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어졌지만 끝나지 않은 마음들에 대하여
겨울이 오면 여름을 그리워하고, 여름이면 겨울을 떠올린다.
우리는 언제나 지나간 계절을 마음 한쪽에 품고 산다.
당신에게도 여름에 두고 온, 오래도록 떠오르는 순간이 있는가.
사진관집 외아들로 자라던 기하는 어느 날 갑자기 ‘큰아들’이 되었다.
아버지가 데려온 여자, 그리고 그녀의 아들 재하.
가족이 아니었던 이들이 가족이 되기 위해 애쓴 시간은 늘 서툴고 쓰렸다.
드라마 〈사이코지만 괜찮아〉에서 문영이 상태에게 말한다.
“가족사진을 찍으면 가족이 돼.”
기하에게 사진 찍을 때 입으라고 셔츠를 사주던 재하의 어머니.
서툰 포토샵에도 재하의 흉터만큼은 지워 넣던 기하의 아버지.
어색함을 감추며 네 사람이 찍었던 첫 가족사진.
그 모든 순간은, 비록 완전하지 않았지만 분명 서로에게 다가가던 마음들이었다.
하지만 잘하려 하면 할수록 엇나갔다.
미처 갈무리하지 못한 뾰족한 감정들이 서로에게 생채기를 냈고,
결국 벽에 걸려 있던 가족사진은 내려졌다.
그들은 더 이상 서로를 무엇이라 불러야 할지 알 수 없는 사이가 되었다.
상대를 향한 부채감으로 상처를 건드리지 않으려 조심하다 보면, 결국 상처는 곪는다.
그렇게 공회전하는 대화와 공허한 관계만이 남게 된다.
무뚝뚝했던 아버지가 재하에게 카메라 사용법을 알려주는 모습을 기하는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세월이 흘러 만난 재하는 기억 속 소년의 모습과 달랐다.
그의 가게에 걸린 사진들은 기하의 아버지의 사진과 닮아 있었다.
곤충의 사체, 마른 나무, 뱀 허물… 생명력을 잃은 것들.
그 잔상 속에서 기하는 재하의 모친을 떠올린다.
늘 자신과 가까워지려 노력하던 그녀의 눈빛, 멀찍이서 두 사람을 지켜보던 모습들.
그들은 어쩌면 누구보다 서로에게 가족이 되어주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인릉에서 돌아오는 길, 기하는 아무것도 두고 오지 않았음에도
무언가 잃어버린 듯한 공허함을 느낀다.
비정에는 익숙했지만 다정에는 서툴렀던 재하에게 기하는 중국냉면 같았다.
시큼한 국물은 낯설었지만, 이상하게 자꾸 생각나는 맛.
살가운 형은 아니었지만, 냉면에 엉겨 붙은 땅콩소스를 풀어주던 그 짧은 순간만큼은 따스했다.
그래서 재하는 좋아하지도 않는 중국냉면을 매번 먹었다.
여름마다 콩잎짠지를 한 가득 담아두던 재하의 어머니.
기하는 기억하지 못하는 작은 입맛까지 그녀는 기억했다.
아버지와 헤어지는 순간에도 재하에게 “냉장고에 반찬 넣어뒀으니 꺼내 먹어”라고 말하던, 그 다정함.
맛은 가장 오래 남는 기억이다.
어린 시절 감기에 걸렸을 때 엄마가 잘게 잘라주던 황도의 달콤함, 방과 후 먹던 아이스크림의 시원함처럼
음식은 말하지 못한 마음을 조용히 품고 있다.
그들에게도 그 음식들은 함께했던 여름의 잔향을 떠올리게 했을 것이다.
한국을 떠나 일본에서 삶을 이어가는 재하의 사진에는 조금씩 색이 덧입혀진다.
요양원에서 다른 노인들과 웃으며 시간을 보내는 기하의 아버지.
구글 스트리트 뷰 너머의 세상으로 한 발 내딛는 기하.
흩어졌지만 각자의 삶을 다시 살아내는 사람들.
한때 가족이었던 관계가 부서졌다고 해서 그들이 함께했던 시간이 무용한 것은 아니다.
너무 애쓰다 보니 되려 진심이 가려지고 오해만 그림자처럼 쌓였지만,
그 마음들은 언젠가 서로에게 닿을 것이다.
고베의 사진관으로 편지를 보내는 재하.
그리고 모두의 무운을 빈다.
부디 그곳에선 더 이상 슬프지 않기를.
관계는 끝났다고 사라지지 않는다.
헤어지고 난 뒤에야 비로소 알게 되는 마음들이 있다.
그 마음들은 시간이 지나 색이 바래도 어떤 여름처럼 조용히 되살아나 우리 안에 남는다.
가족이 되지 못했던 그들의 시간도, 결국은 서로를 성장시킨 여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