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사과실 Feb 17. 2021

따듯한 바닐라 라테 수난기

그럼에도 나의 시그니처 메뉴

얼마 전, 회사 내 조직개편이 있었다. 회사의 모든 팀과 부서는 하나의 커다란 덩어리가 되더니 여러 개의 새로운 조각으로 나뉘었다. 대대적인 조직개편이 있을 때면 나 같은 말단 사원들이 궁금해하는 것은 두 가지다.

하나, 누가 내 상사로 올 것인가? 

둘, 내 자리는 어디가 될 것인가?

새로운 팀장과 부서장을 탐색하기에 앞서 가장 먼저 사람들의 눈길이 쏠린 곳은 새롭게 발표된 자리 배치도였다. 내가 속한 팀은 덩치가 커서 말단 사원만도 한 무리라 문 열자마자 보이는 문가 자리에는 누가 앉는지, 대놓고 구직 사이트를 들여다봐도 눈에 띄지 않는 창가 자리에는 누가 앉는지 등이 최대 관심사였다. 

어디 앉으나 거기서 거기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모두가 탐내던 창가 자리에 앉으니 기분이 좋았다. 게다가 주변에 앉은 사람들까지 완벽히 조화로웠다. 그중 내 왼쪽에 앉은 동료와는 그전까지 대화를 많이 나누지 못했었는데, 식사를 한 두 번 같이 한 것이 전부였다. 자리가 바뀌고 나서 아침 인사 한 번, 주말 지나고 안부 한 번이 쌓이면서 왼쪽 동료와의 관계도 점차 두터워졌다. 하지만 왼쪽 동료가 내 옆으로 오면서 생긴 가장 큰 변화는 바로 '커피 향'이다. 


어느 날부터 아침마다 내 주변에서 드르륵 거리는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소리의 근원지는 왼쪽 동료의 손에 들린 수동 그라인더였다. 소리를 최소화하고자 허벅지 사이에 그라인더를 낀 채 가는데 자세가 어찌나 안정적인지 자동 그라인더인 줄 알았다. 그런 날들이 반복되면서 파블로프의 개처럼 그라인더 가는 소리를 들으면 커피 원두향이 뒤따라 올 거라고 자연스레 믿게 되었다. 커피 원두향이 어찌나 풍부한지 헤이즐넛 같은 달콤함이 섞인 향이 온 사무실을 가득 채웠다. 왜 향을 물결 모양의 연기로 표현하는지 알겠다, 향은 파도처럼 몰려오니까.


옆에 앉은 특혜로 갓 내린 커피를 서너 번 받아마셔 봤지만 블랙커피는 원래 못 마시는지라 5미리의 원액에 500미리에 달하는 뜨거운 물을 넣어 희석시켜 마셨다. 그럼에도 달콤한 향은 충분히 입안에 감돌았다. 하지만 카페인 함량이 높은 음료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오랜 체질은 변하지 않았고 동료의 노력으로 만들어진 커피는 향으로 만족해야 했다. 


그럼에도 직장을 다니면서 커피 맛을 알아가다 보니 타협점이라 할 만한 커피 메뉴도 찾았다. 고구마라테만 마시던 내가 처음으로 차가운 바닐라 라테를 마셨던 어느 한 여름날을 시작으로 이제는 따듯한 바닐라 라테가 내 취향으로 굳혀졌다. 커피맛과 향은 나지만 우유가 들어가 부드럽고 속이 쓰리지 않으며 달기까지 한 완벽한 타협점. 하지만 카페라테에 시럽 하나 추가한 그 라테는 때때로 예상치 못한 수난을 겪었다.




바닐라 시럽이 들어갔나요?

한 번은 친구와 이태원에 있는 유명한 케이크 가게를 갔다. 나와 친구는 각기 다른 수도권 지역에 살고 있는데 어느 날 친구가 이런 의문을 제기했다.

"우리 둘 다 서울에 살지 않는데 매번 굳이 서울에서 만날 필요가 있을까?"

그 이후로 우리는 서로가 사는 지역에서 번갈아 만났다. 꼭 가고 싶은 가게가 있을 때만 다른 지역에서 보기로 했다. 그렇기에 이태원에서 만난 이유는 분명했다. 바로 유명한 피자 가게와 유명한 디저트 가게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이태원의 이미지는 내게 너무나 확고했다, 영어로 적힌 간판, 작은 케밥집, 펍과 클럽, 그리고 할로윈. 특히나 한적한 낮과 화려한 밤의 대비가 심한 곳. 하지만 우연히 (내 기준으로)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피자 가게를 발견하면서 대낮에 이태원을 찾았다. 아주 만족스러운 식사를 마치고 그 분위기를 이어가 보고자 미리 찾아봤던 카페로 들어갔다. 가게는 대로에서 꺾어 들어간 골목에서 계단을 내려가 만나는 더 좁은 골목에 있었다. 길을 거닐다 쉽게 찾을 수 있는 위치도 아니고 내가 갔던 날은 평일이었는데도 사람으로 가득했다.


