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소나 일기] - 01
나는 고향 없는 자다. 살던 고장도 떠나왔다. 원래 고향이 없는 자라서 지나온 시간과 떠나온 고장을 곱씹을 그리움도 아쉬움도 없다. 알지 못하는 곳을 터전 삼아보기로 했다.
전에는 한 번도 꿈꾸지 않았던 이름 모를 도시에 셋방을 얻었다. 어차피 오래 머물 곳이 아니었다. 나도 아는 이가 없을뿐더러, 나를 아는 이도 없었다. 니아토 37-1번가 삼층집 한 칸에 세 들고 거리로 나섰다.
국적 없는 삶의 시작이었다.
내가 세 든 도시는 떠도는 이들에게 주점으로 유명했다. 낮은 카페, 밤에는 주점으로 바뀌며 사람들로 북적댔다. 유명세를 알지 못했던 이들도 흥청거리는 분위기에 이끌리려 거리를 찾았다. 발 들인 가게에서 모르는 이들이 어울려 한잔 술로 시간을 보내기 적당했다.
이제 막 새로운 도시에 정착했으나, 나는 그곳의 사람들처럼 행동했다. 연기가 뛰어나다 해도 완벽히 그들로 보이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나 내용에도 이따금 음! 하며 고갯짓 같은 추임새를 넣었다. 그들과 비슷한 부류로 비쳐서 그들의 틈에 끼어 삶을 관찰할 위치고 싶었다. 나 같이 이제 막 도착한 이에게 나도 그들처럼 막 도착한 것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자연스러움이 녹아 있어서 상대를 쳐다볼 수 있는 자격의 정주민으로 보이고 싶었다. 이 도시는 일상이 묻어있는 자들과 뜨내기가 섞여 있어 다양한 타인을 관찰하기에 적당했다. 그런 연유로 자주 찾던 카페에서 오후의 시간을 보냈다. 그러지 않으면 굳이 새 고장으로 떠나온 시도가 뭐란 말인가.
대부분 특출난 외견이 없어서 한번 훑으면 그만인 사람들이 드나드는 카페. 가격이 적당하고, 시간을 오래 차지하고 있어도 눈치를 주는 이가 없었다. 낮은 카페로, 저녁은 주점으로. 커피 한 잔, 혹은 하프 파인트의 기네스 한 잔. 부담스럽긴 해도 삶을 훔쳐보는 값으로 치를 만했다. 한산한 편이지만 발길이 끝없이 이어지는 구석에 자리 잡고 앉아, 인생의 단면을 들여다봤다. 귀가 확 뜨일 만한 내용도 없는 인생들의 떠벌림 귀동냥으로 시간을 죽이기에 이만한 곳이 없어 자주 머물렀다. 아는 이가 없고 달리 갈 곳이 없는 나라서 하루가 멀다 몇 시간씩 머무르곤 했다. 어둠이 내리기 전까지 카페의 한구석을 차지하고 앉아 스치는 인생들 구경에 빠져있었다.
잠시 훑어보기만으로도 빤한 삶이라 아무 인상도 남지 않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우리네 삶이 그렇듯, 새로운 곳에서도 같은 짓을 몇 번 반복하면 뭐가 새로웠는지 알 수 없어진다. 퇴색은 삶보다 늘 앞서 달렀다. 낯설게만 느꼈던 모든 것에서도 금세 낯익은 것을 발견하곤 했다. 장소가 바뀐다고 다 새로운 것이 아니다. 새로움은 새로움을 발견하는 자의 시선에 있다.
만사 귀찮음이 동반하는 날의 일이었다. 눈 부신 태양이 기약 없는 내일로 어스름해지고 흥분에 들뜬 얼굴이 차드는 무렵, 한 남자가 카페에 들어섰다. 카운터에 선 남자는 눈에 띄는 특징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보통 체형과 차림새였다. 그 후로도 몇 번이나 봤는데 같은 옷인가 생각될 정도로 똑같아 보였다. 여윈 몸집에 어울리지 않을 정도의 헐렁한 치수, 톤의 차이가 조금 있을 뿐인 무채색 의복은 특징이 없었다. 체형에 맞지 않는 품새가 스치며 만드는 사그락 낙엽 밟는 소리.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들리지 않을 저음의 웅얼대는 말소리. 어둠처럼 녹아 있어서 몰랐을 뿐이었다. 조금만 관심을 주면 그가 실은 복장에 세심히 신경을 쓴 걸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세심함을 눈치 챌 이는 나 말고는 달리 없을 것이다. 자신의 고뇌조차 감지 못하는 시대에, 타인에 깃든 고심과 고뇌를 감지하긴 쉽지 않다. 이득이 되거나 위험이 되지 않는 한, 혹은 새로운 시점의 경계에 서성이는 나와 같은 자가 아니면 말이다.
