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소나 일기] - 02
상대가 모르게 상대를 훔쳐보는 데는 한계가 있다. 관심받기를 원치 않아 자신을 숨기는 대상을 관찰하는 일은 더더욱 그랬다. 그러다 보니 별다른 진전 없이 시간만 죽였다. 그는 내가 파악한 데서 벗어난 행동을 하는 법이 없었다. 카페 들어선 그는 언제나처럼 가장 저렴한 메뉴를 주문했고, 비어 있다면 언제나 같은 구석에 앉았다. 음식을 먹는데 걸리는 시간도 다르지 않았다. 물 흐르는 듯해서 잘 보지 않으면 움직이고 있는 것인지 아닌지 알 수 없을 정도였다. 지렁이가 꿈틀대듯 민달팽이가 기어가듯 자연스러웠다.
음식을 비우고 나면 트레이를 치우지 않고 옆으로 밀어뒀다. 음료수만 두면 곧 떠날 것으로 여겨져 자리가 없나 흘낏거리는 이가 있으니 영역 표시로 놔둔다. 나도 카페를 나설 때까지 트레이를 치우지 않았다. 아무튼, 그는 그런 후에 서류 가방에서 A5의 다이어리를 꺼냈다. 역시나 그의 복색과 차이가 없는 무채색 다이어리에는 타이틀이 없었다. 어떤 목적의 노트인지 모르게… 귀퉁이가 헤진 것으로 보아 한두 해 사용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늘 다이어리 위에 손을 잠시 얹고는 고개를 숙였다. 기도하는 이의 경건함이 배어난다고나 할까? 그런 후에야 몸을 최대로 구부정히 하고 끄적이기 시작했다. 꽤 집중해서 적어 내리는 모습으로 보였다. 그러나 말했듯, 잘 지켜보면 그가 웃음소리나 말소리, 테이블을 지나는 사람들에게 반응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도 나처럼 외부세계에서 벌어지는 것을 제 문장으로 엮고 있었다. 최대한 안전한 곳에서 삶을 조망하려는 나 같은 자의 행동이었다. 그는 어쩌다 나처럼 저런 행동을 하게 되었을까? 몹시 궁금했다.
호시탐탐 기회를 노렸다. 내 의문에 답을 구하고 싶어 좀이 쑤셨다. 그러나 내가 먼저 행동에 나설 수는 없었다. 부자연스럽게 먼저 다가갔다면 오히려 그와 나 사이에 벽을 만들었을 것이다. 자신이 나에게 관찰당하고 있음을 알아챘다면 경계부터 했을 것이다. 내가 그였어도 그랬을 테니.
성과 없이 그런 몇 날을 보냈더니 열의가 식어갔다. 별다른 것도 없는데 나의 환상을 덧씌우는 헛짓을 하고 있는 건가 싶기도 했다. 다른 대상을 찾는 게 낫겠다 싶었다. 카페를 옮겨봐야겠다. 다른 데서 시간을 보내다 보면 또 흥미가 가는 대상을 발견할지도 모르지. 특정 대상에 집착하는 건 좋지 않다. 자기 착각에 빠진 망상의 노예로 전락하기에 십상이다.
마침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갑자기 기회가 왔다. 화장실로 가던 손님 하나가 그의 테이블로 엎어졌다. 붉게 오른 얼굴로 보아 이미 낮부터 건하게 취해 있었다. 일행이 달려와 부추겼을 때는 이미 음료는 쏟아지고, 다이어리까지 적셨다. 나는 나도 모르는 새에 다가가 다이어리를 집어 들었다. 티슈로 닦아댔다.
“아, 괜찮습니다. 제가 하겠습니다.”
나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당황한 듯 자기가 하겠다고 나섰으나, 내가 놓지 않았다.
“이건 제가 할게요. 가방부터 챙기세요. 음료가 들어간 듯한데…”
“아, 그럼….”
마지못해 답하고는 직원과 정리를 시작했다.
