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이 주관적으로 서술하는 2020년 파리
올해를 2주 남기고 올 한 해를 되돌아보니. 기억에 남는 건 코로나가 휩쓸고 간 자리. 월급 삭감에서 시작된 실업, 원격 수업, 늦춰진 바캉스 그리고 오늘날, 20시부터 통금이라니?
올해 초가 어렴풋 기억이 난다. 짧은 기간 몽마르뜨의 갤러리에서 일하면서, 늘 차려입고 그 언덕을 올라야 했지만 나름대로 뿌듯해지는 기억이다. 음식은 맛없고 비싸기만 한 관광객들의 명소인 몽마르뜨는 초상화 호객행위와 차분히 거기를 돌아다니기 어려울 정도로 붐볐지만 출근 시간은 늘 한산하고 추웠다.
그리고 주말 퇴근길 노란 조끼들이 휩쓸고 간 자리, 눈에 띄게 변모한 거리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약 2년 전, 유류세 인상으로 시위를 시작한 노란 조끼들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유치원 버스의 색처럼 마냥 상냥하고 지켜주고 싶은 병아리들의 정의와는 많이 달랐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본래의 목적 의도를 잃어버린 그들의 시위 형태는 우리의 촛불 집회와 비교했을 때 상당히 많이 폭력적이었다.
그리고 이맘때쯤, 한국의 코로나에 대한 소식을 들었던 걸로 기억한다. 하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그 위험성을 감지 못하고, 어리석게도, 그건 오직 아시아의 문제라고만 생각했었다.
3월
3월 초쯤, 엄마가 보내준 핸드메이드 마스크가 도착했고, 하루가 멀다 하고 엄청난 숫자의 확진자가 늘기 시작한 프랑스도 손수 마스크를 제작해 일부 쓰고 다니는 사람들이 있었으나 그 수는 많지 않았다. 이 직전까지만 해도, 황당하기 짝이 없게, 프랑스 정부는 마스크는 별로 효과가 없을 것이며, 손을 잘 씻고, 기침은 어깨너머로 하라고만 지시했었다.
그리고, 그 달 17일. 일 드 프랑스(Île-de-France)를 포함한 약 8개의 데파트멍이 봉쇄를 시작했다. 학교는 노란 조끼로 인해 작년부터 시행했던 원격 수업을 올해도 시행하게 되었다. 그리고 집 밖은 흡사 재난 영화 같았다. 대부분의 약국엔 '손 세정제, 마스크 없음'이라는 안내가 문 앞에 붙어있었고, 슈퍼의 파스타면이나 통조림, 그리고 양파 마늘 같은 채소 대부분이 사재기로 동나 있었다. 슈퍼와 약국을 제외한 모든 레스토랑, 바가 문을 닫았고 오직 포장만이 가능했다. 덕분에 우리나라의 배달의 민족과 같은 서비스, Delivroo나 Ubereat 의 오토바이들이 기승을 부리며 열일하기 시작했다. 배달음식이 익숙한 한국인이라고 해도, 뭐든지 해서 바로 먹는 것이 맛있고, 프랑스 코스요리 부심을 맛보지 못한다는 건 내게도 꽤 견디기 어려운 현실이었다. 또, 예쁘기로 소문난 파리의 잔디밭에서의 여유로운 피크닉이나, 바에 앉아 벨기에 생맥을 못 마신다는 사실 또한, 코로나의 불편함을 한층 더 상기시켰다. 그렇다. 나도 이때까지만 해도 프랑스에 다리를 하나 걸치고, 프랑스인 입장에서 마스크의 불편함만을 불평하는 한국인이었던 것이다.
한인마트는 80유로 이상 주문 시 파리 시내 거주자에 한해서 무료 배송을 해주었기에 동거인과 함께 한국 분식에 빠지게 되었고, 이 때는 일 년 중 가장 라면을 많이 먹었던 시기이다. 이웃들은 낮에 부서진 것을 고치는지 아니면, 새로 만드는 건지 대공사의 소음이 울려 퍼졌고, 저녁 8시가 되면 다 같이 창문으로 머리를 내밀고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간혹, 금요일 혹은 토요일 밤 자기주장이 강한 이웃들은 본인들이 살아있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듯 지친 이웃들을 위해 음악을 틀어주었다. 그런 밤이면, 이웃들은 거리로 나와 춤을 추었다. 그들에게 있어 봉쇄가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 싶었다.
5월 중순쯤 봉쇄가 끝나고 미친 듯이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여전히 확진자 수치는 천을 웃도는 수준이었지만 유럽의 다른 국가들에 비해서 낮았고, 프랑스는 점점 순위권에서 벗어나는 듯 보였다. 물론 그건 찰나의 잘못된 생각일 뿐이었지만.
