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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과실 Jan 19. 2022

출근길 지하철의 철학

수많은 가젤 중 하나

우리 집에서 유일하게 아침 출근을 했던 나에게는 아침 기상이 늘 고요하고 외로웠다. 집안에서 유일하게 빛을 내던 내 방은 다른 공간을 칠흑으로 만들어 어둠을 자극했다. 가족들을 깨우지 않으려고 조용히 집을 나선 후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누르고 잠시 기다리면, 엘리베이터 도착과 함께 안내음이 잠시 적막을 흔들었다. 옷감이 스치는 바스락 소리가 걸음을 뗄 떼마다 규칙적으로 들렸다.


지하철역에 가까워질수록 사람들이 늘어났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모를 사람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지하철역 출구로 들어갔다. 붐비는 지하철역으로 들어가면 떠나온 공간과의 온도차가 확연한 탓에 그제야 '하루가 시작됐다'라고 깨달았다.




자리에 앉아 갈 생각 따위는 감히 할 수도 없었다. 내가 빨리 들어가고 싶은 건지 아니면 뒷사람이 밀까 봐 발을 재촉하는 건지 생각할 틈도 없이 앞사람과 뒷사람 사이에서 밀고 밀리며 열차에 올랐다. 맞은편을 지나는 열차는 항상 자리가 넘쳐나던데 왜 내가 타는 열차만 유난히 붐비는 걸까? 열차의 규칙적인 흔들림과 따듯함을 넘어선 체온 때문에 가만히 중심을 잡고 있으면 서 있는데도 졸음이 밀려오고 출근길부터 퇴근을 기다리는 아이러니를 겪었다.


내 앞에 선 여자가 머리를 넘기면 그 머리가 내 코를 때릴 정도로 지하철 안의 사람들은 가까이 서 있었다. 친구와도 그 정도로 가까이 서 본 적이 없는 나는 단지 거리 때문이 아니라 같은 칸 안의 사람들에게서 유대감을 느꼈다. 이 중 80%는 나와 같은 이유로 지하철을 타지 않았을까 섣부르게 추측해봤다. 나 역시 누군가에게는 그 80% 중 하나일 거라고 생각하니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다.


수많은 가젤 중 하나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세월의 물살을 이기지 못하고 떠내려간, 지금은 기억나지 않는 시간을 겪고 나니 다 같이 뛸 때 뛰고 밥을 먹을 때 먹는 가젤 무리 중 하나가 되어버렸다. 그런 생각이 반복될수록 점점 무기력해져 가고 특별히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결심도 사라지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내가 지금 이 지하철을 타기 위해, 수많은 가젤 중 하나가 되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지금 내가 느끼는 무기력함은 사실 이미 성취한 것에서 오는 지루함이 아닐까?


열차 속에서 한 발자국조차 편히 내딛지 못하는 사람들 모두 이 지하철을 타기까지가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한 때는 이 지하철을 타고 싶었고 또 어떤 때는 이 지하철에 탄 사람을 부러워했을지도 모른다.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 이 틈에 자리한 내가 얼마나 자랑스러운가.




처음 서너 개의 역을 지날 때는 갈수록 사람이 많아지더니 어느 지점을 넘어가면서 줄기 시작했다. 하필 내가 내리는 역에서 사람들이 많이 내리면 숨 막힐 듯 달려온 것이 억울하기도 했다. 드디어 목적지에 도착해 지하철 밖으로 나와 찬 공기를 맞이했다. 가끔은 그 순간 웃음이 나기도 했는데 힘겹게 온 것에 대한 보상이거나 드디어 해냈다는 뿌듯함 때문이었을 것이다.


지상과 지하를 넘나드는 작은 열차 안에서 세상을 내다보며, 답답함과 안정감을 동시에 느끼는 것은 특권일지 모른다고, 나 자신에게 소박한 위로를 건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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