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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루트 Nov 13. 2021

둔감한, 그리고 예민한 나

이어서 편안한 상황도 생각해보자.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완전히 이완된 상태이다. 따뜻한 침대 위에서 이불 속에 들어가 흐물흐물거릴 때가 먼저 떠오른다. 그다음은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 깊은 잠에 들었을 때 정도가 떠오른다. 위와 같은 상황들은 나에게 어떠한 작용을 하기에 편안함을 안겨주는가? 바로 에너지의 공급과 보존이다. 앞서 나온 불편함이 생존 위협에 대한 반작용이라면 편안함은 생존유지에 대한 반작용이다. 그리고 이 편안함은 행복의 한 축으로서 편안한 상태, 즉 생존유지를 지속하려는 경향성으로 발현된다. 불편함을 통해 위협을 제거/회피하려 하고, 편안함으로 생존유지를 지속시킨다. 이것이 유기체로서 나이다. 물론 심리적인 것도 엄밀히 말하자면 유기체적/생물학적인 것이겠지만 편의상 신체적인 것을 위주로만 언급했다.


그럼 편안한 것은 좋기만 한가? 꼭 그렇지는 않다. 이것만으로는 편안함의 상태를 유지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위험감수성이나 개방성의 특징이 발휘되어 단순히 편안함만이 아닌 즐거움을 찾는다. 편안함을 유지하고자 하면서도 쾌락을 추구한다. 그렇게 나는 불편하고 힘든 상황을 피하고 싶어하고, 편안하고 안정적인 일상을 꿈꾸면서도, 설레고, 스릴있고, 역동적인 것들을 추구한다.


그런데 앞서 불편한 점에 대해서 말할때, 그 대응이 중요하다고 한 부분이 기억나는가?

과연 스스로 둔감하다고 말하는 나는 이것들에 대해 어떤 대응을 할까?
먼저 불편함은 제거 또는 회피의 대상이 되기에 좀 더 급진적인 반응이 나타나기 쉽다. 그렇기에 불편함에 대한 대응의 방식이 타인에게 내가 미처 생각지 못한 부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음을 염두에 두고 나는 그 대응법에 대해 좀 더 주의를 기울인다. 하지만 나는 둔감하기에 타인에게 영향을 덜 받지만, 반대로 타인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예측하는 것이 쉽지는 않다. 그렇기에 학창 시절에는 왕따였던 적도 있다. 따돌림을 당하고서야 나의 반응성이 사회적으로 부정적으로 받아질 수 있음을 깨달았다.


이러한 경험들이 쌓이다 보니 감정에 대한 반응과 대응을 지연시키기 시작했다. 바로 반응하지 않고, 바로 대응하지 않는다. 그것이 외부에서 보면 더욱 둔감하게(ai나 로봇처럼 보인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보일 수도 있지만 나름의 사회에 대한 적응법이다. 느낌에 대한 반응과 대응이 충분히 받아들여질 수 있는지 생각해보고 행한다. 물론 타이밍이 늦어 대응을 아예 못하거나, 왜 아무런 대응이 없냐는 말을 들을 때도 있다. 그뿐만 아니라 천천히 다시 생각하다 보니 제삼자의 시선으로 보게 되기에 주변 사람들에게 공감능력이 부족하다는 말도 많이 듣는다. 누군가는 너무나도 쉽게 자동적으로 발휘되는 것이기에 이해가 안 될 수도 있으나, 나에게는 일일이 생각하고 판단해야 하는 것이다.


나에게 다른 사람들은 예민함과 민감함이란 강력한 무기를 가진 이해하기 어려운 천재들이다. 그들이 너무나도 쉽게 그냥 하는 것을 구체적으로 하나하나 인지하며 해야 한다. 운동 천재들이 그냥 하면 된다고 하는 게 쉽게 이해 안 되는 것과 비슷하다. 나는 근육의 움직임 하나하나를 알려줘도 바로 따라 하지 못하고 겨우겨우 머리로 이해정도만 할 수 있는 수준인 것이다. 그렇기에 가끔은 금수저들이 흙수저에게 '노력을 안 해서 그런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경우도 있다. '왜 그렇게 둔감하냐?', '눈치가 없냐?'는 말은 금수저들이 노력만을 운운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예민한 사람을 배려하라는 말은 많이 하지만 둔감한 사람에 대한 배려는 찾기 힘들다. 그저 둔감한 것으로 치부하고, 공감능력이 없는 마치 노오오오력을 하지 않은 감수성 흙수저로만 치부된다.

학창 시절에는 단 한 번도 직접적으로 어떤 것이 자신에게 어떻게 다가오고 어떻게 느껴지진 다는 말을 해준 사람이 없었다. 예민한, 아니 평균 정도의 민감함만이라도 가졌더라면 말해주지 않더라도 알았을 것이다. 하지만 둔감한 나에겐 온통 이해불가의 영역이다.

극단적인 비유를 해보자면 '즐겁게 살인을 했다'라는 말이 공감이 되는가? 이해도 잘 되지 않는 말이다. 나에게 많은 것들이 그렇다. '저게 저만큼 반응할만한 일인가?', '저게 왜 웃긴 거지?' 등등... 사람들의 행동과 그 반응들은 자동적으로 이해되기 힘든 영역이다. 앞서 말한 '즐겁게 살인을 했다'라는 내용도 어떤 상황인지, 어떤 정신병이 있는지 설명이 되었다면 공감은 못해도 그 감정의 기작은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다. 마찬가지다. 말해준다면 당장 공감은 힘들어도 이해할 수는 있다. 하지만 사회문화적으로 감정을 드러내는 것을 피하는 나라에서는 영문도 모르는 상태로 그저 둔감하고 눈치 없는 인간이 될 뿐이다.

둔감함은 그저 이해할 필요도 없는 악과도 같이 다뤄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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