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은 없지만 자유도 없다
앞의 에피소드들이 모유수유의 장점을 나열했다면,
이젠 정말 날 것의 이야기를 해봅시다.
출산 전, 모유 수유를 권장하는 유튜브 영상에서 이런 말을 봤습니다.
"모유 수유를 하면 진짜 편해요!!
젖병을 씻을 필요도, 분유 물 온도를 맞출 필요도,
무거운 짐을 챙길 필요도 없으니까요."
그때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래, 외출할 때 기저귀 가방이 가벼운 게 최고지. 나는 스마트한 완모맘이 될 거야.'
하지만 막상 아이를 낳고 보니, 그 문장에는 치명적인 각주가 빠져 있었습니다.
(※ 단, 엄마가 짐이 됩니다. 엄마는 아이 곁에서 3시간 이상 떨어질 수 없는 ‘젖병'이 되어야 합니다.)
젖을 생산하기 위한 '금기'의 식탁
첫날 아이를 품에 안아 젖을 먹이기 시작한 순간부터 먹는 것에 대한 걱정이 늘어났습니다.
모유는 엄마의 혈액으로 만들어지기에, 제가 먹는 것이 곧 아이가 먹는 것이 됩니다.
"매운 거 먹으면 아기 똥꼬 빨개진다."
"카페인 마시면 아기 잠 안 잔다."
이 무시무시한 경고들 앞에서 처음엔 임신했을 때처럼 먹는 것을 많이 주의했습니다.
하루는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너무 마시고 싶어 미칠 것 같았습니다.
디카페인 커피로는 채워지지 않는 그 무언가.
너무 먹고 싶은 날엔 아메리카노 한 잔 사서 죄책감 반, 설렘 반으로 마셨는데, 그날따라 아이가 낮잠을 안 자고 칭얼거리는 거리면 그날 먹은 커피 한잔이 야속해졌습니다.
'아, 내가 마신 커피 때문인가?'
사실 아이는 그냥 잠투정을 한 것일 수도 있는데, 모든 원인을 '내가 먹은 음식'에서 찾으며 자책했죠.
신데렐라보다 엄격한 '3시간의 통금'
완모맘에게 자유시간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신생아 때는 2시간, 조금 크면 3시간. 이것이 저에게 주어진 자유의 최대치였습니다.
헬스장을 가고 싶어도, 미용실에 가서 파마를 하려 해도, 머릿속에서는 항상 '수유 타이머'가 돌아갑니다.
'지금 먹이고 나가면 2시니까, 5시 전에는 무조건 돌아와야 해.'
만약 5시를 넘기면 어떻게 될까요? 두 가지 재앙이 발생합니다.
첫째, 집에서 굶주린 아이가 자지러지게 웁니다.
둘째, 제 가슴이 돌덩이처럼 딱딱해지며 젖이 차올라 옷이 젖을 위기에 처합니다.
누군가는 "유축해 놓고 나가면 되잖아?"라고 묻지만, 젖병 거부가 온 완모 아기에게는 통하지 않는 이야기입니다.
결국 저는 외출을 해도 영혼은 집에 두고 온 사람처럼 시계만 쳐다보다가, 헐레벌떡 귀가해야 하는 '3시간짜리 신데렐라'였습니다.
새벽 4시, 기계음 속의 현타
자지러지게 울던 아이가 잠든 고요한 새벽 3시.
거실 소파에 앉아 가슴에 깔때기를 대고 유축기 전원을 켭니다.
위잉- 칙. 위잉- 칙.
규칙적인 기계 소리에 맞춰 투명한 플라스틱 통에 뽀얀 액체가 뚝, 뚝 떨어집니다.
멍하니 그 장면을 보고 있으면 기분이 묘해집니다.
'나는 지금 엄마인가, 아니면 목장의 젖소인가.'
졸린 눈을 비비며 유축기에 몸을 맡기고 있자면,
'나'라는 사람의 존재는 사라지고 오직 '기능'만 남은 것 같은 서글픔이 밀려왔습니다.
저뿐만 아니라 많은 엄마들이 유축기를 사용하면서 우울감이 많이 온다고 합니다.
사용하기 전에는 몰랐는데 직접 그 입장이 되어서야 무슨 감정인지 알겠더군요.
이건 엄마의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 호르몬의 변화 때문에 자연스럽게 들 수 있는 감정입니다.
모유가 나올 때 도파민 수치가 일시적으로 떨어지게 되는데, 이것을 불쾌한 젖 사출 반사(D-Dysphoric Milk Ejection Reflex) 현상이라고 합니다.
젖이 돌기 전과 후에 짧게는 30초, 길게는 수 분정도 지속되는데, 이때 우울감은 물론 불안과 허무함, 혐오감까지 들 수 있다고 합니다.
직수(직접 수유)를 할 때는 아기와 직접 살을 맞대고 교감을 하면서 옥시토신이 분비되어 이 힘든 과정이 상쇄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유축기를 사용할 땐 내가 마치 젖소가 된 것 같은 자괴감까지 들게 되는 것이죠.
그럼에도, 너를 살찌우는 기쁨
그렇게 우울했던 새벽을 보내고, 다시 아이에게 젖을 물립니다.
배고파서 앙앙 울던 아이가 젖을 무는 순간, 거짓말처럼 평온해지며 '꿀꺽꿀꺽' 소리를 냅니다.
그 힘차고 리듬감 있는 목 넘김 소리.
어느새 힘겹게 젖을 다 먹고는, 입가에 하얀 우유를 묻힌 채 만족스럽게 '씨익' 웃는 그 얼굴.
그리고 포동포동하게 살이 오른 허벅지와 볼살을 볼 때.
'그래, 저 살과 뼈, 내가 만든 거야.'
내가 못 먹은 시원한 맥주와 아메리카노, 내가 포기한 자유시간과 잠이, 저 아이의 통통한 볼살로 치환되었다니.
언젠가 이 시절을 그리워할 날이 오겠죠?
곧 돌을 한 달 앞둔 지금은 하루 한 잔 아메리카노를 즐기며, 먹고 싶은 건 다 먹고 있습니다!!
오후 8시부터 아침 6시까지 통잠자는 아이가 기특하고, 하루에 4번 정도의 수유면 충분한 개월수가 되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