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또라이 보존의 법칙
질량 보존의 법칙처럼 회사에는 ‘또라이 보존의 법칙’이 있다. 어느 회사나 ‘또라이’는 존재하고, 만약 주변에 또라이가 없다면 바로 나 자신이 그 ‘또라이’라는 것이다.
두 달 전 회사에 인턴이 들어왔다. 드디어 나와 10살이나 차이 나는 동료와 일하게 된 것이다. 내가 속한 본부의 부장님과 내가 10살, 인턴과 나와 10살, 시간의 가속도가 느껴졌다.
내가 이 회사에서 일한 지는 어느덧 8년이 다 돼간다.
대학원 교수님이 친구 분과 함께 운영하시던 이곳은 그 당시 영화 리서치를 주로 하는 소규모 조사 회사였다. 시나리오 모니터링, 블라인드 시사회, 영화 심층토론 등 콘텐츠를 평가하고 결과보고서를 작성하는 일이 흥미로워 보였다.최종 꿈인 콘텐츠 창작자의 길과 연관된다는 생각에 적은 연봉에도 불구하고 큰 고민 없이 입사를 결정했다.
직원이 10명 남짓한 회사다 보니 격식을 차리지 않는 점이 좋았다. 자율복장에 상하 규율도 심하지 않고, 일이 없으면 다른 사람 눈치 보지 않고 칼 퇴근하는 것이 특히 마음에 들었다.
그러나 정확성과 꼼꼼함을 요하는 일이 많았고, 책에서 배운 것을 업무에 적용시키기란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어디서든 멍청하단 소리는 듣지 않는 편이었는데 취업 후 1년 정도는 내가 혹시 바보가 아닌가, 라는 생각에 주눅이 들곤 했다.
반복되는 실수와 엉성한 일처리, 거기에 고집 있는 성격 때문에 부장님이 면담하자고 부르거나 대표님으로부터 개인 메일을 받기 일쑤였다. 사수는 일을 차근차근 가르쳐주지는 않고 쌀쌀맞기 만해 정 붙일 곳이 없었다. 하지만 매달 갚아야 하는 학자금 대출도 있고, 적지 않은 나이라 쉽게 그만둘 수 없는 형편이었다.
회사 업무와 잔소리에 치이는 날이면 백수 친구를 만나 술잔을 기울이며 힘듦을 토로했는데, 그녀는 얻어먹는 술이라 그랬는지 ‘처음에는 다 그런 거다. 버티면 된다’며 매번 따뜻하게 다독여주었다.
그렇게 한 해 두해 지나며 점차 일을 체득했고, 3년 차 정도가 되자 두각을 나타내는 부분도 생기고 순조롭게 진급도 하며 내 자리를 찾아갔다.
그리고 어느새 세 명의 부장님들을 제외한 12명의 직원 중 근속 년수가 두 번째로 오랜 직원이 되었다. 회사는 편해졌고, 업무도 익숙해졌다.
끝내 친해질 수 없던 쌀쌀맞던 사수는 작년에 퇴사했고, 오랜 기간 그녀가-그녀는 우리 회사의 첫 번째 직원이었다- 맡아왔던 영화 업무 담당자가 나로 정해졌다.
그동안 회사는 영화 리서치보다 마케팅 리서치나 브랜드 컨설팅 쪽 프로젝트 비중이 늘었고, 나는 본부 이동도 하여 한동안 영화 일은 하지 않고 있었다.
사실 영화 일은 계륵 같은 존재였다. 하자니 품 파는 것 대비 이윤이 많지 않고, 안 하자니 회사의 모태이자 고유성을 버리는 것 같아 찝찝하고. 그리하여 적극적인 영업은 않은 채 들어오는 일만 받는 수준이었다.
영화 일에 관해선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들지 말자는 암묵적 분위기가 있었지만, 나는 영화 일에 나름 애착이 있었다. 뭐니 뭐니 해도 내 입사 이유였으니까.
