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별인사 - 김영하
주인공인 철이는 휴먼매터스라는 연구소에서 아버지 최진수 박사와 함께 살고 있다. 최진수 박사는 인공지능을 가진 휴머노이드를 만드는 과학자인데, 휴먼매터스는 전 세계의 수많은 연구실 중에서도 가장 선진기술을 가진 인공지능 연구소이다. 이곳에서 철이는 아버지와 함께 더없이 여유롭고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최박사는 철이가 휴먼매터스 밖으로 나가는 것을 절대 허락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연구소 밖에서는 각종 이념과 신념이 격렬하게 충돌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철이는 바깥세상에 대한 호기심이 컸지만 아버지의 말씀을 거역할 순 없기에 연구소 안에 머물렀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가 산책을 나간 이후에 갑자기 소나기가 내리자 철이는 우산을 들고 연구소 밖으로 아버지의 마중을 나갔다. 아버지를 찾아 거리를 쏘다니고 있었는데 갑자기 낯선 사람들이 그에게 다가와 이리저리 뜯어보기 시작했다. 그들은 미등록 휴머노이드라는 둥, 위법이라는 둥 알 수 없는 말들을 늘어놓다가 철이를 기절시켰다. 철이가 정신을 차린 곳은 각종 휴머노이들이 모여있는 일종의 폐차장 같은 곳이었다. 이곳에서는 미등록 휴머노이드뿐만 아니라 구형 휴머노이드, 고장 나거나 인간으로부터 버림받은 휴머노이드들이 한가득 모여 있었다. 그들 중 일부는 자신이 인간이라고 주장했는데, 그런 이들은 전투용 휴머노이드들에 의해 무참히 분해되면서 본인이 인간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전투용 휴머노이드들은 자신을 버린 인간에 대한 깊은 증오의 감정을 가지고 있었고, 그만큼이나 인간이라고 믿고 있는 휴머노이드들도 혐오했다. 철이는 이곳에서 선이와 민이라는 아이들을 만나게 되는데, 민이는 한때 자신이 인간이라 믿었던 휴머노이드였고, 선이는 진짜 인간의 유전자를 가진 클론이었다. 이들과의 만남을 통해 철이는 자신이 인간이 아니라 휴머노이드였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 평생 동안 자신을 속여왔던 아버지에 대한 깊은 분노와 배신감을 느낀다. 그러던 중, 철이는 우연한 기회에 선이, 민이와 함께 창고를 탈출하여 달마라는 휴머노이드를 만나게 된다. 이때부터 그는 온갖 사건들을 겪게 되며, 이 과정에서 자신의 정체성, 인간이란 존재에 대한 사유, 삶의 유한성에 대한 숙고를 통해 성장하게 된다.
이름
이 책에서 흥미롭다고 느낀 점은 등장인물들의 이름이었다. 본문에 따르면 철이의 이름은 ‘철학’에서 따 왔다고 한다. 철학이란 학문은 인간과 인간을 둘러싼 이 세계의 본질에 대한 깊이 있는 질문을 통해 어딘가에 존재할지도 모르는 진리를 탐구하는 학문이다. 소설 속에서 철이는 인간이라는 존재와 삶의 유한성에 대해 상반된 태도를 가지고 있는 달마와 선이를 만나게 되고, 그들을 통해 자신의 생각과 태도를 조금씩 만들어간다. 그런 철이의 모습은 독자들로 하여금 자신의 삶과 자아에 대해 생각하도록 만든다. 결국, 철이라는 인물은 철학을 통해 인간으로 발전해 가는 휴머노이드인 것이다. 또 한편으로는 철이라는 인물의 성장과정이 마치 ‘철학’이란 학문의 발전과정을 보여주는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철이의 이름보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철이가 키우는 세 마리의 고양이들 때문이다. 그들의 이름은 갈릴레오, 칸트 그리고 데카르트이다. 이 중에 갈릴레오와 칸트는 진짜 고양이지만 데카르트는 로봇이다. 이 세 마리의 고양이는 각각 인간의 호기심과 도덕성, 자신에 대한 통찰을 상징한다.
