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 훔친 다이어리
이제 새 도시의 생활에도 어느 정도 적응했다. 그러나, 화면을 마주하고 있는 나의 손은 좀처럼 움직임이 없었다. 키보드 위에 멈춰 있는 게 대부분이고, 그나마 몇 줄 적은 문장을 잡아먹는 것이 소임이었다. 한동안 잊고 있던 울적함이 밀려들어 새 고장에서 만끽했던 산들바람을 쫓아냈다. 옛 고장의 매캐함이 셋방 창 틈새로 스며들었다. 우울한 감정이 늘었다. 새 고장에서도 다시금 옛 고장의 정체가 침투하는 징조였다.
게다가 오늘처럼 안개가 내려앉은 날은 울적함을 가중케 했다. 매우 울적했다. 새 고장까지 찾아든 출처 모를 우울감을 떨칠 방법이 없었다. 더는 견딜 수 없어 한 자도 적지 못하고, 빗방울이 웅덩이를 만드는 날이었음에도 거리로 나섰다. 비에 젖어 발걸음이 뜸한 거리를 다행으로 여겨야 할까? 누구와도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나를 아는 이라면 더더욱!
그날 그렇게 그와 인사를 나누고부터 카페에서 합석하는 일이 잦았다. 이런 날은 특히나 그와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목적이 없는 나는, 본능처럼 카페로 향하고 말았다. 목이 마른 짐승이 제 목숨줄 달릴 덫임을 알고도 넋 놓고 걷다 보니 이미 카페 앞이었다.
“아, 이런…”
그런데 어쩐 일인지 카페가 닫혀 있었다. 차라리 다행이다 싶어 돌아서려는데, ‘아, 이런…’ 나는 걸음을 멈췄다. 건너편의 구부정한 남자가 나를 보고 있는 게 아닌가.
이 고장에서 나를 아는 이가 그 말고 또 누가 있을까?
내가 발 한 걸음 떼기도 전, 우산도 쓰지 않은 그가 길을 건너왔다.
“오늘 같은 날 뵐 줄는 몰랐네요.”
비가 오거나 흐린 날에는 카페를 거르곤 했던 나였다. 그도 나의 행동 패턴을 이미 파악한 것이다.
“근데 하필, 문을 닫았네요….”
그러고 보니 며칠 전부터 카페 주인이 허리를 쥐고 끙끙대던 떠올랐다.
“병원이라도 갔나 보네요.”
우리는 말을 잇지 않은 채 서 있었다.
바짓단을 적시는 빗방울을 피해 바짝 붙어서 하늘을 올려다봤다. 비도 약해졌고, 자꾸 짙어지는 우울감을 들키고 싶지 않아 먼저 발을 떼려 했다.
“아, 저기… 제 방이 이 근처인데 잠깐 들리시겠습니까?”
나를 부른 건가?
떼려던 걸음을 멈추고 그를 돌아봤다. 의아스러워서다. 먼저 말을 꺼내지 않는 타입임을 잘 알기 때문이다.
나중에 그의 다이어리에 자신이 뭔가를 먼저 제한한 것은 내가 처음이었다고 적힌 걸 발견했다. 그는 부끄러움이 많아 늘 주저함이 앞섰다. 사람 사귐이 어색하고, 흥미가 없어서 사적으로 어울리지 않는다고 했다. 그래서 자신의 글을 읽은 이는 내가 처음이라는 내용도.
“아, 부담스러우시다면…”
“아닙니다. 실은 며칠 전에 읽었던 얘기의 뒤가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했더랬는데…”
“아, 저도 그걸 보여드리고 싶었는데.”
“그랬나요? 그럼….”
울적함이 증폭하는 저녁, 평소보다 밝은 파소나 씨를 따라 셋방으로 향했다.
*
나는 본의 아니게 그에 대해 너무 많이 알고 말았다.
그의 셋방을 드나들어서 정보를 너무 획득했다는 말이 아니다. 그를 알려고 했던 의도가 없었다고 하면 앞에 말이 거짓이 되고 만다. 본의가 아니었다고 하는 것은, 양이 아니라, 내용과 깊이에서 그랬다. 내가 알고자 했던 정도와 방식에서 어긋났다는 말이다. 나는 그와 나 사이에 유리의 벽을 세워두고 카페 창 너머에서 보듯 그를 알길 원했다. 그의 불분명한 단상 단상을 통해 내가 만드는 존재이길 바랐다. 의도와는 달리 나는 방어막을 잃고 그를 너무 깊이 알고 말았다.
그가 몇 년째 생활하고 있다는 곳은 나의 셋방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1.5의 방과 부엌의 구분이 있는 방에는 삶의 취향이 드러나는 물건이 없었다.
침대에 맞닿은 행거에 걸린 옷가지 몇 벌, 짝이 맞지 않은 접이식 식탁과 의자 같은 생활에 필수적인 것이 전부였다. 벌거숭이 살림살이의 사칫거리라고 해 봐야 팔걸이가 안락해 보이는 3인용 소파 정도였다.
그렇다고 해도 가죽은 빛바래고 귀퉁이의 흠집으로 보아 새것을 장만한 것은 아니었다.
