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9일 - 오늘의 삶그림
1392년 이성계가 왕위에 올랐다. 이씨조선의 출범에는 많은 불행을 안고 있었다.
교묘한 국제관계 속에서, 문장외교로 평화를 유지하기에 이끈 이가 이숭인이었다.
그는 명태조로부터 극히 칭찬을 받으며, 문장외교에서 성공을 거두었던 인물이다.
또한, 중국과의 외교문서를 도맡아야 했던 그였고 보니, 시대적 요청과 개인적 사명감이 그를 운율적 산문가로 만들었다. 10~14세기에 걸쳐 한국이 길러낸 대표적 문학 예술가로, 정지상·최해(崔瀣)·정포(鄭誧)·이숭인을 든다.
이씨조선은 이성계와 정도전으로 상징된다.
정도전이 이성계의 권세를 업고 무엇보다도 앞질러 한 일이, 이숭인을 죽여버린 일이었다.
이유인즉 정몽주 당이라는 것!
그는 자기 세상이 된 이씨조선에서 시시한 노래를 많이 지었고, 그것으로 인해 태조로부터 상도 많이 받았다.(<한국문학사>, 여증동, 형설출판사 1973)
이숭인이 없어진 이씨조선의 건국외교는 정도전이 주로 맡았다. 그러나 그의 문장은 명나라에 먹혀들지 않았다. 중국 명나라, 특히 한(漢) 민족에 대한 외교는 ‘문장외교’에 성패가 있었다.
충격적인 사건으로,
1395년 11월 조선왕에 대한 인정과 도장을 주십사고 하는 ‘글’을 가지고 갔는데, 그 글에서 문제가 생겼다.
글을 가지고 간 정총(鄭摠)을 명 황제가 잡아 가두었다.
이듬해 2월 신년 축하 사신으로 갔던 무관 김을진, 고인백 등이 명 황제의 글을 가지고 돌아왔다.
내용인즉, “너희들 글은 경박하고 거만했다. 그 글을 지은 이를 보내어 이곳에 이르게 하면, 정총 등을 돌려보내겠다”하며 정도전을 잡아 올리라고 한 것이다.
이에 따른 한국 측의 변명은
“말소리가 다르기 때문에 반드시 통역에 의존되어야 하고, 겨우 글의 뜻을 익히며 배운 바가 거칠고 얕아서 글 속에 있는 말들이 비루하고 또한 올리는 글의 짜임새를 다 알지를 못하여 말씨가 경박하게 되었을 뿐이지, 어찌 감히 고의로 그렇게 하여 트집의 실마리를 일으킨 것이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정도전은 병을 핑계로 끝내 가지 않았다.
1397년 3월에는
“중국말을 할 줄 아는 사람이 사신이 되어 올 일이요, 중국말을 할 줄 모르는 사람은 일후에는 오지 말라”라고 하는 황제의 명령이 있었다.
이 문장외교 사건은 오래 끌며 아주 많은 희생자를 냈다.
15세기 전반기는 태조로부터 세종시대에 해당한다.
즉위 때부터 세종에게 주어진 과제는 ‘우리들의 한자음을 버리고 중국원음에 맞추어야 한다’였다.
한국한자음을 버리고 중국원음대로 소리를 내어야만 하겠다는 강렬한 목적의식을 품은 이가 세종이었다는 말이다. 그러려면 우선, 중국한자음을 알리기 위한 《발음부호》가 필요했다.
이런 점에서 보자면, 정인지(鄭麟趾)가 서문에서 밝힌 ‘문자 없음을 불쌍히 생각한 바’가 동기라고 한 것은 상감마마를 위한 미화 작업이었던 것이다.
발음부호을 만들기로 착수한 세종의 동기가 <중국원음과는 다르게 소리 내고 있는 당시 한국 한자음(時俗 漢字音)을 바로 잡고자 하는 바에 있었다는>사실을 발견한다.(이종령 교수)
만들어 놓고 보니 나라의 문자가 될 가능성을 보였던 것이다.
동기와 결과 사이에 있어서 전혀 예상치도 않았던 사태를 가지고 오는 수가 있다.
현실적 필요에 의해 모색되었던 그 발음부호는
《훈민한자지정음(訓民漢字之正音: 훈민정음)이라 명명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