달콤한 케이크를 먹을 때는 상대적으로 매트한 음료, 주로 아메리카노를 시키지만 나는 카페인이 받지 않는 몸이라는 핑계를 대며 똑같이 달콤한 음료를 시킨다. 이태원의 카페에서도 케이크의 당도와는 상관없이 평소처럼 따듯한 바닐라 라테를 주문했다. 얼마 후 주문한 케이크와 함께 커피가 나왔다. 첫 한 모금은 예쁜 라테 아트를 흐트러뜨리지 않았다. 그런데 커피에서 바닐라맛이 느껴지지 않았다. 상대적으로 쓴 카페라테 맛만이 혀에 남았다. 나는 혹시 시럽이 잘 섞이지 않았나 싶어 포크로 커피를 휘저었다. 이번에는 라테 아트도 살아남지 못했다. 충분히 휘젓고 나서 한 모금을 마셨는데도 아까와 똑같은 맛이었다. 친구에게도 한 모금 마셔보라고 했고, 우리 둘 다 같은 결론을 내렸다. '바닐라 시럽이 들어가지 않았다'

나는 직원에게 조심스럽게 바닐라 시럽이 들어가지 않은 것 같다고 말했다. 직원은 당황하면서 시럽을 넣어서 다시 만들어주겠다고 했다. 바닐라 시럽을 넣지 않았다는 게 생각나서 당황했던 걸까? 다시 만들어진 바닐라 라테는 입에 닿기 전부터 아주 진한 바닐라향을 풍겼다. 





휴일이라고 해서 항상 특별한 약속이 있는 것은 아니다. 가끔은 휴식을 취하기 위해서 일부러 약속을 잡지 않고 몸과 마음을 가만히 나두기도 한다. 하지만 약속이 없는 휴일만 이어지다 보면 바깥공기를 쐬고 싶어서 몸이 근질거린다. 출퇴근길에도 늘 쐬는 바깥공기지만 휴일에만 느낄 수 있는 애매한 오전 10시의 여유, 한낮의 따사로운 햇살을 갈망한다. 그럴 때면 혼자서라도 나와 길을 걷고, 작은 가게에 들어가서 구경하고, 서점에 들어가 책을 둘러보고, 카페 창가 자리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도로를 채우는 사람, 버스, 나무,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 불이 켜지는 간판을 구경한다.


카페 창가 자리는 인기도 많은 데다 때로는 창가에 자리를 마련해놓지 않은 경우도 있다. 그래서 사람이 비교적 적어 창가 자리의 경쟁이 치열하지 않은 카페를 발견하면 지도 앱을 켜서 꼭 표시를 해둔다. 그런데 어느 날 지도 앱을 무심코 들어갔다가 표시해둔 카페가 폐업한 것을 알게 됐다. 짧은 섭섭함을 뒤로하고 표시를 지웠다. 다음 날, 새로운 카페를 찾기 위해 동네를 어슬렁거리며 걸었다. 하지만 내 마음에 드는 카페를 찾는 일은 쉽지 않았다. 나는 혹시 하는 마음으로 폐업한 가게가 있던 자리로 향했다. 그 자리에는 간판과 인테리어가 바뀐 새로운 카페가 들어서 있었다. 인테리어가 바뀌기는 했지만 전면 유리를 따라 마련된 좌석 배치까지 변하지는 않았다. 게다가 개업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인지 사람도 많지 않았다. 가장 마음에 드는 창가 자리를 골라 가방을 내려놓고 주문하는 곳으로 가서 어김없이 따듯한 바닐라 라테를 주문했다. 새롭게 생긴 카페는 드물게도 주문한 메뉴를 직접 테이블로 가져다주는 시스템이었다. 이제는 사라져 가는 친절함에 감사를 표한 뒤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그런데 시럽 맛이 안 나는 것이 아닌가! 다시 한 모금 마시며 천천히 음미해봤다. 여전히 바닐라 맛은 나지 않았다. 이 사실을 말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이 됐다. 이태원에서의 일이 있은지 얼마 되지 않았던 때라 내가 너무 예민하게 군다는 생각도 들었다. 게다가 이번에는 같이 판단해줄 친구도 없었다.