그리고
7월. 본래 계획보다 2달이나 늦게 한국으로 바캉스를 떠났다. 공항에서부터 철저히 격리된 상태로 약 10시간 정도 걸려서 고향에 들어올 수 있었고, 바로 그다음 날 코로나 검사를 받은 후, 음성 판정을 받아 본가로 들어와 다시 14일간의 자가 격리 후 가족들을 볼 수 있게 되었다. 공항에서부터 두 나라의 다름을 체감할 수 있었다. 아무리 나라의 크기, 인구수 그리고 국민의 정서가 다르다고는 하나, 기본적으로 위험을 감지하는 태도나, 전염병을 컨트롤하는 두 국가의 수준은 큰 차이를 보였다. 내가 한국에 들어오기 직전까지 종종 마스크를 착용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었으므로.
9월
나는 9월 초 다시 파리로 돌아왔다. 파리는 당시 따뜻했다. 하지만 코로나는 결코 열에 약한 건 아니라고 했던가, 9월 초부터 급격하게 확진자가 늘기 시작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마스크를 착용하고 있었지만, 레스토랑이나 바에 다닥다닥 붙어서는 마치 코로나 전의 일상으로 돌아간 것처럼 보였다.
2달의 공백을 서둘러 메우고자, 큰 규모의 바캉스가 시작됐다. 프랑스 체류를 통틀어 단시간에 가장 많이 움직였던 시기로 기억한다.
아니나 다를까, 10월 17일 Couvre-feu라는 새로운 감금 방식이 도입되는데, 밤 21시부터 오전 7시까지 통금 하라 하더니, 30일 프랑스는 다시 두 번째 봉쇄를 발표했다. 당시 북프랑스의 시골에서 요양하고 있던 나와 동거인은 구름 아래, 들판 위, 자연과 함께하는 시간을 보냈다. 학교는 봉쇄와 함께 다시 원격 수업을 시작했다. 일 년 내내 실제로 학교에 간 횟수를 손에 꼽을 수도 있을 것이다. 어리석게도 프랑스 정부는 대형 마트를 제외한 다른 소규모 자영업자들의 서비스를 중단시켰고, 나는 망해가는 동네 장사의 모습들을 최전선에서 지켜볼 수 있었다. 실제로 이때, 나와 동거인이 머물렀던 이 작은 마을은 노인들이 대부분인 정말 작은 마을이었는데, 지인인 장의사에 말에 따르면 이 동네에서 코로나가 사인이었던 경우는 단 한 번도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 동네는 여전히 국가의 지침에 따라 모두 문을 닫아야 했다. 자가용으로 3분 거리에 위치한 피자와 생맥을 판매하던 레스토랑은 포장 피자를 판매하다가 문득 그마저도 어려운 것인지 셔터를 내려버렸다. 무조건 문을 닫게 해, 그들의 생계의 끈을 잘라버리는 것이 코로나를 단절시킬 유일한 방법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아무도. 코로나를 생각하면 두렵지만 이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무겁기만 하다.
그리고 12월
두 번째 봉쇄가 끝나면서 나와 동거인은 파리로 돌아왔다. 날이 추워지기 시작하고, 낮이 짧아지기 시작하면서, 파리는 빠르게 추워졌다. 몸도 마음도. 그리고 그와 동시에 15일, 두 번째 Couvre-feu가 시작되었다. 이번엔 한 시간 앞당겨서 저녁 8시부터 통행을 금한다.
겨울마다 화요장에서 싸게 샀던 귤을 까먹었던 작년을 기억한다.
겨울의 추위와 빨리 져버리는 태양에 심신은 자연스럽게 차분해지기 마련이지만, 파리는 늘 떠들썩했다. 추위를 이기기 위해 바나 테라스에 앉아 맥주를 마셨고, 공공화장실이 닫혀있는 경우가 다반사이기 때문에 그들은 늘 노상방뇨라는 불법을 아주 흔하게 저질렀다. 올해는 그 모습조차 횅하다. 크리스마스 마켓 또한 없다. 크리스마스가 유럽인들에게 있어 한해를 마치는 전통적으로 아주 중요한 날이라는 것을 알고 있고, 크리스마스를 한주 앞두고 고요한 그들의 현실이, 아니. 우리의 현재가 안타깝지만 이 또한 지나가리라.
코로나가 환경에게 미친 긍정적 요인인 이산화질소 50% 감소, 교통사고 40% 감소 등은 인간이 자발적으로 이뤄낼 수 없는 결과인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이 시기가 어서 지나가, 이 시기를 다시 회상할 수 있는 그 날이 오기를 바란다.
곧 저물 올 한 해를 떠올려보며, 브런치에 제 첫 글을 게시합니다. 날짜나 수치의 경우 정확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고쳐주시면 고치겠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