우선, 갈릴레오를 살펴보면, 갈릴레오는 끝없는 호기심을 통해 우주의 신비를 탐구하면서 근대 과학의 문을 열었다. 이 작품에서 최박사는 만약 인류가 멸망하고 기계가 이 문명을 지배하게 된다면 그들은 우주를 탐험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기계는 인간처럼 호기심을 느끼지 않고, 자신의 무지를 극복해야 할 이유도 없기 때문에 우주탐사는 하지 않을 것이라고 추측한 것이다. 실제로 인류가 멸망하고 난 이후, 기계들은 자신들만의 문명을 구축했고 우주탐사를 시작했지만 최박사의 예상대로 호기심을 해결하기 위한 탐사는 아니었다. 그들은 순전히 그들의 생존을 위해서 새로운 에너지원을 찾기 위해서 우주를 탐사했다. 반면, 철이는 휴먼매터스 바깥의 세계를 끊임없이 궁금해했다. 비록 아버지의 강압을 이기지 못해 연구소에서만 머물러 있었지만 철이의 호기심은 항상 연구소 밖을 향해 있었다. 미지의 영역에 대해 호기심을 느낀다는 것은 생명체와 기계를 구분 짓는 기준이 되는데, 그런 면에서 갈릴레오라는 고양이는 철이의 호기심과 인간성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칸트도 마찬가지이다. 칸트는 매일 같은 시간에 자신이 사는 마을을 여덟 번 왕복하는 산책을 했다고 한다. 칸트는 매일 정확한 시간에 일상을 반복하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고 마치 기계처럼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일과를 소화했다. 그와 같은 동네에 사는 주민들은 산책하는 칸트를 보며 시간을 맞췄을 정도였다. 작품 속의 고양이 칸트도 매일 같은 시간에 먹고 자고 싼다고 해서 칸트라는 이름이 붙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닌 것 같다. 칸트는 이성적인 존재, 즉 인간만이 도덕의 대상이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 작품을 읽다 보면 고도로 발달한 휴머노이드는 과연 인간과 똑같이 도덕의 대상이 될 수 있을까에 대한 의문이 떠오르게 된다. 칸트라는 고양이의 이름이 앞으로 나올 주제에 대한 일종의 복선인 것이다.
마지막은 데카르트인데, 데카르트는 육체보다 정신의 존재를 더욱 확신했다. 그는 육체가 없는 상황은 상상할 수 있으나 정신이 없는 상황은 상상할 수 없다며 정신이 곧 존재의 본질이라고 주장했다. 그가 남긴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유명한 명언이 그의 생각을 잘 보여준다. 작품 속에서 철이의 육체는 파괴되었으나 그의 의식은 육체를 벗어나 네트워크에 업로드된다. 육체가 없는 의식은 어디에서도 존재할 수 있고 무엇이든 할 수 있다. 전 세계를 묶고 있는 인터넷 그 자체가 된 것이다. 그러다가 철이는 잠시 로봇 고양이인 데카르트의 의식에 들어가게 된다. 고양이의 육체에 철이라는 휴머노이드의 정신이 깃든 것이다. 육체가 인간의 것이든, 고양이의 것이든 철이는 자신의 정신을 그대로 유지되고 있었다. 존재라는 것 자체가 물리적인 실체에 국한되지 않기 때문에 그는 어디에도 존재할 수 있다. 자신의 생각, 즉 의식 자체가 존재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철이의 의식이 깃든 고양이의 이름이 의식이 곧 존재의 본질이라고 주장한 데카르트였던 것은 탁월한 선택이라고 할 수 있다.
문제는 달마인데, 이 작품을 읽는 내내 도대체 왜 작가는 달마라는 이름을 사용했을지 궁금했다. 사실 내가 달마에 관해 아는 것은 인도에서 온 승려라는 것과 엄청나게 못생겼다는 것이 전부였다.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 달마라는 승려에 관해 이리저리 알아보았고 다양한 사실들을 알아냈지만 아직까지 이렇다 할 답을 구하지는 못했다. 사실, 이 책을 다 읽은 지 두 달이 넘었지만 아직도 이 글을 완성하지 못한 이유가 달마 때문이었다. 아직도 여전히 마음에 드는 결론을 얻어내지 못했지만 고양이들의 이름처럼 달마라는 이름도 이 작품 속의 무언가를 상징하고 있다고 믿는다. 이 부분은 앞으로도 꾸준히 고민해봐야 할 것 같다.