그때 갑작스럽게 직원이 쟁반을 들고 등장했다. 가게 오픈 기념행사로 미니 스콘을 서비스로 준다는 것이었다. 작은 스콘과 수제잼, 버터가 한 쟁반에 예쁘게 담겨 내 앞에 놓였다. 스콘을 보고 있자니 더 말이 나오지 않았다. 커피와 스콘 둘다에 손을 대지 못한 채 잠시 고민하다가 '그래도 500원을 더 추가했는데'라는 소심한 생각을 하며 옆을 지나가는 직원을 붙잡고 물어봤다. 직원은 넣었는데 맛이 안 느껴지냐고 물었다. 나는 민망하기도 하고 역시 물어보지 말 걸 하는 생각이 들어 내가 잘 모르는 것 같다고 황급히 둘러댔다. 하지만 너무나도 친절한 직원은 다시 해주겠다며 내 커피잔을 들고 가려했다. 나는 손사래를 치며 아니라고 반복해 말했고 직원이 가려가려는 커피잔을 뺏으려 했다. 하지만 직원은 커피잔을 뒤로 빼며 괜찮다는 눈짓을 보내고는 조리대 뒤로 사라졌다. 직원이 다시 만들어준 바닐라 라테는 은은하게 바닐라향을 피웠다. 원래 바닐라향이 세지 않은 곳인 것이다! 죄송스러운 마음과 함께 카페의 특징을 기억 속에 저장했다, '바닐라향이 은은한 곳'





따듯한 걸로 시켰는데...

바닐라 라테를 처음 만난 계기가 '아이스'였지만 지금의 나는 한 여름에도 따듯한 바닐라 라테를 마신다. 그날 기분에 따라 쨍하니 달콤한 요거트나 에이드를 마시는 것이 아니라면 따듯한 음료를 고집한다. 뜨거운 여름날 테이크아웃을 할 때면, 내리쬐는 햇볕 때문에 정수리는 달아오르고 뜨거운 커피잔을 쥐고 있는 손은 데일 것 같아 자학적인 기분을 느끼지만 실내로 들어가면 괜찮아진다고 위로한다. 특히 내 손은 따듯하다 못해 뜨끈할 지경이라 뜨거운 커피와의 시너지는 달아오르는 용암 같다. 하지만 뜨거운 피부에 반해 속은 차다는 얘기를 들은 이후부터 찬 음료를 피하게 되었다.


한여름의 어느 날, 뜨거운 태양빛을 피해 점심식사 후 회사 사람들과 카페로 들어갔다. 다들 음료를 하나씩 주문하는데 나는 역시 따듯한 바닐라 라테를 골랐다. 동료들은 30도가 넘는 날씨인데도 '따바라'냐며 기겁했다, 들고 가다 손 타는 거 아니냐고. 각자가 주문한 음료가 하나씩 나오는데 어찌 된 건지 모두 아이스였다. 평일 점심시간이라 카페가 붐볐기 때문에 그냥 아이스로 먹을까 싶었다. 그때 동료 중 한 명이 내 손에 들린, HOT이라고 적힌 영수증과 차가운 바닐라 라테를 카운터로 가져갔다. 거리가 좀 있어서 정확히 무슨 얘기가 오갔는지는 모르겠지만 주인이 깜짝 놀란 표정을 지으며 차가운 바닐라 라테를 가져가는 것이 보였다. 나를 대신해 음료를 바꿔 준 동료는 누가 이 날씨에 따듯한 걸 먹냐며 내가 잘못한 거라고 장난스럽게 나무랐다.




따듯한 바닐라 라테는 내게는 불변의 메뉴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기본에 시럽을 추가해야 하는 번거로운 메뉴가 되기도 하고 수많은 아이스 메뉴 속에서 튀는 메뉴가 되기도 한다. 그럼에도 참으로 다행인 것은 어느 카페를 가든 찾을 수 있는 메뉴라는 것이다. 기본이지만 기본이 아닌 메뉴. 누군가에게 번거로울 수도, 헷갈릴 수도 있는 메뉴지만 '그래도 기본 메뉴 중 하나'라는 생각으로 고집스러운 메뉴 선택을 합리화한다. 하지만 이렇게 글을 쓰고 보니 마음이 좋지 않다. 500원이 뭐라고, 차가워봤자 우유가 얼마나 차갑다고 굳이 다시 받아야 했을까? 내가 주문한 대로 받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 모습이 마치 손해를 보지 않으려고 애쓰는 것 같아 마음이 불편하다. 누군가의 실수를 감싸는 포용과 내가 주문한 대로 받을 권리 사이에서 중심을 잡고 방향을 잡는다는 것이 쉽지 않다.


내가 따듯한 바닐라 라테를 마시는 세월이 오래될수록 그 메뉴는 나의 시그니처가 되어버렸다. 누군가 내게 깜짝 커피를 사줄 때 그들은 고민 없이 따듯한 바닐라 라테를 고른다. 바닐라 라테가 맛있는 집을 발견하면 날 떠올리고, 흔하지는 않지만 바닐라 라테 원 플러스 원 행사를 할 때면 내게 메시지를 보낸다.

'제가 사가니까 모닝커피 사지 마세요~'

시럽이 빠졌다고, 따듯한 걸 시켰다고 얘기했을 때 고맙게도 바로 다시 만들어주신 분들까지. 고마운 사람들의 기억으로 채워진 나의 따듯한 바닐라 라테. 그래서 난 이 메뉴를 더 좋아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커피로 시작하는 아침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