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유의 비밀 도시락, 올리고당
솔직히 고백하자면, 제가 이렇게까지 모유의 성분을 파헤치고 관련 서적을 뒤적이게 된 건 대단한 학구열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건 절박함 때문이었습니다.
매일 밤잠을 설치고, 가슴이 찢어질 것 같고, 거북목으로 등이 빠질 것 같은 고통을 느끼며, 저는 제 자신에게 이 힘든 행위를 계속해야만 하는 '납득할 만한 근거'를 스스로 제시해야만 했습니다.
단순히 "엄마니까"라는 당위성만으로는 버티기 힘들 만큼 체력적으로 한계에 부딪혔으니까요.
내가 지금 내 뼈와 살을 깎아 먹이는 이 하얀 액체가 도대체 무엇이기에 이토록 힘들어야 하는지.
그렇게 논문과 책을 뒤지다 발견한, 저를 납득시킨 아주 기이한 사실 하나가 있었습니다.
바로 모유 성분 중 유당, 지방 다음으로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모유 올리고당(HMO, Human Milk Oligosaccharides)'의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충격적이게도, 아기는 이 올리고당을 소화할 수 없습니다.
아기의 소화 효소로는 분해되지 않아 위와 소장을 거쳐 대장까지 그대로 내려가 배설됩니다.
엄마는 자신의 에너지를 써가며 힘들게 만들어내는데, 왜 아기가 흡수도 못 하는 성분을 만드는 걸까?
알고 보니 그것은 실수가 아니라, 치밀하게 계산된 산물이었던 거죠.
엄마가 보낸 비밀 도시락
모유 올리고당은 아기의 밥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아기의 대장에 살고 있는 '유익균(특히 비피도박테리움 인판티스)'의 도시락이었습니다.
갓 태어난 아기의 장은 무균 상태에 가깝습니다.
이때 엄마의 모유는 유익균이 굶어 죽지 않고 장에 잘 정착해 나쁜 균들과 싸울 수 있도록 전용 식량을 공급하는 것입니다.
이 유익균들이 모유 올리고당을 먹고 쑥쑥 자라야, 아기의 면역 시스템이 완성됩니다.
"분유에도 올리고당이 있다고 들었는데?" 맞습니다.
분유 캔에도 '올리고당 첨가'라고 적혀있죠.
하지만 성분과 효능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분유에 주로 쓰이는 갈락토올리고당(GOS)이나 프락토올리고당(FOS)은 식물 등에서 추출한 것으로, 유익균의 먹이가 되어 배변을 돕는 역할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반면, 엄마 몸이 만드는 200여 종의 모유 올리고당(HMO)은 차원이 다릅니다.
이들은 단순한 먹이를 넘어, 나쁜 세균이나 바이러스가 장 점막 대신 자신에게 달라붙게 유인하는 '미끼' 역할을 합니다.
세균을 속여서 끌어안고 함께 배설되어 버리는 것이죠.
즉, 아기의 장을 지키는 정교한 '천연 방패'인 셈입니다.
그런데 모유가 지켜낸 이 튼튼한 장 환경은 단순히 배앓이를 막는 데서 그치지 않고, 놀랍게도 아이의 머리 위까지 영향을 미칩니다.
최근 과학계가 밝혀낸 '장-뇌 축(Gut-Brain Axis)' 이론에 따르면 장과 뇌는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장과 뇌는 '미주신경(Vagus Nerve)'이라는 고속도로로 직접 연결되어 있어 서로 실시간으로 신호를 주고받습니다. 우리가 긴장하면 배가 아픈 것도 이 때문이죠.
놀라운 건 행복을 느끼게 하는 호르몬인 '세로토닌'의 95%가 뇌가 아니라 장에서 만들어진다는 점입니다.
즉, 모유를 먹고 장내 유익균이 건강하게 자리 잡은 아기는 단순히 배탈이 안 나는 수준을 넘어, 정서적으로 더 안정되고, 스트레스를 덜 받으며, 뇌 발달이 활발해진다는 뜻입니다.
자폐 스펙트럼(ASD)과 장내 미생물의 연결고리
최근 급증하고 있는 자폐 스펙트럼 장애(ASD)와 장 건강의 상관관계에 대한 연구를 살펴보겠습니다.
아직 자폐의 정확한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지만, 최근 다수의 연구는 자폐 아동의 장내 미생물 생태계가 일반 아동과 현저히 다르다는 점에 주목합니다.
자폐 아동에게서 특정 유익균이 부족하거나 유해균이 과다한 '디스바이오시스(Dysbiosis, 장내 세균 불균형)' 현상이 관찰되기 때문입니다.
