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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공이 뭐예요?

교실에서 찾은 보물. 속삭임.


전공이 뭐예요?




전공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특수교육이라고 답을 하면 이어지는 질문이 대체로 정해져 있었다. “특수교육이 뭐예요?” “어떻게 그걸 하게 되었어요?” 이런 질문들에 덧붙여 듣는 칭찬 아닌 낙인이 있다면, “엄청 착하신가 봐요.”라는 나를 겪어 보지 못한 이의 나의 성품에 대한 평가이다. 착해서 하는 일이 아닌데. 보통 이런 낙인을 함께 겪어 간다. 우리 아이들이 어떤 이들이기에 이들을 만나는 이들은 무조건 착해야만 하는 것일까.  많은 생각을 하게 되는 질문들이 특수교육을 전공으로 선택한 그때부터 지금까지 계속되곤 한다.


특수교육은 특수교육대상자의 교육적 요구에서 출발하는 교육이라고 볼 수 있다. 나는 여기서 아동의 요구가 아동 개인의 요구와 필요만이 아님을 현장에 와서야 알았다.


특수교육이 정말로 무엇일까?


학교에 와서 보니 아이들이 좋아서 시작한 이 일이 그저 아이들만 생각해서 될 일이 아니었다. 아이의 교육 가능성에 초점을 두고 교육적 성취를 끌어내는 것만으로는 아이의 삶의 반경을 넓히는 것에 제한이 있었다. 온전히 장애 아동만 생각해서는 더 나아갈 수 없는 것이 특수교육, 통합교육의 현주소였다. 결국 아이들을 위해서는 아이들 너머에 존재하는, 아이들이 생활하고 있는 그 주변의 모든 것으로 나의 시선을 넓혀야 했다.


특수교사라는 그 자리가 단순히 장애 아동만을 위한 자리가 아니라는 것이다. 장애 아동과 함께 살아가는 이들을 지원해야만 장애 아동이 지원을 받을 수 있었고, 장애 아동과 함께 살아가는 이들이 행복해야만 아이들이 행복할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특수교사는 장애 아동의 필요뿐만이 아니라 그 아이가 생활하는 교실의 필요, 아이와 함께하는 친구들의 필요, 담임교사, 전담교사 등 아이와 만나는 모든 이들의 필요에 민감해야 했다. 사실 특수아동의 필요만을 찾아내 분별하는 것만 해도 만만한 일이 아니다. 아동 개인에 대한 깊이 있는 관찰과 교제가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모든 이들이 그러하듯 아이는 공동체 안에서 살아가고 있기에, 아이를 위해서라면 나의 시선과 시야를 넓혀야 했다. 아이와 함께하는 친구들에게로, 아이가 생활하는 교실로…….


솔직히 처음엔 아이에게로 시선이 집중되어 주변이 보이지 않았다. 가끔은 속이 상해서 보고 싶지 않다고 눈을 감아 버리고 싶은 순간도 있었다. 기대하지 않았던 상황이나 주변 사람들의 반응들로 인해 마음이 다쳤던 시간들이 그러했다. 그럼에도 나는 장애 아동뿐만이 아니라 아동의 주변으로 시선을 넓히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다. 이는 중앙기독학교에서의 통합이 많은 사람이 같이 만들어 가는 것이었기에 가능했다.


힘없이 무너지는 상황 앞에서도 발 벗고 나서서 힘을 더해 주는 특수 선생님들이. 상한 마음에 좌절될 때면 혼자가 아니라고 손을 내밀어 주는 담임 선생님들이. 지치고 외로울 때면 여전히 그 자리에서 동행해 주는 섬김이 선생님들이. 무력함에 넘어질 때면 응원과 격려로 힘을 전해 주는 학부모님들이. 그 옆에서 함께 살아가고자 손을 잡고 걸어가는 아이들이. 내 옆에 서 있었다. 아픔보다 더 큰 그들의 사랑이 이 자리를 지키게 했다. 주변을 돌아보니 특수교육이라는 내 전공은 함께 걷는 걸음이었고 혼자서는 절대로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제 나는

“전공이 뭐예요?”

라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하고 싶다.

“당신과 함께 걷는 일.”

이라고.






-통합교육  안에 숨겨진 보물찾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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