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피는 이제 끝났다
어릴 적부터 나는 바깥에 바람 쐬러 나가자며 엄마아빠의 손을 이끌고 현관에 앉아 신발부터 챙겨 신는 아이였다. 밖에 나가 거리를 걷고, 사람들을 구경하며, 카페나 레스토랑에서 보내는 시간을 좋아했다. 십대 때는 하루의 2/3을 학업에 매진하며 살다 보니 늘 밖에 대한 갈망과 동경으로 목이 말랐다. 그래서 매일 야간자율학습이 끝나고 집에 오면 ‘걸어서 세계 속으로’를 보고, 라디오를 들었다. 그 당시엔 페이스북이 유행이었기에 해외에 있는 사람들과 친구가 되어 그들의 일상을 보며 좋아요를 누르곤 했다. 책과 영화, 다큐멘터리 등을 통해 나는 언제나 더 넓은 세상으로 나가는 꿈을 꾸었다.
스무 살이 되어서는 여행을 위해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한 푼 두 푼 모아서 스물한 살, 생애 첫 해외여행을 혼자서 홍콩으로 떠났다. 낯선 풍경과 언어, 그리고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 철저히 혼자가 된 그곳에서 나는 자유를 만끽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하루를 내 마음대로 쓸 수 있었고, 정해진 규칙대로 살지 않아도 되었으며, 성적과 미래에 대한 걱정으로부터 벗어났다. 그때부터 나는 여행에 ‘중독’ 되었다.
이십 대는 돈은 부족할지언정 시간과 체력은 풍부한 시기였기에, 잠을 줄이고 아르바이트를 늘려가며 어떻게든 틈만 나면 비행기를 탔다. 당시에는 이를 일컬을 단어가 없어서 표현하지 못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소위 말하는 ‘도파민 중독’이었던 것 같다. 어쩌면... 극한의 회피성향이었을지도..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그 시절엔 이십 대라면 대체로 다 여행에 미쳐있었다. 오죽하면 ‘여행에 미치다’라는 SNS계정까지 등장했겠는가? 학교 선배 중에서도 세계일주를 하면서 유명세를 탄 사람이 있어서 내 마음에는 온통 세계를 누비고, 여권에 도장을 가득 받는 꿈이 가득했다. 돌이켜보니 나만 유별난 것이 아니면서도 자유를 만끽할 수 있다는 달콤한 핑계가 나를 늪으로 침잠시켰던 것 같다.
휴학을 하고선 해외살이를 해보려 덴마크 워킹홀리데이 비자를 받기도 했었다. 휴학 자체도 특별한 목적도 없으면서 그냥 남들이 다 하니까 나도 한 번 해볼까 하는 허무맹랑한 이유로 한 거였다. 개인적인 사정으로 그 꿈은 좌절되긴 했지만, 덕분에 코로나시기를 겪기 전 일찌감치 취업에 성공했으니 아쉽지는 않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많이 아쉽다. 그때 나갔더라면 내 인생이 또 어떤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을지 모르는 거니까)
취업 후 이젠 좀 사그라들 줄 알았던 여행에 대한 갈망은 나를 비웃기라도 하듯 더 커졌다. 사무실에서 받는 스트레스가 나를 극한으로 몰고 갔기에.. 직급과 반비례하는 업무분장, 야욕에 눈이 멀어 직원들을 갈아 넣는 상사들, 일상이 되어버린 야근, 강제로 끌려가야 하는 각종 술자리, 365일 24시간 울려대는 업무연락... 이 모든 것이 나를 숨 막히게 했다. 이렇게 있다가 내가 죽거나 다른 누군가를 찢어 죽일 것 같다는 충동이 들 때마다 나는 스카이스캐너를 켜서 최저가 항공편을 검색했다. 목적지는 어디든 상관없었다. 그냥 비행기를 타고 멀리 가서 로밍 없이는 통화가 안 되는 곳, 그거면 됐다. 그런 식으로 4년을 더 여행에 미쳐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정말 갑자기 그 어떤 예고도 없이 여행에 대한 갈증이 사라졌다.
이걸 사라졌다고 보는 게 맞을까?
정확히는 여행이라는 마약이 내게 주는 기쁨에 내성이 생겨, 더 이상 효과가 없었다고 보는 게 맞겠다.
일상에서 재도 남지 않을 만큼 너무나도 많이 소진되어 버린 나는 더 이상 여행을 가는 게 즐겁지 않았다. 사실 여행지에서도 어떻게든 시간을 쪼개서 온 곳이니 최대한 즐겨야 한다는 강박으로 몸을 혹사시키기 일쑤였다. 그렇게 하루 종일 2만 보 이상 걸으면서 여행을 하는 와중에도 어떻게든 그 틈을 비집고 파고드는 업무생각은 끔찍했다. 게다가 여행을 다녀오면 여행지에서의 행복했던 기억을 반추할 새도 없이 쌓여있는 업무를 쳐내느라 몇 배로 더 바빠졌다. 며칠간의 도피로 인해 미래의 내가 고통받는 악의 굴레에 빠져있음을 깨달았다. 게다가 통장잔고는 실시간으로 마이너스를 향해 전력질주하고 있었다. 모든 게 여행을 가기 전보다 나빠지고 있었다.
이때 깨달았다.
여행을 통해 내가 무언가를 얻은 게 아니라 잃었던 것이라는 것을.
그리고 나는 그저 도피처가 필요해서 아주 값비싼 도망을 쳤단 것뿐이라는 것을.
그렇다면 내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