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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과실 Mar 12. 2021

퇴근길에는 어떤 음악을 듣나요?

퇴근길 음악 변천사

붐비는 지하철, 휴대전화나 책으로 시선을 고정한 사람들이 가끔씩 흔들거리는 열차에서 중심을 잡기 위해 다리 간격을 살짝 벌리고 서있다. 열차 간격을 조정하기 위해 갑자기 멈추거나 출입문 위치 조정을 위해 짧은 간격으로 가다 서다를 반복할 때가 아니면 손잡이 조차 잡지 않는 사람들이 태반이다. 늘 겪는 출퇴근길에 익숙한 사람들은 어딘가에 의지하지 않고도 중심을 잡을 수 있는 저마다의 노하우를 갖고 있다. 덕분에 양손이 자유를 얻는다.


퇴근길에는 특별함이 없다. 창밖으로 해가 지고 뜨고, 똑같은 노선을 어느 방향으로 가느냐만이 출근길과 다를 뿐이다. 그럼에도 모든 직장인이 퇴근을 갈망하는 이유는 같다. 업무로부터의 해방.

일에서 해방된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행복해야 하는 퇴근길인데 항상 기분이 좋지만은 않다. 하루 종일 업무에 시달린 후유증으로 맥없이 멍한 상태가 되기도 한다. 때로는 머릿속과 마음에서 업무가 물러가면서 부스러기를 남기고 가거나 차마 물러가지 못한 업무의 기억이 남을 때가 있다. 그러할 때는 잔여물을 정리하려고 음악을 듣기도 한다. 나는 주로 한 번 꽂힌 음악을 반복해서 듣곤 한다. 퇴근길 어지러운 마음을 달래주는 음악은 당시 꽂혔던 노래가 무엇이었는지에 따라 바뀌었다.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박장현 '두 사람'

나의 첫 퇴근은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학교 수업이 있는 평일에 아르바이트를 하는 날에는 해가 진 후 퇴근할 수 있었다. 언제 켜졌는지 모르는 가로등은 당연한 듯 자신의 아래 세상을 밝히고, 나는 피아노 건반처럼 가로등이 밝히지 않는 검은 건반과 가로등이 밝히는 하얀 건반을 번갈아 밟으며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그때 들었던 노래가 바로 박장현이 부른 '두 사람'이었다.


원곡은 성시경이 불렀지만 나는 드라마 '상속자들'에 나온 버전을 더 좋아한다. 노래의 색깔이 더 쓸쓸하고 힘겹기 때문이다. 대학생 시절, 청춘이라는 꽃을 활짝 펼치기 위해서 꽃잎을 하나하나 펼치는 과정은 굉장히 힘겨웠다, 몸과 마음이 모두 지칠 정도로. 고생스러운 하루가 막을 내리고 위로받고 싶을 때 들었던 노래다.


노래 가사는 '그 사람이 있으니 견딜 수 있다, 함께 헤쳐나가자'는 내용이다. 그때의 나는 혼자서 다 감당하려 했다. 나눌 수 없고 나눠서도 안 된다고 생각하며 자학적인 방법을 택했다. 그때 내가 좀 더 마음을 열었다면 덜 힘들지 않았을까?


첫 직장 퇴근길, 이적 '걱정 말아요 그대'

아마 대부분의 사람에게 첫 직장의 기억은 다이내믹할 것이다. 하루가 다르게 기분이 오르락내리락하고 나 자신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게다가 만나는 사람은 또 얼마나 다양한가. 나와 잘 맞는 사람, 인정해주는 사람, 칭찬해주는 사람도 있지만 트집 잡는 사람, 무시하는 사람, 질투 많은 사람도 있다. 사람에게 받는 상처와 업무에 느끼는 당혹감, 그리고 나에 대한 실망. 이 모든 것 속에서 실수도 하고 후회도 하며 몰래 화장실에서 눈물을 닦을 때도 있었다. 


내 마음을 쥐락펴락하는 것들을 전부 흘려보내고 싶을 때 듣는 노래가 있었다. 그때 그 순간이, 이 기억이 다 지나가버리길 바라며 들었던 노래, 바로 이적의 '걱정 말아요 그대'이다. 기타 선율 한 가닥이 내 기억을 찌르고 그 한 가닥이 튕겨지면 내 기억도 튕겨서 날려버렸다. 이미 지나간 버린 일은 다 의미가 있었던 것이라 생각하며 붙잡지 말고 보내주자고 다짐한다. 내가 그 순간 그랬던 것은 그 선택이 최선이었기 때문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하며 퇴근 후의 내게 용기를 주었다.





