계속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