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주호 Jan 21. 2021

김치가 중국 꺼? 김치로 싸다구 한 번 맞아볼래?

역사 e 시리즈

 몇 해 전에 "지식 e"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다. 총 8권 분량의 책이라 읽는 데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그 내용만큼은 아주 인상 깊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 책이 인상 깊었던 건 그 책이 다루는 주제들이 주는 신선함 때문이었던 것 같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었던 역사적인 사건 속에서 조명받지 못한 부분을 보여준다거나 사람들이 많이 주목하고 관심 가지지 않지만 우리가 꼭 알아야 할, 혹은 잊지 말아야 할 것들을 다루었다. 원래는 EBS에서 방영하는 약 5분 정도의 짧은 다큐멘터리인데, 책으로 엮으면서 방송에서는 미처 보여주지 못했던 내용들을 더 추가했기 때문에 내용도 나름 탄탄하다는 느낌이었다. 

 이번 "역사 e"도 마찬가지였다. 총 5권으로 구성된 이 책에서는 고구려부터 현재의 대한민국까지 한반도에서 터를 잡고 살아가는 우리 민족의 역사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었다. 우리가 잊고 지냈던 부끄러운 역사들부터 절대 잊지 말아야 할 일들,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지 않지만 우리가 지키고 계승해야 하는 문화들까지 폭넓은 주제를 다루었다는 점에서 매우 유익한 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재미있는 내용도 많아서 개인적으로는 한국사 입문서로서는 최고의 선택이 아닐까 한다. 


 수많은 에피소드들 중에서도 유독 눈길을 끄는 부분은 여성에 대한 부분이다. 딱히 페미니스트는 아니지만 조선시대의 여성들을 보고 있자면 안타까움을 넘어서 울화통이 터진다. 특히나 전쟁이라는 격동의 틈바구니에서 고통받은 여성들의 모습은 들여다보기가 무서울 정도로 처절하다. 국가가 국민들을 지켜줄 정도로 강하지 못하다는 이유로 너무나도 많은 백성들이 고통을 받았다. 특히, 노예로 끌려간 여성들은 노동력을 제공하는 것 이외에도 적국의 병사들에게 자신의 성을 강탈당하는 고통까지도 겪어야만 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아이가, 세상에 둘도 없는 내 핏줄인 누이가 단지 나라가 나약하다는 이유만으로 적국의 병사들에게 겁탈당하고 유린당하는 현실이 상상이 되는가? 당시 조선 남성들은 가늠조차 되지 않는 고통을 겪다가 고향으로 돌아온 여성들에게 “환항녀”라는 프레임을 씌워 그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요즘은 잘 쓰지 않지만 “화냥년”이라는 욕은 “환향녀”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실제로 죽음의 고비에서 오직 가족만을 생각하며 천신만고를 겪고 간신히 살아 돌아온 소중한 내 딸아이, 내 부인, 내 누이가 적국의 남성에게 성을 강탈당했다는 이유만으로 조선시대의 남성들은 이혼을 요구하거나 집에서 쫓아냈고, 심지어는 자살을 종용하기도 했다. 남자들이 허약해서 내 나라, 내 가족이 고통받는 것은 생각도 하지 않고 오로지 지 혼자 잘났다고 고개 빳빳이 세우고 다니는 것들을 그래도 남편으로, 아비로 모시고 살아야 하는 삶이라니. 머나먼 과거의 일이 아니다. 불과 수십 년 전에도 우리나라 여성들은 같은 고통을 겪었다. 당시의 피해자들은 미안하다고, 진심으로 잘못했으니 용서해 달라는 그 말 한마디를 듣기 위해 아직도 수요일만 되면 주일 대사관 앞에서 남은 여생을 다 바치며 시위를 하고 있다. 사실, 여성들의 가슴 아픈 이야기보다 더욱 울화통이 터지는 것은 어리석고 아둔한 조선시대의 남성들 때문이다. 그 당시의 세계관에서는 이런 모습이 당연한 것이었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이와 같은 사고방식을 가진 남성들이 우리 사회에 존재한다는 사실은 같은 남자로서 너무나도 부끄러운 일이다. 


