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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이지 Jan 04. 2020

7-6. 그날 밤은 눈물도 나지 않았다

일곱 번째 데이트 - 광부씨



컨벤션까지 겹쳐 유난히 길었던 이번 출장은 앞으로 다가올 긴 출장들의 예고편 같았다. 출장 중 그는 소중한 이들 모두가 그립고 힘들지만, 곧 익숙해질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도 그가 보고 싶다는 내 말에는 내가 힘들 테니 그러지 말아야 한다는 그가 나는 야속하기만 했다. 하지만 소중한 사람들을 늘 기다리게 하는 것이 그 누구보다도 그 스스로에게 가장 힘든 일이었기에, 그래서 내게 그렇게 말했다는 것까지는 헤아리지 못했다. 그런 그에게 힘이 되어 주고 싶었던 내 바람과는 반대로, 나도 그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사람 중의 하나가 되어 그의 마음을 더 무겁게 하고 있었다는 것을 그때는 알지 못했다.


불행하게도 그런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아빠의 부재가 불만이기만 한 사춘기 아들과 그런 아들보다는 자신의 연애가 더 중요했던 전부인과의 마찰이었다. 주말 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자세히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아침에는 좋은 하루가 될 거라며 신나 하던 그가 저녁에는 마음이 아프다는 문자를 보내왔다.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은 분명했다. 결국 그는 월요일이었던 우리의 약속을 취소했고,  우리가 다시 만난 목요일까지 내가 그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늘 밝고 긍정적인 그가 그렇게 힘들어하는 것을 본 것은 처음이었다. 아이들을 모두 재우고 늦은 밤에 나누던 우리의 전화통화 중에도 그의 목소리에는 기운이 없었다. 자신이 아무리 노력해도 모두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것 같다던 그의 마음속에는 나에 대한 아쉬움과 미안함도 있었던 것일까. 밤을 새워 일하더라도 가능한 모든 시간은 아이들과 보내는 그의 삶에 나의 자리까지 내어주기에는 그의 삶이 너무 벅찼던 것일까.


그것도 모른 채 나는 몇 시간 뒤 우리의 만남을 두고 들떠 있었다.  


'나 좀 떨리는 것 같아.'

'왜 떨려?'

'모르겠어. 아마 오랜만에 만나는 거라서? 첫 데이트처럼 느껴져.'

'난 네가 떨릴 만한 가치가 없어.'

'뭐?! 그런 소리 하지 마.'

'응...'


나는 그제야 불안한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분명 평소의 긍정적이고 자신감 있는 그 답지 않았다. 나는 빨리 그를 만나서 그의 눈을 바라보며 이야기하고 싶었다. 그가 괜찮은지, 우리가 괜찮은지 확인하고 싶었다. 그날도 우리의 첫 만남 그 날처럼 비가 내렸다.

 

Dundas Square, Toronto, ON


토론토의 타임스 스퀘어라고 할 수 있는 던다스 스퀘어에는 평일임에도 사람들이 많았다. 퇴근하는 직장인들, 음악을 틀어 놓고 춤을 추는 젊은이들, 쇼핑백을 여러 개 팔에 걸고 지나가는 관광객들, 그리고 그 사람들 속에 초조하게 그를 기다리는 내가 있었다. 비는 그쳤지만 차가운 습기가 도시의 열기와 서로 밀치다 섞이며, 내 마음만큼이나 갈피를 잡기 어려운 기류가 광장을 채우고 있었다. 그를 만나면 환하게 웃을까, 달려가 팔짱을 낄까, 아니면 그의 이름을 불러 줄까... 어떻게 하면 그의 기분을 달래 줄 수 있을까 생각했다. 떨쳐 낼 수 없는 한 조각 불안한 마음을 어떻게 해서라도 숨기고 싶었다.


번잡한 사람들 무리 속에서 그가 나타났다. 나는 하고 싶었던 것처럼 발랄하게 그를 맞아주지 못하고 그저 그를 바라보며 다가갔다. 그가 커다란 팔로 나를 안아주었다. 두 손으로 그의 등을 감싸 안으며, 그가 다시 돌아온 그 순간에 익숙해지고 싶었다. 앞으로도 다시, 또다시 돌아올 그를 그렇게 안고 싶었다.  