우연이었는지 올해 초 영화 조사 건수가 좀 늘었고, 새로운 클라이언트도 생겼다. 이때다 싶어 신규 클라이언트에게는 데이터에 해석을 추가한 보고서를 얹혀 기존 단가보다 30% 정도 높여 비용을 청구했다.
천덕꾸러기였던 일이 나름 쏠쏠한 벌이가 된 것이다. 하지만 기존 단순 분석에 ‘해석’을 더하자니 보고서에 전문성과 노하우가 필요했다.
데이터 입력 후 통계 테이블만 뽑는 것은 1년 차 연구원도 충분히 할 수 있었지만, 이제는 3.52점이라는 숫자가 좋은 건지, 나쁜 건지를 읽어야 했고 그 이유가 무엇인지도 밝혀야 했다.
나에게는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팀원들에게는?
며칠 전 올 초부터 영화 일로 같이 합을 맞춰 온 팀원과 저녁을 먹었다. 각자 다른 업무로 야근 중이었는데, 다음 날 있을 영화 조사에 이야기를 했다. 이번 조사는 인턴에게 메인으로 실사와 분석을 맡겼는데 잘할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서서였다.
일이란 게 자꾸 해봐야 늘기에 못하더라도 하는 게 중요하지만, 영화 조사의 경우 결과 전달을 빨리 해야 하므로 익숙지 않은 인턴에게는 약간 과할 것도 같았다.
그녀는 내 걱정을 듣더니 인턴이 정 안되면 자신도 돕겠다고 했다. 평소 일을 잘하던 그녀라 영화 조사 결과 분석 보고서를 쓰는 것에 얼마나 부담을 느끼는지 슬쩍 물었다. 그녀 정도라면 큰 어려움 없을 거라 믿고 물었는데 그녀의 반응은 뜻밖이었다.
팀장님, 팀장님이 얼마나 많은 일을 하시는지 아세요?
결과 분석 보고서가 처음보다 양이 엄청 늘어났더라고요.
최근 또 다른 클라이언트용 결과 분석 보고서를 만들었고, 그 후 그녀가 그 포맷으로 다음 건을 작성했는데 양이 많다며 혀를 내둘렀다. 내 생각에는 적당했는데….
다음 날, 인턴은 나의 호통만 한가득 듣고 분석 테이블 뽑는 것도 혼자 다 하지 못했다. 인턴에게 지시했던 일은 어제 저녁을 함께한 팀원이 상당 부분 처리했다.
하라는 것을 왜 제대로 못하는지, 같은 말을 왜 두 번이나 반복해야 하는지, 왜 좀 더 꼼꼼히 검토하지 못하는지 등등 답답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다행히 시간에 맞춰 결과를 보낸 뒤 내가 너무 했나 라는 생각이 살짝 들었다.
그날 저녁, 고등학교 친구들의 단톡 방에서는 이해 안 가는 시댁 식구 뒷담화가 한창이었다. 거기에 친구 한 명이 인터넷에 떠도는 이미지를 보냈는데, 뜨끔하지 않을 수 없었다.
‘너 자신을 알라. 당신은 분명 누군가의 또라이다.’
최근 회사에서의 내 행동을 되짚어 봤다. 만약 결혼도 안 하고 이랬으면 딱 노처녀 히스테리란 뒷말을 들을 게 뻔해 보였다.
씁쓸한 마음에 자제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지만, 역시 빡치면 어쩔 수 없다며 내 최근 일화를 친구들에게 털어놨다.
친구는 ‘ㅋㅋㅋ’를 보내며 ‘이제 우리도 꼰대 소리 들을 나이야’라고 덧붙였다.
그래, 꼰대 ㅇㅈ? 어 ㅇㅈ.
하지만 제발 또라이는 아니길!
우리 회사에는 또라이가 없다.
...
...
...
왠지 누군가는 또라이가 있다고 할 것 같다.
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