 조선시대에도 능력 있는 여성들이 두각을 드러낸 사례가 종종 있다. 대표적으로 허난설헌을 들 수 있다. 허난설헌은 조선시대를 통틀어 손에 꼽힐 정도로 뛰어난 문장가였다. 하지만 과거에 번번이 낙방하여 술독에 빠져 사는 무능한 남편과 여성의 능력을 인정해 주지 않는 시대에 좌절한 나머지 본인이 쓴 작품의 대부분을 불에 태워버리고 만다. 자신의 작품을 불에 태워 보낼 때, 그녀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아마도 활활 타오르는 불꽃으로 남편과 세상에 대한 본인의 깊은 분노를 표출하지 않았을까 싶다. 허난설헌에게는 꽤 똘똘한 동생이 있었는데, 이 기특한 동생이 다행히도 누이의 글을 대부분 외우고 있었다고 한다. 누이가 죽고 나서 그는 누이의 글들을 필사해 가지고 있었는데, 우연히 만난 중국 사신이 허난설헌의 글을 보고 단숨에 그 글에 매료된다. 결국 그 사신은 중국으로 돌아가 허난설헌의 글을 책으로 출판했다고 한다. 이 똘똘한 동생은 조선에서 최초의 한글소설인 "홍길동전"을 쓴 허균이다. 서양에서도 이와 비슷한 사례가 있었다. 허난설헌보다 1년 늦게 태어난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자기가 관찰한 사실을 근거로 지동설을 주장했다가 이단으로 몰려서 평생 동안 가택연금을 당하게 된다. 작은 집 안에 갇혀 있으면서도 광활한 우주를 관찰한 그는 가택연금 중에도 자신의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새로운 두 과학"이라는 책을 쓰지만 이탈리아 사회가 받아들일 수 없는 사상이기 때문에 이탈리아에서 출판할 수 없었다. 대신 사상의 자유가 보장된 네덜란드에서 출판하게 된다. 당시의 이탈리아는 르네상스가 부흥하는 시기였음에도 불구하고 종교라는 거대한 벽을 넘지 못하던 상황이었음을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조선도 신분제와 성차별이라는 벽에 갇혀있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허난설헌같이 재능 있는 인물들이 자신의 능력을 펼칠 수 있는 기회가 없었다. 다양한 생각들에 대한 포용성 없는 사회가 이 두 사람에겐 그 무엇보다 잔인한 폭력으로 다가온 것으로 볼 수 있다. 허난설헌 이후에도 세계 최초로 태교에 관련된 책을 남긴 이사주당 선생과, 한식의 조리법을 자세히 저술한 "음식 디미방"을 남긴 장계향 선생 등 조선이라는 시대적 배경과 여성이라는 제약 내에서도 훌륭한 업적을 남기신 분들도 계신다. 한편으로는 남자들보다 훨씬 더 뛰어난 능력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여성의 영역인 육아와 음식에 대한 저서만을 남긴 것은 안타깝기도 하다. 남성의 영역이라고만 느껴지던 분야에 여성이 발을 들인 것은 아마도 최영숙 씨가 최초가 아닐까 싶다. 최영숙 씨는 1905년 부유한 상인의 딸로 태어나 중국과 스웨덴에서 공부하며 덴마크, 러시아, 인도, 베트남, 독일, 이탈리아 등 세계 여러 나라들을 여행한 한국 최초의 여성 경제학사이다. 그녀가 스웨덴에 머무를 당시, 스웨덴 황태자였던 구스타프 아돌프는 세계적인 고고학자이기도 했는데, 중국어와 일본어, 영어, 독일어에 능통했던 최영숙 씨를 고용해 동양의 책이나 자료들을 스웨덴어로 번역하는 일을 맡기기도 했다. 5개 국어에 능통한 여성이라니. 21세기의 웬만한 사람들보다도 훨씬 더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었던 그녀였지만 불행하게도 그녀가 한국으로 귀국한 시기에 세계 대공황이 터지게 되었다. 당시 지식인 여성이 일할 수 있는 일자리 자체가 많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세계 대공황까지 겹치게 되어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그녀는 결국 콩나물 장사를 하다가 건강을 해쳐 27살의 나이로 숨을 다했다고 한다.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시대를 잘못 타고난 그녀의 처지가 안타깝다. 이는 단순히 최영숙 씨에게만 국한된 문제는 아닐 것이다. 남자들보다 뛰어난 능력을 가진 여성들은 지금도 넘쳐난다. 과거에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우리는 성차별이라는 고루한 사고방식에 갇혀 인구의 절반을 잃었던 셈이다. 