우리는 근처의 레스토랑에 들어가 마주 보고 앉았다.


"나랑 헤어지려는 거야?"

"뭐?! 그게 무슨 소리야?"

"그럼 왜 그런 말을 해? 자기가 떨릴 만한 가치가 없는 사람이라는 말. 그건 헤어지려는 사람한테나 하는 말 아니야?"

"난 그런 뜻이 아니었어."

"그럼 앞으로 그런 말 하지 마."

"응..."

"... 당신 정말 괜찮은 거야?"


그는 힘없는 표정으로 아이들과 전부인과 있었던 주말에 대해 이야기했다. 나는 그런 그가 너무 안쓰러워 옆으로 가서 그를 안아주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왜 선뜻 그러지도 못했을까. 그는 자신이 얼마나 주위 사람들을 실망시키는지 이야기하며, 나에 대해서도 미안하고 걱정하는 마음을 내비쳤다. 나는 그에게 단호하게 말했다.


"나는 정말 괜찮아. 나는 네가 내 걱정을 안 했으면 좋겠어. 난 네가 걱정을 해야 하는 사람이 아니라, 만날 때 만이라도 마음이 편안해지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어."


알았다고 대답하는 그의 목소리는 못내 자신이 없었다. 나의 불안함은 레스토랑을 나서는 우리를 계속해서 따라붙었다.


밖은 다시 비가 내리고 있었다. 분주한 도시가 비까지 더해서 더욱 산만하게 느껴졌다. 나는 가져간 우산을 그에게 건넸다. 우리의 첫 번째 데이트에서 그에게 빠져 잊어버리고 왔던 그 우산이었다. 그가 우산을 펼쳐 내 머리 위로 씌어 주는 순간 나는 그의 팔짱을 꼈다. 그가 나를 보며 웃는 표정이 드디어 조금 밝아졌다. 무언가 안심하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내게 물었다.  


"우리 어디로 걸을까?"

"글쎄... 난 아무 데나 좋아."

"그럼 우리 남쪽으로 갈까?"

"응!"


그와 함께라면 어디든 좋았다. 거세어지는 빗줄기도, 그에 비해 너무 작은 우산도 다 좋았다. 둘이 함께 작은 우산을 쓰고 사람들을 헤치고 물웅덩이를 피하며 걷는 그 순간이 내 가슴에 촉촉하게 스며들었다. 공사 중인 건물 앞 보도에 드리워진 임시 구조물 밑으로 들어서자 그가 우산을 접었다. 그리고 내 손을 잡았다.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았다. 그가 손을 잡아 준 그 순간, 모든 게 다 괜찮아진 것 같았다. 끈질기게 따라붙던 나의 불안함도 그 순간에 깨어져 나갔다. 나에 대한 그의 마음이 흔들리는 건 아닌지 걱정했던 내가 미웠고 그에게 미안했다. 우리는 그렇게 팔짱을 끼고 우산을 썼다가, 또다시 손을 잡았다 하면서 빗속을 걸었다.


신발 속까지 다 젖을 만큼 비가 거세어지자, 결국 우리는 밖으로 걷는 것을 포기하고 지하로 들어갔다. 우리는 더 이상 우산을 접었다 폈다 할 필요 없이, 서로의 손을 놓아야 할 이유 없이 계속 더 걸었다. 나는 같이 걷는 것이 그와 함께 하는 일 중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가 내 손을 잡아주는 한 언제까지나 그와 걷는 것이 행복할 것 같았다.


PATH, Toronto, ON


어느새 우리는 지하도를 따라 그의 회사 건물 밑까지 와 있었다. 우리가 만난 초저녁에서 이제 밤이 되어가는 시점이었다. 그가 조심스레 말했다.


"우리 이제 집에 갈까?"

"벌써?! 이제 우리 또 언제 만날지도 모르는데?"

"나 사실 너무 피곤해..."

"... 그래 알았어."


