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사나이 와타나베>와 뮤지컬 <쇼맨>
<해당 극의 결말과 관련된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타인의 이야기를 듣습니다. 여기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 노인들이 있습니다.
'만춘'이라는 젊은 영화감독이 있습니다. 영화 "붉은 잔디"가 흥행에 실패하고 방황하는 청춘입니다. 그러던 중, "붉은 잔디"에 감명받은 일본의 늙은 야쿠자로부터 자신을 주인공으로 하여 자기 일생을 영화로 찍어달라는 의뢰를 받습니다. 그렇게 만춘은 야쿠자 와타나베의 이야기를 영화로 담기 위해 일본에 갑니다. 그리고 와타나베의 삶과 관련된 이야기를 듣습니다.
'수아'는 어릴 때 한국에서 미국으로 입양되었습니다. 그 집 딸의 동무이자 보모 역할을 하며 자라다 지금은 마트에서 일하는 청춘이지요. 사진 찍는 걸 좋아합니다. 그런던 중 놀이공원에서 인형탈을 쓰고 일하는 노인 '네불라'를 만납니다. 그는 수아에게 자신의 사진을 찍어달라고 부탁합니다. 보수도 좋습니다.
그리고 노인의 자신에 대해 알아야 사진이 잘 나올 거라며 자신의 인생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연극 [사나이 와타나베]와 뮤지컬 [쇼맨-어느 독재자의 네 번째 대역배우]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물론 두 극의 느낌은 전혀 다릅니다. 전자는 코미디 감성을 기본으로 하는 웃음 속에 여운을 남기는 연극이라면 후자는 너무 많은, 묵직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적어도 제게는) 조금은 어두운 분위기의 뮤지컬이지요.
그러나 삶의 풍파를 지나온 노인이 자기 인생을 누군가에게 이야기하고 싶어 하는 욕구에서 극이 시작된다는 점은 같습니다.
인생의 가치, 옳고 그름을 판단할 겨를 없이 그때그때 최선을 다해 살아온 두 노인은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자신의 삶을 이야기로 남기고 싶어 합니다.
두 노인은 왜 그렇게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할까요?
이야기는 인간의 본능과도 가깝습니다. 우리는 이야기를 통해 꿈꾸고 상상합니다. 이야기는 내면의 잠재된 욕망을 드러내기도 하고, 내면을 성찰하는 계기가 되어 주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야기는 인간의 역사와 함께 해 왔습니다.
심리치료에 "이야기치료"라는 기법이 있습니다. 인간은 자신의 삶에 대해 의미를 부여하고 해석하여 이야기하는 존재이고, 그렇게 구성된 이야기로 살아가는 존재라고 가정하지요. 이야기를 통해 자신의 경험을 한 발자국 떨어져 바라보고 재구성하면서 의미를 역은 이 작업은 한 인간의 통합과 성장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보는 것입니다.
우리는 일상에서도 끊임없이 우리의 이야기를 합니다. 친구와의 수다를 통해, 혼자만의 일기 안에서, 블로그 같은 sns를 통해서, 그리고 누군가는 에세이나 자서전을 통해 말이지요. 그리고 이 과정을 통해 때로 우리 삶을 변형하고 나 자신과 통합합니다.
두 노인의 이야기 역시 이 모든 것을 품고 있습니다.
[사나이 와타나베]의 와타나베는 이야기를 통해 자기 삶을 다시 만들고 싶어 합니다. 어린 시절 일본에서 겪은 가난과 멸시, 그곳에서 벗어나기 위해 야쿠자에 들어갔고 1대 100으로 싸움을 벌이는 등 용맹을 과시하며 오야붕 자리에 오릅니다. 물론 사실여부는 알 수 없습니다. 젊은 만춘은 와타나베의 이야기에 섞인 허풍과 과장을 지적하지만, 점점 와타나베의 이야기에 빠져듭니다. 이야기 자체가 아니라 의미에 주의를 기울이며 이야기에 묻은 삶의 회한을 발견합니다.
죽음을 바라보는 노년에 와타나베는 자신의 삶을 긍정적으로 정리하고 싶을지도 모릅니다. 그 순간의 선택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그때그때 최선의 선택을 한 자신을 위로하고 그를 통해 삶의 의미를 찾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사실 그는 자신의 삶이 그리 아름답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에 그는 나지막이 읊조립니다.
"영화에서 만큼은 그러고 싶지 않았나 봐..."
[쇼맨]에 등장하는 네불라의 이야기는 조금 다릅니다. 네불라는 극단을 떠도는 단역 배우였습니다. 그러던 중 나라를 다스리는 잔혹한 독재자의 대역으로 발탁되지요. 그 독재자가 무슨 일을 벌이고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였는지는 관심 없습니다. 그저 그는 독재자의 역할에 심취했고 정말 훌륭해 잘 해냈습니다. 신났습니다.
하지만 독재체제가 무너지고 대역 배우를 했던 그는 독자재에 부역한 죄로 옥살이를 합니다. 감옥에 들어가서야 자신이 무슨 일을 했는지,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 깨닫게 되지요. 이후 미국으로 건너와 스탠딩코미디언으로 활동하며 '자신을 우스꽝스럽게 죽이는 쇼'를 반복하다 지금에 이르게 됩니다. 그의 이야기를 듣던 수아는 역겨움을 느껴 도망가려 합니다.
그런 수아에게 네불라는 말합니다.
자신의 인생이 싫지만 자신에게는 소중한 인생이라고 말입니다.
네불라에게 이야기는 자신이 자신을 마주하고 받아들이고 통합하는 과정이었던 것 같습니다. 인생을 살아오며 저지른 모든 경험(그것이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삶의 무게와 경험을 온전히 '자기'로 받아이기 위해 그에게는 이야기가 필요했던 것 같습니다.
"나도 내 인생이 싫지만... 내 소중한 인생이니까요..."
그 이야기가 어떠한 것이든 그들은 그들의 이야기를 남기고 그 안에서 뭔가를 찾고 싶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또 하나,
이야기의 가장 중요한 요인은 바로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 청자입니다. 이야기가 누군가에게 영향을 미칠 때(그게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이야기는 살아 있을 수 있습니다.
두 극에서 등장하는 청자인 만춘과 수아는 노인이 엮어내는 삶의 이야기를 비난하기도 하지만, 어느 한 지점에서 노인의 이야기는 만춘과 수아 자신의 삶과 만납니다.
그 순간 이야기는 빛을 발하고 서로의 이야기에 영향을 미칩니다.
이렇게 이야기들이 얽히고설키는 것이 살아간다는 것 아닐까 싶습니다.
오늘도 우리는 많은 사람의 이야기를 듣습니다. 대화로, 책으로, 이렇게 공연으로요.
그 이야기들은 제 이야기의 한 부분이 됩니다.
그러다 문득 돌아보게 됩니다. 내 이야기는 누구에게 닿고 있는가 — 하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