그러는 동안, 나는 내 자리로 돌아와, 조금 전 그가 적은 문장을 흘낏댔다.
음료에 번진 다이어리의 문장이 내 눈에는 아로새겨졌다.
취객 대신 동료가 그에게 사과해댔다. 사과를 받는 와중에도 그의 시선은 나를 향한 걸 느꼈다. 정확히는 내 손에 들린 자신의 다이어리를. 그는 손사래를 치며 바쁘게 상황 정리를 하고는 곧장 나에게로 왔다.
“감사합니다, 이제 제가 하겠…”
그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직원이 트레이를 들고 왔다. 그가 늘 시키던 세트 메뉴였다.
“저쪽 손님이 죄송하다고 꼭 받아달라고 해서요.”
억지로 그에게 떠안겼다. 손사래의 의미가 그거였구나. 그러고는 직원은 내빼듯 곧장 테이블 정리를 시작했다.
“저기는 자리 정리를 해야 하나 본데, 괜찮다면 같이 앉을래요?”
대수롭지 않은 듯 자연스러웠겠지! 그러나 그런 나의 제안에도 그는 서성대며 좀처럼 궁둥이를 붙이지 않았다. 자연스러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아서, 그의 부담감을 덜 말을 보탰다.
“여러 번 본 것 같은데, 역시 작가셨구나?”
마주한 그의 눈빛이 깊었다. 부담스럽게 나에게 머물던 시선이, 펼쳐진 자신의 다이어리로 옮겨 갔다.
“자, 작가라니요, 무, 무슨요! 취미로 일기나 끄적이는 정도지요.”
무안함 때문이었을까? 고개를 숙이며 의자에 엉덩이를 걸쳤다.
“끄적이다니요!”
나는 음료가 베어 쭈글해진 다이어리를 내밀었다. 펴진 페이지 속 문장을 가리켰다.
“닦다가 조금 봤는데요… ‘자신이 무엇인지 알면서 사는 자는 누구인가? 모두 자기 인생의 손님으로 자기를 산다. 꿈에서 쫓겨난 진창의 삶, 모욕의 깃발이 나부끼는…’ 이 뒤에 뭐라고 적으실 거였어요?”
“언제 그걸 읽으…”
어찌할 줄 모르겠는지 그의 시선이 한참을 창밖에서 헤맸다.
“실은 저도 여러 번 봤습니다. 작가셨군요?”
그가 내 앞의 노트북을 가리켰다.
“저야말로 아직 끄적이는 수준인데요…”
잠시 침묵, 성마른 내가 침착을 위장하며 또 먼저 말을 건넸다.
“끄적이는 사람끼리 마주했으니 통성명이라도 할까요? 전 …라고 합니다.”
“뭐라고요?” 기어드는 목소리를 겨우 알아듣고는 “아, …씨!” 기억 속에서 나의 이름을 뒤져 보는 듯 시선이 공중을 굴렀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들어본 적이 없겠지. 원래도 작가라고하기도 뭐 했고, 그나마 적을 두고 있는 고장에서조차 떠나왔으니. 나를 알 리가 없었다. 그의 무색함을 덜어주고 싶어 내가 또 먼저 말을 이었다.
“저는 ‘파소나’라고 호칭하면 될까요?”
“파…소나요?”
테이블 위의 다이어리를 가리켰다.
“그렇게 적혀 있던데…”
“그랬나요?” 잠시 멀뚱거리던 그가 다이어리 몇 장을 넘겨댔다.
어디서 봤는지 정확하지는 않지만, 어느 문장에서 본 듯했는데…아니었나?
“아, 제가 잘 못 봤나 보네요.”
“아닙니다. 어디 적었겠지요. 하도 적어대기만 해서 저도 기억이 안 나서요…”
잠시 생각에 잠긴 듯한 그가 이내 다이어리를 덮었다.
“파소나… 그게 접니다. 그렇게 불러주십시오.”
익숙지 않은 듯 작은 미소가 번지는 우리였으나, 이내 서로를 맞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