난 그가 얼마나 지쳐있는지 알고 있었다. 세 나라를 오가는 긴 출장에 이어, 돌아와서는 밀린 업무를 처리하고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느라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나는 그 순간 서운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이제 곧 그의 새로운 스케줄이 시작되고, 우리가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을지 기약도 없는 상황이었다. 그저 언젠가 다시 만나게 될 거라는 희망만 갖고 그를 보내야 하는 날인데, 조금이라도 더 오래 그와 있고 싶은 마음을 감추기는 너무 어려웠다.


나를 집에 바래다주는 그의 차 안 공기는 우리를 짓누르려는 듯 너무도 무거웠다. 그 날을 돌이켜 보면, 그도 나도 많이 지쳐있었고 혼란스러웠다. 우린 둘 다 며칠간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고, 아이들보다 자신들의 욕망과 이기심이 먼저인 전 배우자들은 우리를 힘들게 했고, 다가 올 여름의 우리는 불확실했다. 그리고 늘 밝고 긍정적인 그의 모습 뒤에 숨겨져 있던 그의 상처와 두려움도 나는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었다. 그의 눈부심과 따뜻함에 나도 어느새 물들어 버려, 우리 앞에 놓인 어둡고 시린 상황을 바로 보지 못했었다.


그가 물었다.


"몇 주에 한 번씩 만나서 데이트하고, 키스하고, 헤어지고. 이게 정말 네가 원하는 거야?"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이게 몇 달이 될지 몇 년이 될지도 모르는데 얼마나 기다릴 수 있어?"


나는 또 대답하지 못했다.


"거봐, 너도 대답하지 못하잖아."


대답하지 못한 것은 그를 기다릴 자신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내가 그 예정 없는 시간을 기다리겠다고 하는 것이 그가 원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든 것이 너무 갑작스럽고 혼란한 그 상황에서 나는 그의 물음에 대답하지도, 그것이 그가 원하는 것이냐고 되묻지도 못했다. 그는 그런 내가 그를 기다릴 자신이 없는 것이라고 확신했을 것이다.


“너는 걱정하지 말라고 했지만, 아까 집에 가자고 했을 때 네가 얼마나 실망했는지 난 보았어. 그런데 어떻게 내가 네 걱정을 하지 않을 수 있어. 앞으로 계속 실망하게 될 거야.”

“......”

"네 말대로 이제 또 언제 볼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너를 계속 보고 싶지만, 언제 끝날 지도 모르는 시간 동안 너를 잡아둘 순 없어."

"꼭 그렇게 어렵게 생각해야 해? 그냥 우리가 하고 싶은 대로, 우리가 할 수 있는 만큼만 만나면 안 돼?"

"내가 구식인지는 몰라도, 나는 관계에 있어서는 진지하게 만나야 한다고 생각해. 하지만 난 지금 일과 가족 때문에 그럴 수가 없는 상황이야."

"그럼... 정말 나와 헤어지겠다는 거야?"

"오늘 너와 헤어지려고 만난 건 정말 아닌데... 아까 네가 헤어지려고 하냐던 말이 저녁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어."

"내가 그 말을 하지 말았어야 했어..."

"네 잘못이 아니야. 내가 부족해서야."

"......"

"난 오늘 밤에 너를 집에 데려가지도 못하는데..."


마음이 아팠다. 우리가 서로를 얼마나 원하는지 알기 때문에, 하지만 같이 보내는 밤조차 허락되지 않는 우리의 현실 때문에, 그것이 자기 탓이라고 생각하는 그 때문에, 마음이 깨어지듯 아팠다.


"도대체 내가 어떻게 해주길 원해...?"

"... 지금 우린 너무 지쳐 있어. 일단 둘 다 좀 자고 나서 생각하자."


나를 문 앞에 내려주는 그를 향해 애써 손을 흔들며 그를 보냈다. 하지만 멀어지는 그의 차를 돌아보는 순간 다리가 풀려 버린 나는, 벽에 기댄 채 주르르 주저앉고 말았다. 나는 그렇게 그의 마지막 모습이 사라진 곳을 멍하니 한참 바라보고 있었다.


'도대체 오늘... 무슨 일이 일어 난 거지...?’


그날 밤은 눈물도 나지 않았다.




사진: Milestones Dundas Square, Toronto, 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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