도덕의 범위
김초엽의 “지구 끝의 온실”이라는 소설에 보면 자신의 육체를 조금씩 기계로 대체하는 인물이 나온다. 소설이 진행될수록 그의 신체는 조금씩 기계로 변해가게 된다. 그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그는 언제까지 인간일까? 사람들은 어느 정도까지 기계화되면 그를 인간이 아니라고 인식할까? ‘작별인사’를 보며 정확히 똑같은 질문을 했다. 철이와 민이는 겉으로 보기엔 완벽한 인간이다. 그들은 다치면 피가 나고, 밤이 되면 졸리기도 하며 허기를 느낀다. 희로애락의 모든 감정을 느끼고 위험을 느끼면 자신을 보호하는 생존본능까지도 가지고 있다. 그런 그들이 인간과 다른 것은 무엇일까? 인간들은 그들을 존중받아야 할 생명체로 인정하고 그들에게도 도덕이라는 잣대를 적용할 수 있을까?
작품 속 세계에서 인간들은 휴머노이드들에게 도덕을 적용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들의 필요에 의해 휴머노이드를 만들고 쓰임이 다하면 그저 폐기처분 해 버린다. 그들이 설령 다치면 피가 나고 인간과 똑같이 감정을 느끼는 존재라고 해도 그들이 기계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마치 대항해시대에 백인들이 흑인 노예들을 대하던 것과 같은 모습이다. 당시의 노예들은 가축과 다름없었다. 어쩌면 가축보다도 못한 상황이었을지도 모른다. 이러한 일이 생긴 원인은 당시 사회가 흑인노예들을 자신들과 똑같은 인간으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위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대 철학자 칸트는 오직 이성을 가진 인간만이 도덕의 대상이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다만, 그는 인간이 동물에 대해 간접적 의무를 가진다고 덧붙였다. 동물을 학대하는 사람은 사람도 학대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인간들은 동물을 학대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대상이 로봇이라면 어떨까? 얼마 전, SNS에 올라온 하나의 영상이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영상 속 주인공은 자신의 반려견을 산책시키고 있었는데, 지나가던 여성이 주인공의 반려견을 발로 찼다. 반려견은 로봇이었다. 이 영상을 접한 사람들은 여성의 행동이 부적절하다고 비난했는데, 흥미로운 점은 여성을 비난한 사람들이 로봇 강아지를 진짜 강아지처럼 생각한다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로봇 강아지를 발로 찬 여성의 행동이 도덕적으로 잘못된 행동이라고 비난한 것이다. 로봇 강아지에게도 이런 반응을 보이는데, 만약 그 대상이 인간과 똑같이 생긴 휴머노이드라면 어떻게 될까? 앞으로 지금보다 과학기술이 훨씬 더 발전하여 인간과 거의 동일한 모습의 휴머노이드가 만들어진다면, 그 휴머노이드에 기계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매끄럽게 작동하는 인공지능이 탑재된다면, 인간들은 그 휴머노이드 로봇을 도덕의 대상으로 인정할 수 있을까? 만약 누군가가 그런 휴머노이드와 결혼을 하겠다고 한다거나, 그 로봇에게 막대한 유산을 상속하겠다고 한다거나, 자신에게 치명적인 위해를 가했으니 처벌해달라고 한다면 우리 사회는 어떤 판단을 내릴 것인가? 이런 종류의 질문은 인공지능과 함께 할 미래를 준비하기 위해 필수적이다. 인공지능과 로봇공학이 아직 충분히 발전되지는 않았지만 과학의 발전속도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빠르기 때문이다. 이 작품 속에서 등장하는 휴머노이드와 같은 존재들이 불과 수 십 년 내에 등장할지도 모른다. 그때 우리는 로봇이라는 대상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할지 결정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사회가 로봇에 대해 충분히 생각하고 신중하게 토론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이 작품이 좋은 계기가 될 수도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