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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과실 Nov 26. 2020

커피로 시작하는 아침

커피맛을 알아간다는 것

지난주, 평소와 똑같은 시간에 집에서 나왔으나 지하철이 10분 늦게 도착하면서 갈아타는 시간까지 조금씩 늦어져 회사에 가까스로 도착하였다. 너무 딱 맞추어 지하철을 탔던 내 잘못 이리라. 그래서 그날 이후로 평소보다 10분 일찍 나오기 시작했다. 겨울에 가까워질수록 새벽은 더욱 어두워지고 졸음보다도 추위를 견디는 것이 더 힘들어진다. 현관문을 열자 얼굴에 확 끼치는 찬바람에 잠을 깨며 출근길에 올랐다.


10분 일찍 출발했는데 회사에는 평소보다 20분 일찍 도착했다. 처음에는 아무도 없는 사무실에 들어가 불을 켠다는 것이 어색해서 스위치도 제대로 찾지 못했다. 순식간에 밝아진 사무실을 가로질러가 자리에 앉으면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잠시 가만히 있는다. 책상 위에 가방만 내려놓고는 코트도 벗지 않은 채 앉아있으면 온몸에 열기가 피어오르는 것이 느껴진다. 이제 따듯한 실내로 들어왔구나. 하지만 사무실이란 공간이, 직장이라는 곳이 몸은 데워줄지언정 마음을 데워주지는 못한다. 오히려 마음을 얼어붙이고 아무 감정도 느끼지 못하는 편이 낫다.


출근길 하늘




그렇게 하루 이틀이 흐르자 곧장 사무실로 들어가는 것이 오히려 시간낭비로 느껴졌다. 할 일이 그렇게 많은 것도 아닌데 굳이 이른 시간부터 사무실에 앉아서 부지런하고 열심히 일하는 직원처럼 보일 필요가 있을까. 그래서 커피를 사러 갔다. 사실 나는 커피를 좋아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카페인을 접하면 심장이 두근거리고 심할 때는 손까지 떨리는지라 대학생 때는 주로 고구마라테를 마셨다. 꽤 오랜 시간 커피를 마시지 않았지만 커피 향은 좋아했다. 그러나 텁텁한 끝 맛에는 적응하지 못했다.


그러다 직장을 다니면서 '점심식사 후 커피 한 잔'이라는 공식에 물들어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신입 주제에 까다로운 주문을 하는 것이 눈치 보여 사람들이 주문하는 대로 따라 하다 보니 카페라테를 주로 마셨다. 그러다 조금 더 단 것을 찾게 되면서 시럽을 넣어보기도 하고 휘핑크림을 올려보기도 했다. 몇 년 간의 다양한 실험을 거쳐 찾은 메뉴는 바로 '따듯한 바닐라 라테'이다. 나는 한여름에도 한겨울에도 변함없이 '따듯한 바닐라 라테'를 주문한다.




회사 바로 앞에도 카페가 서너 군데 있지만 스타벅스를 가기 위해 굳이 더 걸었다. 회사가 지하철역으로부터 약 7분 거리에 있고, 스타벅스는 지하철역으로부터 11분 거리에 있다. 회사와 스타벅스가 반대방향이기 때문에 상당한 시간을 투자해야 하는데도 간 이유는 이프리퀀시를 조금이라도 빨리 받아보려는 마음에서다.


스타벅스 충성 고객이라면 그건 아니다. 그래프로 따진다면 오히려 나는 정반대에 서있는 사람이다. 나에게 스타벅스란 커피맛을 아는 사람들이나 찾는 곳으로, 나처럼 커피맛도 모르고 커피를 마신 지 얼마 되지도 않는 사람에게는 그저 가격만 비싼 카페에 지나지 않았다. 게다가 스타벅스에 대한 첫인상이 별로 좋지 않아서 특별한 이유가 없을 때에는 굳이 내발로 찾지 않았다. 첫인상이 좋지 않았던 이유는 내가 다녔던 고등학교의 한 선생님 때문이다.


수업 시간이었다. 무슨 얘기를 하다가 거기까지 흘러갔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선생님이 말했다.
"길을 가는데 앞에 두 여자가 있어. 하나는 스타벅스 커피를, 다른 하나는 맥도널드 커피를 들고 있어. "
'맥도널드 커피'라는 말이 선생님의 입에서 나오자마자 아이들이 야유를 보냈다.
"그렇지? 맥도널드 커피는 폼 안 나지?"


두 브랜드 커피의 맛, 향, 가격이 전부 다르다고 해도 선생님이 그때 '폼'이라는 단어를 사용해가며 스타벅스 편을 들면 안 되는 거 아니었을까. 그래서 스타벅스는 내게 '허영' 또는 '허세'라는 이미지로 남아 있었다. 그래서 특별한 일, 선물로 스타벅스 기프티콘을 받았거나 기프트 카드를 선물로 받았을 때가 아니면(한 번은 면접비로 스타벅스 기프트 카드를 받은 적도 있었다) 스타벅스에 가지 않았다.


하지만 스타벅스에 대한 이미지는 시간이 흐르면서 자연스레 고쳐졌다. 일부 사람들이 생각하는 이미지와 스타벅스가 표방하는 이미지가 다르다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 하지만 가끔 가다 커피가 마시고 싶을 때는 저렴한 카페를 찾았다.