 조선시대는 기록의 시대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다양한 기록들이 남아있다. 대표적으로는 조선왕조실록을 들 수 있는데 조선왕조실록은 매일 100쪽씩 부지런히 읽어도 4년이 넘게 걸리는 엄청난 양이다. 실록은 두 명의 사관들이 왕을 따라다니면서 왕의 일거수일투족을 속기한 "사초"를 정리하여 만들어진다. 두 명 중 한 명은 왕과 신하가 나눈 대화 내용을 적고 나머지 한 명은 왕의 표정과 몸짓을 기록했다고 한다. 일종의 조선판 브이로그인 셈이다. 당시에는 녹음을 하거나 촬영을 할 수 없으니 이 모든 것을 글로 대체했고, 그렇다 보니 당연히 분량이 어마어마할 수밖에 없었다. 조선왕조실록을 편찬하는 데에 참고한 또 다른 자료가 있었는데 그것은 '승정원일기'이다. 승정원일기는 일종의 업무일지인데,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4부를 인쇄하여 보관했던 조선왕조실록과는 달리 승정원일기는 한 부만 보관하고 있었다. 그러다 임진왜란과 이괄의 난으로 인해 조선 초기의 자료들이 안타깝게도 불에 타버렸다고 한다. 현재 남아있는 승정원일기는 인조 1년인 1623년부터 순종 4년까지인 1910년까지 288년의 기록이 남아있는데 이 양만 해도 조선왕조실록의 5배라고 한다. 매일 100쪽씩 읽어도 20년이 걸리는 양이다 보니 아직까지도 학자들이 연구 중인데 현재까지 번역된 분량이 약 20-30% 정도라고 한다. 


