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발짐승과 살아간다는 것: 상대성 이론

상대적인 시간 속의 너와 나

by 사이에

* 해당 글은 2021년 8월에 작성한 글을 다듬어 발행했습니다.



우리 집에는 총 다섯 생명체가 산다.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 한 명, 고양이 세 마리, 그리고 강아지 한 마리.


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둘째(비단)가 옆 테이블에 누워 능청스럽게 그루밍을 하고 있다.

서류상으로는 1인 가구지만 실상을 들여다보면 이렇게 복작복작할 수가 없다.


'네발짐승'.

반려동물이라는 현대적인 단어 대신, 우리 엄마는 꼭 저 단어를 쓴다.


"아이고, 털 날리는 네발짐승 그거 거둬봐야 뭐할 거고? 니 시집가거덩 시어매가 좋아하겠나..."


나는 안다. '네발짐승'을 거두는 일이 얼마나 소모적인지 엄마가 몰라서 하는 말이 아니라는 것을.

오히려 너무 잘 알고 있어서 하는 말이라는 것을.




우리 집에서 먹지 않는 유일한 음식은 보신탕, 즉 개고기였다.


어릴 적부터 엄마는 개고기 이야기만 나오면 기겁을 했고, 덕분에 나도 자연스럽게 멀리하게 되었다.


장날이면 엄마 손을 잡고 지하철을 타고 모란시장에 가곤 했다.

당시만 해도 좁은 철창에 개 대여섯 마리가 끼여 있고, 천장에는 도축된 개가 매달려 있는 가게들이 골목 한쪽에 늘어서 있었다.


어린아이의 눈에는 그 풍경이 기괴하고 공포스러웠다.

엄마는 내 손을 거칠게 이끌고 누구보다 빠르게 그 자리를 벗어났다.




어느 날 하굣길, 학교 앞 병아리 가판대를 눈이 빠지게 쳐다보다

결국 500원짜리 동전 하나로 노란 병아리를 손에 쥐었다.

작은 발걸음으로 총총 집에 갔는데, 평소 동물을 들이는 걸 반대하던 엄마가

내 손에 폭 안긴 병아리를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아니, 이 어린 걸 데리고 와서 우짤려고 그러냐... 일단 들어와 봐라."


엄마는 투덜거리면서도 능숙하게 빈 박스에 수건을 깔아 병아리 집을 뚝딱 만들어냈다.

엄마는 시골에서 자라 소도 키우고, 닭과 병아리는 물론 강아지도 키웠다고 했다.


나보다 동물 케어 경력이 훨씬 긴 베테랑이다.

그래서 더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들의 시간과 우리의 시간이 다르게 흐른다는 잔인한 물리 법칙을.






시간은 관찰자의 운동 상태에 따라 상대적이다.

물리적인 성질도 그렇겠지만, 인생을 살면서 느끼는 '삶의 속도' 또한 점점 빨라진다.


10대의 시간과 30대의 시간은 밀도가 다르다.

지금은 눈을 감았다 뜨면 금세 하루가 지나가고, 1년도 찰나처럼 스쳐 간다.



둘째와 셋째가 내 품으로 온 그날을 정확히 기억한다.


낯선 영역에 들어온 녀석들은 경계심을 잔뜩 안고 불손한 눈망울로 나를 노려보았다.

내 행동거지 하나하나를 관찰하며 혹시 자신을 해치지 않을까 비상태세를 갖췄다.

밥을 줘도 긴장하여 잘 먹지도 않더니, 내가 자리를 비키고 나서 다시 방을 들여다보면

어느새 밥그릇이 비워져 있어 기특했던 적도 많다.


한 손에 들어오던 아이들이 지금은 양손으로 번쩍 들어 올려야 하는 우람한 고양이가 돼버렸다.

나는 일명 '확대범'이 되었다.

(잘 읽어야 한다. 학대가 아니라 확대.)


사람 나이로 치면 30대에 들어선 아이들은 이젠 나와 동년배다.

깨발랄했던 '아깽이'는 자라서 자신의 의견을 당당하게 외치는 듬직한 성묘가 되었다.

5년 전의 나와 지금의 나는 크게 변한 것이 없는데,

몸을 가누지도 못했던 아이들은 이제 제 몫을 하는 멋진 고양이가 되었다.



10살이 된 첫째 강아지는 생기있는 베이지색 털만 있던 자리에 흰 털이 내려앉기 시작했다.

가만히 그 눈을 바라보면 세상의 이치를 깨달은 신선이 들어앉아 있는 게 아닐까 착각도 든다.


또 다른 5년, 10년이 지나는 동안 어떤 변화가 생길까.

관절은 빠르게 닳아가고 윤기 나던 털은 푸석해지며, 좋아하던 습식 캔도 먹지 않게 될까.






이제야 엄마의 잔소리가 이해되기 시작했다.

엄마도 엄마만의 반려동물이 있었을 것이고,

그 상대적인 시간의 속도차 속에서 감정의 소용돌이를 경험했을 것이다.


따뜻하고 콤콤한 향이 나는 젤리에 코를 파묻고 킁킁거리기.

세상에서 가장 부드러운 뱃살을 조물거리며 커피 마셔보기.

내가 어디 있든 이름을 부르면 달려오는 나의 강아지.

내 품에서 그르릉거리다가 잠들던 나의 고양이.



무한한 반려동물의 이점을 알고 있던 우리 엄마도,

결국은 시간의 상대성 이론에 빠져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감정의 사건 지평선'을 넘어버린 거겠지.

상실의 중력이 너무 커서, 다시는 빠져나올 수 없는 그곳을.


나는 그들의 생로병사를 지켜보다, 남은 내 시간을 살아갈 텐데.

그 시간 또한 어떤 속도로 흘러갈지 가끔 겁이 난다.


상대적으로 너무 빠른 네발짐승의 시간이, 오늘따라 유난히 야속하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