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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과실 Apr 05. 2021

시나몬에 빠져 당근케이크를 만나다

당근케이크의 소박한 기원

초등학교 때 '모둠 활동'을 하기 위해 평소 말 한 두 마디만 주고받았던 친구의 집을 간 적이 있다. 친구가 문을 열자마자 집 안으로부터 진한 계피향이 몰려왔다. '이게 무슨 냄새지?'라는 질문이 내 표정에서 드러났는지 친구는 엄마께서 아침부터 계피를 끓이고 계셔서 온 집 안에 계피 냄새가 진동한다고 말했다. 어린 나이임에도 수정과를 포함해서 계피가 들어간 음식을 꽤 먹어본 축에 속지만 그렇게 진한 향은 처음 맡아봤다. 그때의 기억이 너무 강렬했던지 그 이후로는 계피가 들어간 음식을 선뜻 고르지 않았다.


세월이 흘러 대학생이 될 때까지 계피와 거리두기는 계속되었다. 무의식적으로 두고 있던 거리가 좁혀진 것은 우연한 일에서 비롯되었다. 신촌에서 친구를 만나기로 한 날이었는데 평소 약속시간에 늦지 않던 친구가 그날따라 한 시간이나 늦게 온 것이다. 친구는 정말 미안하다며 신촌 현대백화점 지하에 있는 안티안즈 프레즐 가게로 나를 데려갔다. 그때만 해도 입맛이 꽤나 고집스러웠던 터라 새로운 음식보다는 익숙한 음식을 선호했고 음식에 도전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미안한 마음을 담아 사주는 프레즐에 훈수를 둘 정도로 이기적인 사람은 아니었다. 직원이 듬성듬성 잘라준 시나몬 프레즐을 처음으로 입에 넣는 순간 달콤하고 쫄깃한 맛에 놀다. 친구에게 이 달달한 가루가 무엇인지 묻자 친구는 시나몬, 즉 계피라고 말했다.




시나몬과 계피는 같으면서도 다르다. 시나몬(cinnamon)을 한국어로 번역해야 한다면 '계피'로 번역해도 무방하지만 둘의 기원을 따라가면 엄연히 다른 품종이다. 게다가 시나몬과 계피를 각각 떠올렸을 때 연상되는 맛과 향에도 조금의 차이가 있다. 계피라 하면 수정과가 떠오르면서 향도 강하고 살짝 매운맛이 떠오르지만 시나몬이라 하면 은은한 향과 맛이 연상된다. 실제로 품종으로 따지자면 시나몬의 맛과 향이 계피보다 약한 것이 사실이다. 시나몬 프레즐에 대한 친구의 설명이 완전히 맞는 것은 아니었지만 덕분에 계피에 대한 고정관념도 깨졌다.


그 이후로 지금까지 메뉴 이름에 '시나몬'이 들어가면 일단 먹어본다. 얼마 전까지 던킨도너츠에서 팔았던 시나몬롤, 스타벅스에서 시즌 메뉴로 나왔다가 사라진 더블 에스프레소 시나몬 라테. 짧은 기간 판매하다 보니 집착적으로 사 먹었다. 내가 좋아하는 메뉴가 사라져 버리는 것은 참 씁쓸하다.




스타벅스의 당근 케이크


시나몬이 들어간 메뉴는 다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다. 그중에서도 내가 가장 좋아하는 메뉴는 바로 당근 케이크이다. 처음 당근 케이크를 접한 것은 우연이었다. 친구들과 카페에 갔는데 한 친구가 내게 시나몬을 싫어하는지 물었다. 내가 좋아한다고 답하자 친구는 케이크 한 조각을 골랐다. 절제된 단맛 덕분에 질리지 않고 깊게 베여있는 진한 향이 먹는 내내 코를 즐겁게 했다. 계속 먹다 보니 케이크의 향이 계피향과 비슷하다는 것을 알아챘다.


바르셀로나에서 교환학생으로 지내던 시절, 한국인 친구가 사는 기숙사 방으로 놀러 갔다가 또다시 당근 케이크를 만났다. 커다란 오븐 틀에서 그대로 꺼듯한 홈메이드 당근 케이크였다. 한국인 친구의 현지인 룸메이트 어머니께서 만들어 보내주신 거라고 했다. 현지인 룸메이트는 마음껏 먹으라며 거실에서 TV를 보고 있었고 우리는 작은 조각으로 잘라내어 맛을 봤다. 그때 알게 됐다, 내 입맛에 꼭 맞았던 케이크가 바로 당근 케이크였다는 것을! 뭔가에 홀린 듯이 먹다 보니 어느새 4~5조각이 넘어갔다. 현지인 룸메이트가 진정으로 신경 쓰지 않아서 다행이었지, 아니었으면 얼마나 무례한 행동이었던가.


케이크의 정체를 알게 된 이후로는 여러 브랜드의 당근 케이크를 먹어봤다. 당근 케이크가 맛있다는 가게를 찾아가서 먹어도 보고 우연히 간 카페에서 당근 케이크를 팔고 있으면 운명적인 재회라도 한 듯 주저하지 않고 주문했다. 그러다 보니 같은 당근 케이크라도 견과류가 적게 들어간 것을 선호한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당근 케이크는 설탕이 귀하던 시절 영국에서 설탕 없이 단맛을 내기 위해 당근을 넣어 케이크를 만들던 것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빵 시트 사이사이에 크림치즈를 바르고 견과류를 가득 넣어 한 조각에 6~7천 원 받는 요즘 당근 케이크를 생각하면 유래가 어울리지 않는다.


우리 동네 지하철역 앞에는 작은 빵집이 있다. 인테리어라고 하기도 애매할 정도의 투박한 가게는 제빵실과 그 앞에 진열장이 전부다. 정말 빵을 팔기 위한 실용적인 공간 구성이다. 가게는 내 손바닥보다 좀 더 큰 홀 당근 케이크를 5천 원에 팔고 있다. 채로 썬 듯 큼직한 당근 조각이 눈에 띄게 섞여 있고 견과류는 전혀 없다. 퇴근 후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종종 가게에 들러 당근 케이크를 사 온다. 소박한 유래를 떠올리면 당근 케이크를 좋아하는 마음도 덩달아 겸손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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