새롭게 다니게 된 직장을 다니면서 커피를 마시는 횟수도, 스타벅스를 가는 횟수도 늘어났다. 점심을 먹는 동네마다 근처에 스타벅스가 2개씩 있는 데다 스타벅스의 특정 디저트에 꽂혔기 때문이다. 어른이 되면 술맛을 알게 되는 것처럼 나는 조금씩 커피맛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2년 전까지만 해도 생각하지 못했던 모닝커피라는 것을 떠올리게 된 것이다.


한때 꽂혔던 스타벅스의 호박파이


지하철역 출구에서 나와 스타벅스 쪽으로 걸어가는 길에는 대기업과 작은 사무실이 곳곳에 포진해있다. 다양한 색깔의 컵홀더로 둘러싸인 테이크아웃 커피잔이 사람들의 손에 종종 들려 있었다. 그 수가 꽤 많은 것에 놀랐다. 모닝커피라는 말이 왜 생겼는지 알 것 같았다. 큰 사거리의 신호등이 이제 막 켜졌다. 시간도 넉넉한데 다음 신호에 건널까 싶었으나 내 옆으로 한 여자가 쌩하고 뛰어가더니 이제 막 켜진 신호에 맞춰 횡단보도를 뛰어서 가로질러 갔다. 괜스레 경쟁심이 발동했는지 나도 뛰어서 신호에 늦지 않게 횡단보도를 건넜다.


아침에 찾은 스타벅스는 점심시간에도 종종 찾는 지점이었다. 점심시간에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음료를 기다리며 서있을 공간도 마땅치 않은데 아침이라 그런지 텅 비어 있었다. 나는 미리 사이렌 오더로 주문했기에 창가 진열장에 놓인 상품을 구경했다. 스타벅스에서 계절이나 시즌에 맞춰 새로운 상품을 내놓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기다렸다가 사 본 적은 없었는데 이번 가을에 여우꼬리가 달린 머그컵을 선물로 받으면서 관심이 생겼다. 크리스마스 시즌에 맞춰 나온 상품들은 하얗고 빨갛고 짙은 초록의 색을 뽐냈다.


경제가 어려워지면서 길거리에서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느끼기가 어려워졌다. 저작권 문제 때문에 거리에서 캐럴을 듣기도 쉽지 않다 보니 가끔 가다 나무를 둘러싸고 있는 전구가 홀로 크리스마스라는 짐을 짊어지게 되었다. 나는 날이 쌀쌀해지는 10월부터 조금씩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느끼기 위해 크리스마스 영화를 찾아보곤 한다. 하지만 그건 나만의 작은 의식일 뿐, 단풍도 다 물들지 않았는데 크리스마스를 찾는 사람은 거의 없다. 마치 그런 내 마음을 알아주는 것처럼 스타벅스는 핼러윈이 끝나기가 무섭게 크리스마스로 온 가게를 달궈놓는다. 붉은빛의 광고판, 크리스마스나 연말을 상징하는 메뉴, 그리고 끊이지 않는 캐럴. 크리스마스 캐럴 특유의 멜로디를 아침부터 들으니 기분이 좋았다. 캐럴을 들으면 밖에는 눈이 내릴 것 같고, 사람들의 입에서는 웃음이 끊이지 않을 것 같고, 목도리와 장갑으로 무장했지만 다들 서둘러 기쁜 걸음을 내디딜 것 같다.


"빨대 하나 주세요."

무심코 돌아보니 픽업대에 아까 그 여자가 있었다. 내 옆을 쌩 지나쳐서 횡단보도를 뛰어 건넜던 그 사람. 그 사람도 스타벅스에 가는 길이었구나. 곧이어 내 이름이 불렸다. 사이렌 오더의 닉네임을 자유롭게 설정할 수 있다는 걸 알지만 나는 고지식하게도 내 이름으로 해놓았다. 역시나 메뉴는 '따듯한 바닐라 라테'. 커피에 익숙해졌다고는 하지만 아직 아메리카노는 입에도 못 댄다. 특히 실수로라도 모닝 아메리카노를 마셔버리면 그날 하루는 두근거리며 보내야 한다. 타자를 치는 것인지 질주하는 것인지 모를 정도로 손이 떨린다.




올해 처음으로 모아 보는 이프리퀀시 페이지를 보며 얼마나 더 마셔야 하는지 계산해봤다. 차곡차곡 모으다 보면 연말 전에는 완성하겠지. 올해 너무 이뤄놓은 게 없어서 공허함을 느끼고 있을 때 눈에 들어온 것이 프리퀀시였다. 그때 스타벅스 앱을 들어가지 않았다면 안 모으게 됐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작게나마(따지고 보면 가격이 작지는 않지만) 내게 성취감을 주고 싶었다. 올해 뭔가를 완성했다는 뿌듯함을.


경쾌한 캐럴을 뒤로하고 스타벅스를 나왔다. 다시 각자의 소음으로 고요한 거리를 걸었다. 머릿속에는 캐럴의 멜로디가 맴돌아서 마스크를 방패 삼아 작게 흥얼거렸다. 시간이 흘러서인지 집에서 갓 나왔을 때보다 춥지 않았다. 이 정도 겨울 날씨라면 가끔 부르르 몸을 떠는 것도 겨울의 특징이라 생각하며 귀엽게 넘어가 줄 수 있다. 회사로 들어간다는 사실이 반갑지는 않지만 손에 든 커피에 의지할 수 있어 위안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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