2025년 발표된 최신 연구들에 따르면, 자폐 스펙트럼 장애(ASD) 아동의 장내 미생물은 뇌로 보내는 신경 활성 대사물질(Neuroactive metabolites)을 충분히 만들어내지 못하는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이는 장내 미생물의 불균형이 뇌의 신경 신호 전달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시사합니다. 특히 모유 올리고당(HMO)은 이러한 미생물 생태계를 조절하여 뇌 발달을 돕는 핵심적인 역할을 합니다.
(Nutrients 2025, Frontiers in Neuroscience 2025)
물론 "모유를 안 먹여서 자폐가 생겼다"거나 "모유만 먹이면 자폐가 예방된다"는 식의 극단적인 해석은 위험하며, 절대 그렇게 해석돼서도 안 됩니다.
위에서도 말했지만, 아직 자폐의 정확한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고, 유전적, 환경적 요인이 복합적으로 영향을 준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또한, 우리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역인과관계'의 가능성도 있습니다.
일부 자폐 성향을 가진 아기들은 태어날 때부터 구강 감각이 지나치게 예민하거나 감각 통합의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아기들은 엄마의 젖꼭지가 닿는 느낌을 불편해하거나, 젖을 빠는 복잡한 근육 운동을 힘들어하여 모유 수유에 실패할 확률이 높습니다.
즉, 모유를 먹이지 않아서 문제가 생긴 것이 아니라, 아기의 타고난 기질적 특성 때문에 모유 수유가 어려웠던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러니 부득이하게 수유를 못 했다고 해서 "내가 젖을 안 먹여서 그런가"라며 섣불리 자책할 필요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누구의 탓인가'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이 연구들이 시사하는 '본질'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바로 장 건강이 그만큼 아이의 뇌와 마음에 깊게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 말입니다.
나는 아이의 뇌를 안아주고 있었다
완모를 하는 동안 가장 힘들었던 건, 결과가 바로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아이가 지금 얼마나 먹었는지, 소화는 잘 되는지, 정말 내 가슴에서 나오는 액체로 아이가 잘 자라는지.
영유아 검진을 가면 몸무게가 느는 건 보이지만, 아이의 미래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바로 보이지는 않으니까요.
하지만 이제는 알 것 같습니다.
새벽 3시, 졸린 눈을 비비며 물렸던 그 젖이 아이의 뱃속 유익균을 살찌우고, 그 유익균들이 만들어낸 행복 호르몬이 미주신경을 타고 올라가 아이의 뇌를 반짝이게 하고 있었다는 것을요.
장이 편안해야 뇌가 웃습니다.
저는 젖을 물리며, 아이라는 집에 가장 튼튼한 기둥을, 그중에서도 '마음의 기둥'을 세우고 있었던 것입니다.
혹시 지금 모유 수유로 지쳐있는 엄마가 있다면, 이 사실을 꼭 기억해 주세요.
당신은 지금 아이에게 밥만 주고 있는 게 아닙니다.
당신은 지금 아이의 '행복한 뇌'를 안아주고 있는 중입니다.
1. 모유 올리고당(HMO)의 역할에 대한 연구
Lars Bode (2012). "Human milk oligosaccharides: every baby needs a sugar mama." Glycobiology, 22(9), 1147-1162. (HMO가 단순한 영양소가 아니라 프리바이오틱스, 병원균 방어(미끼), 면역 조절 등 다기능을 수행함을 체계적으로 정리함)
Zivkovic, A. M. et al. (2011). "Human milk glycobiome and its impact on the infant gastrointestinal microbiota." Proceedings of the National Academy of Sciences (PNAS). (모유 올리고당이 아기의 장내 유익균, 특히 비피도박테리움의 성장을 어떻게 선택적으로 촉진하는지 밝혀낸 핵심 연구)
2. 장-뇌 축(Gut-Brain Axis)과 행동 발달의 연결고리
Hsiao, E. Y. et al. (2013). "Microbiota modulate behavioral and physiological abnormalities associated with neurodevelopmental disorders." Cell, 155(7), 1451-1463. (장내 미생물 조절이 자폐 스펙트럼과 유사한 행동을 완화할 수 있음을 동물 실험으로 증명함)
Cryan, J. F. & Dinan, T. G. (2012). "Mind-altering microorganisms: the impact of the gut microbiota on brain and behaviour." Nature Reviews Neuroscience, 13(10), 701-712. (장내 미생물이 뇌와 행동에 미치는 영향을 '장-뇌 축'이라는 개념으로 정립함)
[최신 연구 동향]
M. Sprenger et al. (2025). "Human Milk Oligosaccharides in Breast Milk at Two Weeks of Age in Relation to Neurodevelopment in 2-Year-Old Children." Nutrients, 17(5), 832.
UCLA Health Research (2025). "Kids with autism show altered gut microbiome-brain interactions."
X. Li et al. (2025). "The Gut–Brain–Microbiota Connection and Its Role in Autism Spectrum Disorders." Nutrients, 17(7), 11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