익숙해진 시간, 가브리엘 'Out of reach'

직장 생활 2년 차에 했던 소개팅에 음악을 전공한 남자가 나왔다. 소개팅남은 내게 어떤 음악을 듣는지 물었다. 지금도 내가 음악을 많이 아는 편은 아니지만 그때는 더 몰랐다. 영화 보는 것을 좋아하다 보니 내가 알고 있는 음악도 영화음악에 한정되어 있었고 사는 앨범도 영화 OST 뿐이었다. 내가 솔직하게 얘기를 하자, 소개팅남은 자신도 영화 OST에 관심이 많다며 한 곡을 추천해달라고 했다. 그때 추천했던 곡이 바로 가브리엘의 'Out of reach'였다. 


이 노래는 영화 '브리짓 존스의 일기' OST의 1번 트랙이다. 나는 브리짓 존스를 좋아한다. 평범한 모습이라서 나이가 들수록 생각나는 캐릭터다. 내 삶이 화려한 영화 속 주인공의 삶과는 다르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브리짓 존스를 더 곁에 두고 싶어 졌다. 노래가 시작되면 둥둥거리는 무거운 음이 울리면서 내 마음을 자극한다. 눈물이 나기 직전 마음이 울먹거릴 때 느낌이다. 가수의 목소리가 음과 어우러지면서 내 마음을 잔잔하게 위로한다. 직장 생활이 오래될수록 퇴근길에 회사에서 있었던 일을 잊어버리는 속도는 빨라진다. 그래, 인생 다 그런 거지.


알 수 없는 갈증에 시달릴 때, 존 카메론 미첼 'Midnight Radio'

첫 직장에서의 2년 계약직이 끝나고 다른 곳으로 이직했다. 운이 좋아서 짧은 공백을 겪은 후 다시 돈을 벌 수 있었다. 다시 돈을 번다는 것은 다시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것과 같다. 이전 직장에서의 경험을 통해 단단해진 나는 새로운 직장과 부딪힐 때마다 부싯돌의 불처럼 불꽃을 내뿜었고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그런 날의 퇴근길에는 복잡한 마음과 힘이 다 빠진 몸뚱이만 남아있었다. 몸과는 다르게 마음은 들끓다 보니 나를 대신에 에너지를 해소해줄 것이 필요했다. 더 강해서 나를 부서뜨릴 것 같은, 그러면서도 나를 담아줄 수 있는 음악이 필요했다. 그러한 음악을 찾는 여정은 쉽지 않았다. 처음에는 퀸의 'Another one bites the dust', 그리고 가끔 'The show must go on'을 들었다. 그러다 기타 소리에 끌려 게리 무어의 'Still got the blues'로 넘어갔다. 그리고 마침내 이 노래에 정착했다.


헤드윅은 중학교 때 영화로 처음 접했다. 헤드윅 뮤지컬을 보러 가기 전에 엄마께서 이해를 돕고자 보여주셨다. 낯선 주제와 선정적 장면이 자극적으로 느껴져서 영화가 부담스러웠다. 게다가 뮤지컬도 혼자서 이끌어가다 보니 낯설었다. 그런데 10년도 더 지난 어느 날 밤, 갑자기 헤드윅 영화가 보고 싶어 졌다. 다시 보니 캐릭터와 줄거리가 새롭게 받아들여졌다. 그리고 또 1년이 흘렀다.


어느 퇴근길, 헤드윅의 마지막 장면에서 울려 퍼졌던 노래의 멜로디가 어렴풋이 떠올랐다. 어렴풋한 기억을 쫓기 위해 앨범 전곡을 들었고 드디어 찾아냈다. 바로 내가 찾던 노래다, 답답한 마음을 폭발시켜주면서도 달래주고 위로해주고 나를 다시 살아가게 만들 노래. 잔잔하게 시작했다가 폭발하는 악기와 노랫소리가 내 마음을 대변했다. 퇴근길은 폭발하는 콘서트장이 되었고 지하철 창밖으로 지는 해는 내 마음처럼 마지막 빛을 폭발시키고 있었다.




생각해보면 일주일 중 다섯 번은 겪는 일이 퇴근이다. 매일 같이 반복되는 시간과 똑같은 길이 지루하기도 하다. 게다가 퇴근길이 길어지면 그 시간을 알차게 보내야 한다는 압박을 느끼기도 한다. 이직을 하고 나서 출퇴근길이 길어지면서 시간을 유용하게 쓰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동원해봤다. 외국어 공부를 위해 단어도 외워 보고, 책도 읽어 보고, 정말 간혹 밀린 업무를 처리하기도 했다. 알차게 쓰는 것도 좋지만 가끔씩은 휴식이 필요하다. 생각을 쉬어 머리를 쉬게 하는 시간 말이다. 회사에서 스트레스를 받았거나 붐비는 퇴근길에 몸과 마음이 지치는 날이면 자연스레 들리는 음악에 귀를 맡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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