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십 대 초중반, 누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를 물으면 '백만엔걸 스즈코'라 답했다. 백만엔걸 스즈코는 아일랜드 더블린에 있을 때 봤다. 월세를 1000유로나 주고 겨우 얻은 단칸방 같은 원룸에서 룸메이트와 함께 보기 시작했다. 노트북 앞에 머리를 마주 대고 보는데 중간쯤에 룸메이트는 자리를 떴다. 영화 특유의 음울함이 싫다 했다.
나는 끝까지 봤다. 그때는 그렇게 기억에 남지 않았다. 심심하니까, 할 것이 없어서 본 영화에 불과했다. 그런데 자꾸 길을 걷다가, 카페에서 알바를 하다가 영화가 떠올랐다. 주인공이 버스에 앉아 녹음이 가득 찬 산길을 올라가는 장면, 복숭아를 한입 물어 베는 장면, 욕탕에서 머리를 묶고 반신욕 하는 장면들이 일상 속에 불쑥 들어왔다.
주인공인 아오이 유우의 매력도 한몫했다. 아오이 유우는 내 학창 시절의 아이콘으로 폴더폰의 배경화면과 싸이월드 대문사진의 주인공이었다. 내 폴더폰 속에는 내 사진보다 아오이 유우의 사진이 많았고 긴 머리는 잘하지도 않고 좋아하지도 않지만 한 번쯤 아오이 유우의 스타일을 따라 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영화는 스즈코가 범죄 기록이 생기면서 시작한다. 하우스메이트의 남자 친구가 스즈코가 길에서 데려온 고양이를 버려 버린다. 복수로 스즈코는 하우스메이트 남자 친구의 짐을 버리는 데 이걸로 범죄 기록이 생긴다. 이때 이후로 백만 엔, 약 천만 원만 모으면 다른 도시로 떠나는 노마드의 삶을 시작한다.
집을 떠나고 나서 스즈코는 비정규직 알바다. 처음 구한 직장은 바닷가의 아이스크림 가게고 두 번째는 산속 복숭아밭이다. 마지막으로는 도쿄 주변의 소도시에서 꽃집에서 일을 한다. 언제든 떠나도록 아르바이트만 한다. 정규직은 너무 무겁다.
백만엔걸 스즈코는 나의 청춘 판타지다. 여름은 푸르고 스즈코는 자유롭고 서툴지만 독립해서 산다. 자기 한 몸을 책임지고 산다. 스즈코는 절대로 쿨하지도 멋있지도 않다. 오히려 답답하고 찌질하다. 제대로 자기 할 말도 못 하고, 손해보고 갈등을 피하기만 하다가 문제를 더 키운다.
그래도 남을 미워하거나 탓하지 않는다. 자기 길을 묵묵히 간다. 이 점이 멋지고 배우고 싶다. 서툴고 하나도 멋없지만 자기가 원하는 삶을 밀어붙이는 무모함과 깡이 멋있다.
사이공에서 혼자 살 때 다시 영화를 봤는데 감회가 남달랐다. 이전에는 스즈코가 부러움의 대상이었는데 이제는 동료 같았다. 비슷한 삶을 살아가는 서툰 두 친구처럼 말이다.
영화 마지막 즈음에 스즈코가 밤새 울다가 동이 트는 장면이 있다. 새롭게 뜬 태양의 빛을 받으며 스즈코는 눈물을 멈춘다. 그 장면이 기억에 남는다. 지금 너무나 괴롭고 힘겹지만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뜬다는 느낌을 주었다.
마지막에 스즈코는 다시 혼자 떠난다. 가볍고 산뜻한 미소를 지으며 떠나는 모습이 선하다. 나도 가볍게 웃고 담백하게 느끼며 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