 실록을 기록하는 사관들은 엄청난 사명감을 가지고 기록을 남겼는데, 최대한 정확한 기록을 남기기 위해 사관의 의견인 '사론'을 남길 때에도 개인의 의견이 아닌 사관들 모두의 공통된 의견만을 남겼다. 사관들의 기록은 진실되고 그 누구에도 직언을 한다는 의미로 '직필'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토록 정확하게, 심지어는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역사까지도 기록으로 남긴 이유가 무엇일까? 그들은 후대 사람들에게 어떤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일까? 더 나아가 역사를 기록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다양한 이유들이 있겠지만, 신하들의 입장에서 생각하자면 왕권을 견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했을 것이다. 왕이 하는 행동과 그가 내리는 결정들을 모두 기록으로 남겨서 자손들에게 대대손손 물려준다면 그릇된 행동과 결정을 내리기 어렵기 때문이다. 실록 자체가 왕에게는 일종의 감시 도구가 되는 것이다. 조선 최악의 군주로 꼽히는 연산군조차도 본인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역사뿐이라는 말을 했을 정도이니 말이다. 왕의 입장에서 보자면, 신하들이 자신을 견제하기 위해 실록을 쓰겠다는 사실을 모를 리가 없었을 텐데 왜 굳이 실록 편찬을 허락했을까? 이 부분도 다양한 이유가 존재하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자기가 세운 왕조의 정통성과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실록을 편찬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한다. 나라의 흥망성쇠는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이지만 그런 격동의 시대에 새로운 나라를 건국하고 새로운 세상을 열기 위해 나선 호걸들에게 자신이 이 나라를 세워야만 하는 정당성이 꼭 필요했을 것이다. 또 그러한 정당성을 기반으로 신하들과 백성들을 설득하고 국가의 세력을 키우는 데에 군주의 카리스마는 가장 중요한 필수사항일 것이다. 특히 조선은 이성계가 역모를 통해 이룩한 왕조이니만큼 고려왕조를 폐하고 새로운 나라를 세워야만 하는 절대적인 명분이 필요했을 것이다. 하지만 제아무리 훌륭하고 원대한 계획도, 카리스마 넘치는 군주도 세월이 지나면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히게 마련이다. 그러니 건국의 정당성과 왕족의 정통성을 증명할 만한 문서를 기록하는 일은 당시 왕들에게는 불가피한 일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니 신하들이 툭하면 역사에 어떤 군주로 남을지를 생각하라는 협박에도 불구하고 실록 편찬을 철회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그들이 실록을 남겼기 때문에 후대에 사는 우리는 그들에게 상당히 큰 빚을 진 셈이다. 그들의 기록이 정말로 우리나라의 정통성을 방증하는 증거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 선조들의 실록을 비롯한 다양한 기록들로 인해 우리는 한반도에 살고 있는 우리 민족이 중국이나 일본과는 다른 독자적인 문화를 가진 민족이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게 되었다. 선조들이 그토록 수많은 기록들을 통해서 우리에게 하고자 했던 말은 "한반도에 살고 있는 우리는 자주 민족이다"라는 것이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최근 중국의 한 유튜버가 김치를 중국 고유의 음식이라며 유튜브에 동영상을 게재한 일이 있었다. 또 다른 유튜버는 쌈 싸 먹는 문화가 중국의 전통문화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한복이 명나라의 의복을 고려가 그대로 차용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무리도 있다. 중국은 우리나라의 간판 예능프로그램인 "무한도전"을 표절한 예능 프로그램을 선보였을 뿐만 아니라 "대장금"과 똑같은 스토리를 내세운 드라마를 촬영 중이기도 하다. 중국의 역사왜곡 중 끝판왕은 동북공정이다. 그들은 발해와 고구려 역사가 중국의 역사라는 주장을 꾸준히 하고 있다. 이쯤 되면 중국의 만물 기원설이 실존한다고 봐도 무방하다. 역사 왜곡이라면 일본도 만만치 않다. 독도의 영유권을 주장하는 한편, 일제 강점기의 역사를 왜곡하고 있으며 심지어는 일본이 한반도의 남쪽 지역을 200년 간 통치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이라는 억지 주장을 하기도 했다. 주변 열강들이 우리나라의 문화를 자기들 것이라며 역사를 왜곡하고 있지만 우리나라의 대응 수준은 미미한 정도이다. 중국과 일본의 역사왜곡은 우리나라의 정통성을 깎아내려 우리 고유의 문화와 역사를 그들의 역사와 문화에서 기인한 것으로 조작하려는 시도로 볼 수 있다. 최근에는 우리나라의 드라마와 영화, 아이돌 등 다양한 방면에서 한국의 문화가 전 세계로 유행하게 되자 이를 못마땅해하는 중국과 일본이 조직적으로 우리나라의 문화를 깎아내리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사실 그들의 입장에서는 우리나라가 좋게 보일 리가 없다. 중국은 대대로 우리나라를 신하로 생각하며 무시했지만 실제로는 한반도 문제에 개입했던 대부분의 중국 왕조가 망국의 길을 걸었다. 일본은 우리나라를 식민지화하기 위해 온갖 잔인무도한 폭력을 동원했지만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더군다나 우리나라가 전 세계 역사상 유래 없는 초고속 발전을 이뤄내어 어느새 일본에게 과거사에 대한 책임을 묻는 위협적인 존재가 되었으니 이 두 나라의 입장에서는 우리나라가 달가울 리가 없을 것이다.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일본과 중국의 외침으로 인해 끊임없이 고통을 받아왔다. 고구려 시대 이후로 중국과의 관계는 줄곧 군신관계였으며, 당파싸움에 날 새는 줄 모르다가 우리보다 미개하다고 여겼던 일본에게 전 국토가 도륙당하고 왕이 도망가는 초유의 사태를 겪기도 했다. 또한, 근대화에 성공한 일제가 우리나라를 식민지로 삼아 말로 다 못할 참혹한 폭력과 만행을 저지른 것도 불과 100여 년 전이다. 2020년 세계 GDP 순위를 보면 중국은 세계 2위, 일본이 세계 3위로 추정된다. 한국은 12위로 예상되는데 GDP 규모를 보면 일본이 우리보다 5배, 중국이 10배나 더 크다. 더군다나 중국의 인구는 13억으로 전 세계 가장 많은 머릿수를 자랑하는 나라이다. 한복이 중국 전통 의복에서 유래했다는 영상에는 40만 개 이상의 좋아요가 달렸고, 구독자 수가 1,400만 명에 달하는 유튜버는 김치가 중국 전통 음식이라고 주장하는 영상을 유튜브에 게재했다. 해당 영상은 조회수가 600만 건이 넘는다. 중국 내에서도 김치와 한복이 자기들 문화라고 주장하는 세력은 일부에 불과하다고는 하지만 만약 13억의 그들이 마음먹고 일치단결하여 김치가 중국 문화라고 주장한다면, 5천만 대한민국이 할 수 있는 일이 얼마나 될까? 

 선조들은 우리들에게 끊임없이 말하고 있다. 강해져야 한다고. 우리가 스스로 강해지지 않으면 그들이 겪었던 수모와 고난을 우리도 고스란히 겪게 될 것이라고. 하지만 지금 이 시점에도 우리나라는 일치단결 하지 못하고 있다. 아직도 일각에서는 일제의 위안부가 강제동원이 아니라고 주장하거나 일제의 침략이 정당하다고 주장하는 한국인도 있다. 우리 스스로 우리나라의 역사를 왜곡하는 교과서를 펴내는 집단도 있다. 독립 유공자의 후손은 전 재산을 털어 나라의 독립을 위해 헌신했으나 국가로부터 어떤 감사의 표시도 받지 못한 채 살고 있지만 친일파의 후손들은 나라 팔아먹은 돈으로 아직도 호의호식하며 잘 살고 있다. 


 우리가 이렇게 우리끼리 싸우고 있는 동안에도 우리 옆에 두 마리 구렁이들이 우리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 참고 >

역사 e 1-5 권

작가의 이전글 커피, 산책 그리고 새벽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