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서진 채로 걷는 연습_7
호기롭게 전화를 걸었지만, 막상 문을 나서려니 두려움이 먼저 손목을 잡았다.
지난번 검사에서 무슨 말을 듣게 될지, 의사 앞에서 어떤 문장으로 나를 설명해야 할지.
생각은 한꺼번에 몰려와 서로를 밀치며 어지럽게 쌓였다.
언제나 계획으로 하루를 다듬어오던 여자였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안개 속을 걷듯 가까운 것만 더듬어 겨우 지나가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신발끈을 고쳐 매는 일조차 결심이 필요했다.
그런저런 생각을 품은 채 걷다 보니, 병원이었다.
따뜻한 조명 아래 물 흐르는 소리가 은은히 들렸고, 푹신한 가죽 소파가 시야에 먼저 들어왔다.
여자는 잠깐 멈칫했다.
편안한 인테리어가 여자의 마음을 진정시켰다.
마치 여기서는, 조금은 천천히 숨 쉬어도 되는 것처럼 느껴졌다.
“아까 연락드렸는데요… 마지막 진료 시간이 비었다고 하셔서요.”
간호사가 개인정보를 확인하더니 상담실로 안내했다.
여자는 떨리는 손을 괜히 쥐었다 폈다. 손안에서 맥박이 작은 소동을 일으켰다.
“잘 오셨어요. 오늘 기분은 좀 어떠신가요?”
말쑥한 차림의 의사가 물었다. 어쩌면 누구에게나 하는 의례적인 질문일 텐데,
이상하게도 여자는 그 문장을 오래 쥐고 싶어졌다.
누군가가 자신의 기분을 묻는 일이, 너무 오랜만이었으니까.
“오늘 낮에 예약이었어요. 그런데… 발이 떨어지지 않았어요.”
여자는 잠시 말을 고르다가, 조금 더 낮은 목소리로 이어갔다.
“그렇게 잠에 들었는데요. 꿈속에서 제가… 저를 비난했어요.”
의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무슨 말을 하던가요?”
키보드를 두드리는 소리가 이어졌다.
지난번엔 그 소리가 마치 심판처럼 들렸는데, 오늘은 그저 누군가가 메모를 하는 소리 같았다.
여자는 그 차이가 부끄럽고도 다행스러웠다.
“제가 도망치는 거래요. 이렇게 현실을 외면하다간 약 없이는 살 수 없는 인간이 될 거라고요.”
여자는 말을 끝내고 잠깐 웃음인지 한숨인지 모를 숨을 뱉었다.
“그 말이… 다 맞는 것 같아서 더 아팠어요. 그래서… 틀렸다는 걸 증명해보이고 싶어서 왔습니다.
기분은… 잘 모르겠어요. 사실 제가 여기 왜 있는지도 모르겠고요.”
의사는 잠깐 화면을 바라보다가, 담담하게 말했다.
“그런데 오늘 오셨네요. 그렇다면 환자분은 도망친 게 아니죠.”
감정이 담기지 않은 목소리였다.
그런데도, 여자는 그 말에서 이유 모를 위로를 받았다.
너무 과장되지 않아서, 오히려 믿을 수 있는 문장 같았다.
“네… 그러네요.”
여자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도망치지 않았네요.”
짧은 문장이었는데 목이 메어 오래 걸렸다.
말을 내뱉는 사이에, 마음 어딘가가 조금씩 풀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선생님, 저는… 지금 어떤 상태인 걸까요?”
여자는 처음으로 용기 내 물었다.
이제는 현실을 마주볼 시간이었다.
“검사 결과로 보면, 우울 증상이 중등도 이상으로 보여요. 불면과 불안도 함께 있고요.”
의사는 잠시 말을 고르듯 멈췄다가 덧붙였다.
“쉽게 말하면… 마음의 여유가 많이 줄어든 상태입니다. 그래서 작은 일도 크게 버거울 수 있어요.”
아이러니하게도 그 말을 듣는 순간, 여자의 마음은 되려 조용해졌다.
그동안 상상으로 불려놓았던 공포가 바람 빠진 풍선처럼 쪼그라드는 기분.
‘내가 이상한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지금 내 상태가 이렇다’는 말이, 다행처럼 들렸다.
“그럼 저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요?”
여자는 조금 더 솔직해졌다.
“어떻게 해야… 나을 수 있나요?”
의사는 담담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약은 당장의 증상을 낮추는 데 도움이 됩니다. 하지만 약만으로 전부 해결되진 않아요. 상담과 생활 조절이 같이 가야 하고요. 좋아질 수도 있고, 시간이 오래 걸릴 수도 있습니다.”
그는 마지막 문장을 힘주지 않고 덧붙였다.
“중요한 건 관리예요.”
원인은 분명해졌는데, 방법은 한 문장으로 끝나지 않았다.
여자는 그 모호함이 서늘하게 느껴졌다.
그래도 오늘만큼은, ‘좋아질 수 있다’는 말을 조심히 주머니에 넣기로 했다.
십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켜켜이 쌓여온 감정의 찌꺼기가
하루아침에 말끔해질 리 없으니.
약을 처방받고 나오는 길, 여자의 마음은 봉지 한가득 담긴 약만큼 가벼워졌고,
그 약만큼 무거워졌다.
가벼운 것은 봉지였고, 무거운 것은 이제부터였다.
더 좋은 문장을 써야한다고 스스로를 채찍질하다보니
아무도 가둔적 없는 감옥에 혼자 갇혀 몇 주를 보냈습니다.
글을 쓰는게 좋아 시작했는데, 어느샌가 잘써야한다고 제가 저를 괴롭히고 있더군요.
마음을 비워내고 욕심을 덜어내며, 문장으로 위로받던 저를 되찾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제가 쓰는 글이 누군가에게 닿아 위로가 되길 바라며,
이 밤 글을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