작은 책상 위의 다이어리와 즐비한 낮 장의 종이가 주거의 빈곤함과 대비됐다.
몇 년을 묵었는지 알 수 없는 다이어리가 꽂혀 있었다.
그 주위로 A4 크기부터 포스트잇에 이르기까지 제각각의 종이가 산란했다. 쓸 공간이 있을 리 만무했다. 카페에서 차분한 시간을 보내는 그의 모습과 연결 짓기 힘든 혼란이었다. 안락한 주거의 부족함과 넘치는 혼란을 피해 카페를 찾는 것이리라.
그는 습관인 듯 가방에서 오늘 적은 것으로 보이는 이면지부터 꺼냈다.
산란하는 책상 위에 혼란을 더하며 중얼댔다.
“그게 어딨더라?”
부산하게 이면지를 뒤적댔다. 내가 궁금하다고 물은 내용이 적힌 걸 찾으려는 것이다. 그러는 바람에 한 무더기의 종이가 우수수 떨어졌다. 찾지 않으려는 걸까? 일부러 저러나 싶을 정도로 흩트려대기만 했다. 책상 밑에 쏟아지는 이면지를 주우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이게 다 순서가 있어서요. 금방 찾습니다.”
“천천히 하셔도 되는데요.”
“죄송합니다. 제가 워낙 정리를 못 해서, 뭐든 이 모양 이 꼴입니다.”
“그럼, 잠시 다른 것 좀 보고 있어도 될까요?” 나는 방금 그가 올려둔 이면지를 들었다.
“그러시다면 제가 감사하죠. 작가님 조언 덕분에 요즘처럼 머리가 맑긴 처음입니다.”
그렇게 끝날 줄 알았던 그가 말을 이었다.
“실은 이게 제 한계인가 싶었거든요?”
“한계라니요?”
“뭔가를 늘 적어댔지만, 그뿐, 저도 제가 뭘 적고 있는지 모르고 적어대기만 해서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답답하기만 했더랬습니다. 그래서 몇 줄 적지도 못하고…. 아예 아무것도 적지 말아야지 싶기도 하고….”
나는 그에게 어떤 응수를 해야 할지 알 수 없어, 그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근데 요즘은 생각이 정리돼서 한 번에 몇 장씩도 적어대곤 합니다. 몇 시간도 정신없이 써댈 때가 있다니까요.”
그동안 내가 관찰한 그가 맞을까 싶을 정도로 말이 이어졌고, 생기가 돌았다. 나는 그런 그를 의아스러워 쳐다볼 뿐 말을 잇지 못했다. 평소 주도적으로 말을 이었던 나와 달라서, 그가 또 긁어댔다.
“아, 이런 주책! 제가 작가님을 초대해놓고 별소리를 다 합니다.”
요즘의 나는 우울감이 짙어져 하루 몇 줄 적지도 못해서 그가 부러울 따름이었다.
“작가님 덕분에 저도 드디어 뭔가를 완성할 것 같은 기분이 든답니다. 문장들이 정리되어 간다고 할까요.”
“그, 그런가요…?”
“예, 뭐라 감사드려야 할지.”
“도움이 됐다니 제가 감사하네요.” 감사한 마음 따위 들지 않았다.
어색함을 감지한 그가 어찌할 줄 몰라라 해대느라 종이를 더 흩트렸다.
“아, 음료수라도 내오겠습니다.”
극구 사양에도 불구하고 그는 주방으로 향했다. 평소보다 높은 톤으로 그가 뭐라뭐라 말을 건넸으나, 나는 응수할 여력이 없었다. 내 눈은 오늘 적었다는 그의 문장에 빠져있었다. 그와의 거리가 자꾸 늘어나며 말소리가 자꾸 멀어졌다. 다른 시대의 울림처럼 멀기만 했다. 나는 그의 문장에 영원처럼 멈춰 있었다. 그러다가,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마땅한 게 없어서….”
그의 등장으로, 순간적으로! 본의 아닌 일이 일어났다.
주방에서 그가 고개를 내미는 찰나, 그의 다이어리를 내 가방에 넣고 말았다.
나도 모르게 내가 저지른 일이었다.
그는 인스턴트커피에 과자 몇 조각을 내놓으며 긁적였다.
“저보다 낫네요. 혼자 살림이 다 그렇죠.”
태연함으로 응수하는 나의 심장이 제멋대로 뛰었다. 이런 나를 나도 처음 겪는 중이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구르지 않는 머리를 포기하고 그의 말이나 행동에 맞춰 몸만 되는대로 움직댔다. 그도 자기 기분에 취해서 나의 어색함을 알아채지는 못했다.
그 밤, 나는 끝내 다이어리를 되돌리지 못하고 방을 나섰다.
그의 셋방에서 멀지 않은 나의 셋방. 돌아오는 길은 한순간이었다.
평소의 같은 길이 맞나 싶을 정도로 짧기만 했다.
방문을 잠그고 책상 앞에 앉았다.
다이어리에 손을 얹고, 한참을 넘기지 못하고 멈춰 있었다.
두려움과 당혹감의 한편, 알 수 없는 흥분에 휩싸였다.
어차피 이렇게 된 거….
제정신이 아닌 나는, 훔친 다이어리의 첫 장을 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