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오적인 이상은 의구심을 제시하는 사람들에 의해 반드시 바로 잡힐 것이다
자신의 착오적 이상을 위해서라면 누군가를 희생시키는데 거리낌이 없는 자들. 우리는 언제나 그런 사람들과 뒤섞여 살아가며, 상식과 도덕성은 그런 사람들에 의해 흔들린다. 너무나 일상적이어서 의심하지 못했던 이상적 사회와 일상이 평범한 인물이라 생각했던 특정인들에 의해 언제든 전복 될 수 있다는 위기감 속에 살아가는 요즘이다.
'지극한 평범한 사람들이 평범히 행하는 일이 악이 될 수 있다'. 독일계 유대인 정치학자인 한나 아렌트는 너무나 일상적이어서 진부할 지경인 악인들을 칭하며 '악의 평범성'이라는 이론을 내놓았다. 유대인 학살의 주범이자 나치 친위대 장교인 아돌프 아이히만이 예루살렘에서 이스라엘 사법부에 의해 받은 재판을 기록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제시한 개념이다. 그녀는 뒤이어 역사적으로 반복되어 왔던 악행들이 반사회성 인격장애자들이 아니라 국가에 순응하며 세뇌된 다수의 개인들에 의해 행해진다고 말하며 악인은 '도덕적으로 타락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생각하기를 포기하고 사회와 구조에 저항하려 하지 않는 무사유’ 때문에 등장한다고 주장했다.
아돌프 아이히만은 '악의 화신'이라는 악명이 무색하게 아주 평범히 볼 수 있는 50대 아저씨의 모습을 하고 있었는데 마치 내 옆 집에 살고 있을 것 같은 모습을 하고 나와선 학살을 포함한 자신의 기소 항목을 모두 '무죄'라고 주장했다. 아이히만에 의해 설계된 대규모 학살은 실행 이전 내렸던 지시, 계획과 편지교환 내용이 모두 보존되어 있었기 때문에, 많은 증거자료가 존재했음에도 일말의 반성도 없었던 것이다. 자신은 그저 정부에 충성했고 정부의 지시를 성실하게 수행했기에 말이다.
알리 압바시 감독은 이런 지극히 평범한 악의 얼굴들을 그려내 오고 있다. 그 중 <성스러운 거미>는 여성 저널리스트 라히미(자흐라 아미르 에브라히미)가 '거미'로 불리는 이란의 연쇄 살인마 사이드 아지미(메흐디 바제스타니)를 추적하는 영화다.
무슬림의 성지로 매년 2000만명 이상의 순례자와 많은 관광객이 오고가는 이란의 두 번째 도시, 마슈하드. 그곳에서 2000년 8월부터 1년간 성노동자 여성을 살해한 39세 남성인 사이드 하네이를 다뤘다. 어린 딸을 키우기 위해 모스크 사원 앞에서 기도를 올리고 생업으로 뛰어든 여성을 시작으로 총 16명의 여성을 살해한 그는 경찰에 체포된 뒤에도 자신은 그저 우리 사회를 위해 불경한 이들을 청소하는 성전, '지하드'를 펼친 것이라며 용서를 빌어야 할 이유가 없다고 주장한다.
이제 우리의 상식선에서 본다면, 국가와 국민들은 그 살인마를 질타해야 마땅하다. 하지만, 강경 종교파와 보수 언론은 그를 지극히 온당한 처형을 수행한 성스러운 살인마라고 추대한다. 그들을 뒤에 업은 그는 카메라와 세상 앞에서 어깨를 펴고 자신의 악행을 자랑스러워하며, 심지어는 아들에게 그런 여성들을 죽이는 것이 세상과 사람들을 구하는 것이라는 끔찍한 소리를 내뱉기도 한다. 악은 그렇게 다시 승계된다.
물론 국가와 공권력도 이 악인을 길러내는데 동조한다. 많은 이방인들을 상대하고자 하는 성 노동자 여성들은 모스크 사원 주변으로 모여들고, 그들의 성에 대한 수요와 공급이 동시에 이루어진다. 도시를 대표하는 신성성과 달리 마약과 성매매가 만연하지만, 그들은 국가를 구성하는 산업이라는 이유로 이들을 묵인한다. 그렇기에 이 노동자들의 죽음에도 별반 관심이 없고 오히려 도시의 어두운 면이 알아서 자정된다며 악인을 추대하는 것이다. 영화는 이 악인의 등장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사회의 책임과 그 사회에 내제되어 있는 심리를 목격하고 조명한다.
이들을 지적하고 사건을 파헤치고자 하는 것은 오직 라히미 뿐이다. 그 살인마와 그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이미 '생각하기의 무능함', '말하기의 무능함', '판단하기의 무능함'으로 절대악을 현상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저 그들이 믿는 종교에는 충성을, 신자들에게 봉사한다는 평범해보이는 명분 아래에 말이다.
그리고 그들에게 있어 신자와 국민은 오직 '기득권 남성', 그리고 '그들의 권력을 보존해 줄 특정인'에게만 해당한다. 그렇기에 라히미에게는 선을 넘고 있다며, 공포심을 조장하지 말라며 경고하며 위협하는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여성을 손쉽게 약자로 몰락시키기 위해 가해자 남성의 범죄를 방조하는 사회에 대한 분노에서 비롯된 라히미의 분노는 멈추지 않는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현실화 된 착오적 이상이 언제 완전히 전복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성스러운 거미>는 우리 사회와 사람들을 향해 내민 거울 같은 영화다. 특권과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그 어떠한 악행도 망설이지 않는 끔찍한 악의 본질은 형태만 바꾸어 현재까지도 복제되고 있으며 정의로운 이상을 실현하는 길은 지난하고 투쟁적임을 비추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에서도 그렇다. 미래 세대에게 더 나은 나라를 선물하겠다는 착오적 이상을 이유로 범죄를 저지르고도, 집권 집단과 일부 극우 보수층들은 현재까지도 그 악인만을 섬기며, 그들만의 세상에서 떳떳하게 고개를 쳐들고 있다. 마치 저 살인마와 저 살인마를 두둔하는 사람들처럼.
그러나 입을 막아도, 사라지지 않는 목소리가 있다. 우리에겐 마치 수 없이 위협 받아도 자신의 분노와 이상을 놓지 않는 라히미들이 있다. 누군가 정의라는 이름으로 우리를 희생시키려는 범죄를 저지를 때, 그 착오적인 이상은 의구심을 제시하는 사람들에 의해 반드시 바로 잡힐 것이다.
믿음은 결국 의심과 행동으로 실현되기 때문이다. 다수가 행하는 반인륜적인 범죄와 폭력에 강력한 당위성이 부여되는 순간은 그 폭력이 우리를 위해 행해지고 있다는 거짓에 세뇌 당할 때임을 알고, 현재까지도 믿음을 외치고 있는 우리와 라히미에게 꼭 맞는 정의가 찾아올 것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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