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소나 일기] 사람거리
제2장 - 절망의 환희
사람거리
나에게는 인생이 없다. 아무리 광대한 세상을 품고 있다 한들 인생이 아니다. 타인의 인생을 아무리 잘 안다고 한들 제 인생살이가 아니다. 잉태하고 생산하지 못하는 생은 무가치하다.
생산 무능력자는 살아 있다 한들, 사람다운 사람살이를 하지 못하는 자는 즉, ‘사람거리’가 아니다. 살은 것이 아니라서 인생이 없다.
잉태할 능력이 없는 나는 꿈꾸는 것밖에 할 게 없었다. 현실이 꿈이고 꿈이 현실인 꿈 꾸기를 즐긴다. 착각과 환상에 취해 몽롱한 상태로 희뿌연 유리창 너머의 삶을 들여다본다. 그곳에는 내가 모르는 인생 드라마가 이제 막 무대에 오른다. 내가 아주 잘 알면서도 전혀 모르는 이의 삶이 펼쳐졌다.
사람거리의 삶을 구경한다.
*
그대는 아직 해가 뜨기도 전에 덜컹거리는 전철에 몸을 구겨 넣으며 하루를 시작했다. 부대끼는 몸에 목덜미에 땀이 차고, 땀이 식어 한기가 몰아들 때쯤 목적지에 닿았다. 그대의 생활을 지탱해주는 회사다. 쥐꼬리만 한 월급쟁이의 삶이 무언지를 알려줬다. 그런 회사라지만, 이런 시절 정직원으로 4대 보험이 있는 직장이 어디인가? 라며 버텼다. 몇 년 전 직장에서 정리해고를 당했을 때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했다. 무리해서 구매했던 아파트 대출 이자를 어찌 감당해야 하나 밤잠을 이루지 못했다. 때마침 지인의 소개로 간신히 쥐꼬리만 한 돈벌이라도 시작해 악몽 같던 날에서 벗어났다.
그대에게도 가족이라는 것이 있고, 아침 지옥철에서 쏟은 땀보다 더한 땀을 흘려야 하지만 돌아갈 집이 있었다. 작아서 네 식구 살림에는 복닥복닥해대는 아파트지만 대출금도 거의 갚아서 천근만근 몸과 달리 마음은 가벼웠다. 늦은 저녁을 먹고선, 인제 와서는 무슨 생각에 미래를 약속했는지 기억조차 희미한 파트너와 같은 이불에 몸을 누일 것이다. 장만한 지 10년은 족히 넘은 침대는 누울 때마다 삐거덕거렸다. 침대의 삐그덕거림으로 인해 그대의 육신이 울부짖는 삐거덕거림이 묻혔다.
쳐진 턱선에 허리 줌의 살집이 풍만하지만, 그대도 젊을 때는 펄펄 날았다. 삐거덕거리는 그대의 육신은, 이유가 있었다. 그대의 가족과 생활을 위한 등가교환 탓이었다. 가정을 지키고 가족을 이루는데 바친 대가였다. 이래 봬도 두 아이를 낳고 키우는데 사용한 몸이었다. ‘세월을 묵는다는 게 다 이런 거지…성한 몸뚱이가 어딨겠어?’ 자신을 납득시키며 통증과의 사투 끝에 잠의 바다로 침몰했다. 파스를 덕지덕지 붙여야 하기도 하고, 통증을 느낄 새도 없이 잠에 빠져드는 날들이 늘어갔다.
꿈같은 연애를 하다 결혼을 하였다. 가족을 이루고 아이를 낳는다는 것을 너무도 당연히 여겼다. 잘못 나지 않은 보통의 몸을 지녔으니 말이다. 크게 재고 따지고 할 것 없이 세상 순리를 따랐다. 남들처럼 그렇게 애를 낳고 남들처럼 먹이고 키우느라 삶이 흘렀다.
자신의 유전자로 대를 잇는 것에 혐오를 느낀 적도 없다. 지금에 와서는 ‘저런 애새끼를 뭐 하러 낳아서 이 고생인가?’ 이를 가는 날이 늘었다. 코밑이 시꺼메진 자식새끼에 속이 터졌다. 낳을 당시는 원수 같은 자식 따위는 생각조차 한 적이 없다. 그저 건강히 태어나기만 하면 된다가 유일한 소원이었다. 숟가락 뜨는 것만 봐도 배부르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던 시절은 낮잠처럼 흐른지 오래였다.
돈 버는 기계 취급해대는 식구들 얼굴 볼 때마다 혈압이 올랐다. 고혈압약의 용량을 올려야 하려나 보다. 뭐를 위한 돈벌이인가 의문이 들어, 하루가 수고스럽고 징글징글하기만 했다. 원수도 이런 원수들이 없어서 물고 뜯고 난리가 아닌 요즘이었다. 하루이틀이 아니고 이런 날이 얼른 끝나길 바라는 마음이 늘었다.
그러다가도 또 어느 날은 김빠진 맥주 같았다.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다 괜찮아서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는 맹숭함. 치킨에 맥주 한 잔, 새로 시작한 드라마 앞에 옹기종기 모여 앉았다. 드라마 욕, 이웃 욕 해대며 평안했다. 시트콤이나 미니시리즈의 등장인물들 같은 보통의 가족, 보통의 삶을 살아가는 그대, 밍숭맹숭 별것 하나 없이 무탈하기만 했다.
내가 한 번도 가져보지 못한 삶을 구경했다.
*
한때는 경멸했던 사람거리다.
근근이 사는 무가치한 삶이라 콧방귀를 꼈더랬다.
나는 따분한 그대의 사람거리 인생이 너무도 부러워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꿈엔들 그리운 ‘제대로 된 인생살이’를 훔쳐보는 것만으로 명치가 욱신댔다.
체기가 올라온 것도 아닌데 막힌 듯 답답했다.
사람거리로 사는 그대의 인생살이가 그리워 목이 메었다.
그대의 삶은, 따사로운 오후의 몽롱함이 만들어낸 착각이다.
환상에 취할 수 있는 건 잠시뿐이었다.
영원한 꿈 꾸기는 미친 자만이 누릴 수 있는 영광이다.
제대로 미치지도 못하는 겁쟁이라서.
한 걸음 떨어진 창 너머에서 사람거리의 인생살이들을 지켜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