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순간을 담는 것
사진은 찰나를 담는다.
셔터가 포착한 순간은 연속적인 흐름에서는 보지 못한 내면을 비추기도 하며, 우리 눈으로는 볼 수 없는 작은 것을 크게, 큰 것을 작게 보여주기도 한다.
그래도 사진은 순간의 단면이라는 한계가 존재한다. 사실 진짜 이야기는 프레임 밖에 있는 것이다.
열네 살, 그 시절이 그렇듯, 교과서 밑의 공책을 칠판 필기를 받아 적는 용도보다 일명 낙서라 불리는 것들로 채우기를 더 좋아했다.
누구는 친구에게 보내는 쪽지를 썼고, 몇 명은 그림을 그렸다. 일본 만화책 주인공을 따라 그리거나, 자기만의 캐릭터를 창작하거나, 싫어하는 이의 얼굴을 기괴하게 그리는 소심한 복수를 하거나, 아니면 소망을 담아 만나고 싶은 미남과 되고 싶은 미녀 따위를 그리며 지루한 수업시간을 보냈다.
나는 그림으로 쳐주기에는 많은 해석과 양해가 필요한 선긋기와 칸 채우기를 즐기곤 했는데, 이것저것 그려봤으나 완성된 형태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아서였다.
친구들 중에는 몇 번 펜을 쓱쓱 움직이면 예쁜 윤곽선을 그릴 수 있는 재능 있는 이들이 있었고, 나는 그들에게 그림을 그려달라는 부탁을 종종 하곤 했다.
친구 중 유독 ‘오리’ 캐릭터만 그리던 아이가 있었다. 이번엔 다른 걸 그려달라고 해도 건네주는 건 오리뿐이었다.
그 오리는 커다란 덩치에 머리에 깨진 알껍데기를 쓰고, 상하로 긴 타원형의 눈과 오리답게 넓적한 주둥이에 한 송이 꽃을 물고 있는 모습이었다. 익히 아는 것처럼 그 오리도 순박하지만 조금은 멍청한 인상을 풍겼다. 친구는 그런 오리를 아주 열심히 그렸다.
또 하나의 오리가 탄생하던 것을 구경하던 어느 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예쁘다.
오리의 알껍데기 모자처럼
둥글게 자른 푸석한 반곱슬 머리카락,
흰 얼굴과 아몬드 모양의 눈,
한 일자의 붉고 얇은 입술.
두터운 남색 교복은 그녀의 덩치를 더욱 커 보이게 만들고 있었지만, 그녀가 예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전까지 단 한 번도 그녀를 예쁘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재밌고 착하고 좋은 친구였지만, 예쁜 친구는 분명 아니었다.
오후 햇살이 느리게 비추는 교실, 낡은 나무 책상, 갈색으로 바란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바른 콧날은 거의 종이와 닿을 듯 가까웠다. 사각사각, 온몸으로 그림에 집중하는 그녀는 예뻤다.
….
인지부조화.
이성은 예쁘다는 감정을 빠르게 해명했다.
‘사람은 누구나 아름다워 보이는 순간이 있다.’라는 보편론을 내밀었다.
수긍할만한 것이었고, 이때 성립된 논리는 그 후 종종 써먹었다.
‘야, 누구든 예뻐 보이는 순간이 있어.’, ‘사람마다 괜찮아 보이는 타이밍이 있다니깐.’ 그렇게 믿었지만, 얼마 안가 그 말이 맞지 않는 세상이 돼버렸다. 순간이나 타이밍이라는 단어를 쓰기 애매해진 것이다.
90년대 후반, 웹캠이라는 것이 피시방에 깔렸다. 그리고 스티커 사진기가 시내 골목골목 촘촘히 들어섰다. 일명 ‘얼짱 각도’와 ‘뽀샵질’이라는 게 유행하기 시작했다.
사진이라는 2차원 세계는 왜곡과 변형이 쉬웠다. 예쁘다는 순간과 마주치길 기다리며 관찰하지 않아도, 누구나 지금 당장 예쁘고 멋져 보일 수 있게 된 것이다. 요즘은 더 말할 것도 없고.
'나는 왜 예쁘다는 단어를 생각하면 그때 그녀의 모습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걸까?'
휴대폰 사양이 좋아지면서 우리는 많은 것을 빠르고 정확하고 선명하게 저장할 수 있게 되었다. 2차원에서 벗어나 3D, 입체, 홀로그램 등등 저장과 복원 기술은 앞으로 더 발전할 것이고 간편하게 사용될 것이다.
하지만 수백 수천 장의 사진이나 영상, 그게 마음이 담은 기억보다 더 진한 윤곽선을 그릴 수 있을까?
가장 아름답거나, 가장 따스하거나, 가장 소중한 장면은 ‘나’라는 카메라에 담긴다. 비록 남에게 온전하게 출력하여 보여줄 수 없다는 한계가 있지만.
나는 카메라를 갖고 여행을 떠날 것이다.
내가 보일 수 있는 건 카메라에 담긴 것 중 극히 일부일 것이다.
진짜 중요한 이야기는 그 밖에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