한 번 의식했더니 계속해서 매일 남자가 같은 자리에 앉는 게 보였다. 그때야 남자가 제대로 들어왔다. 뭐가 관찰이고, 뭐가 깨우침이란 말인가? 나는 자신의 떠벌림에 혀를 찼다. 언제나 이런 식이었다. 세상을 다 안다는 듯이 떠벌려댔으나, 제대로 본 것이 없었다. 매일 같이 카페를 찾는 이조차 알아보지 못하는 주제에 뭘 봤고 뭘 알아냈다는 것인가! 이런 재주 정도니 살 고장을 마련하지 못하는 것이다.
주문을 마친 남자에게 시선이 이어진 것은 왜일까? 매일 같은 시간에 같은 메뉴를 주문해서가 아니다. 그는 물처럼 흐느적댔지만, 물기 없는 마른 소리로 움직였다.
나와 또래가 비슷한 데다가 저녁으로 주문한 음식을 먹은 후에도 추가 주문 없이 꽤 오래 자리를 지켰다. 나처럼.
어둠이 짙어지고 주점으로 바뀔 무렵까지 앉아 있는 건 사람들과 어울려 알코올에 취하기 위해서도 아니었다. 그는 사람의 시선을 끌고 싶지 않은 듯 자세를 낮췄다. 내가 그렇듯.
신경이 계속 남자가 앉은 카페 구석을 향했다. 그는 의자 깊숙이 기대앉아 고개를 숙이고 무언가를 끄적였다. 그 모습만 본다면 적는 대만 집중한 듯 보였다. 그러나 나는 알 수 있었다. 수그린 그의 얼굴에서 이곳저곳을 쳐다보는 시선을 느꼈다. 그는 적는데 몰입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관찰하고 있었다.
시계를 보니 오후 6시 17분! 그의 등장 시간이다.
시간이 좀 지났다 ‘혹시 오지 않을지도 모르지!’ 기웃거릴 때쯤, 그가 여지없이 유리문을 열고 들어왔다.
또 한 번은 올 시간이 훌쩍 지나서도 오지 않기에 밖으로 나가 기웃대기까지 했다. 그러다 길 한 블록 건너의 건물에서 내려오는 그를 목격했다. 입구에서 몇 명과 담소를 하다 헤어졌다. 예상했듯 그 건물에 4층에 그의 직장이 있었다. 그 후 몇 번, 날이 좋은 날이면 창턱에 턱을 괴고 거리를 내다보는 그를 발견하곤 했다.
대부분이 같은 방향으로 가는 것과 달리 그 혼자 방향을 달리했다. 카페와 반대였다. 오늘은 정말 오지 않으려나 보다. 그의 동료는 얘기에 빠져 자기들을 힐끔거리는 나를 의식하지 못한 채 스쳤다. 아쉬움을 품은 채 자리로 돌아가려는 때에, 그가 길 저편에서 다시 이쪽을 향해 오고 있었다. 동료가 지나간 후에 코너를 돌아온 것이다. 여지없이 같은 시간이었고, 언제나의 메뉴를 주문하는 그에게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런 그를 관찰하며 나는 그에게 다양한 역할을 부여하고 여러 시나리오를 써댔다.
참 많이 닮은 캐릭터라 생각했다. 그에게서 발견한 몇몇 공통점은 내 몽상이 만든 나의 착각일까? 궁금증이 오랜만에 스멀댔다. 욕구를 충동질하는 대상과의 조우는 오랜만이었다. 이런 이유로 나는 이 거리에서 처음으로 누군가에 대해 제대로 알아보려는 열망을 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