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나무 Dec 21. 2023

인간이 빛이 날때

우연히 김혜령 작가의 브런치에서 김정규교수의 '존재의 대화'에 대한 강의를 읽게 되었습니다.

평소였다면 가볍게 읽고 넘어갔을테지만

저에겐 최근 깊은 상처를 받은 일이 있었습니다.

몸과 마음의 이상(異常)을 경험하고 저에 대한 깊은 고민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중 아래글을 읽게 되었고 글을 읽으면서 깨어나는 기분을 느꼈습니다.

혼자서 치열하게 고민했던 것들에 대한 나의 답을 찾아가기 위해 좋은 선생님을 만난 기분이었습니다.

한 문장도 놓치고 싶지 않아서 김혜령 작가가 필사한 대로 나도 필사해 보았습니다.




인간은 다른 동물들과 어떤 지각을 하는 데에 있어서 차이가 있습니다. 개를 예로 들면 시력이 별로 좋지 않습니다. 하지만 청각이나 후각은 아주 발달해 있죠. 새는 시력이 아주 좋습니다. 뱀은 시력이 좀 나쁜 편입니다. 대신 적외선을 감지할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각 생물마다 이렇게 지각하는 폭과 깊이가 다릅니다. 동물들과 인간의 가장 큰 차이는 동물이든 인간이든 각 개체가 갖고 있는 능력들은 다들 대단한 것이죠. 그런데 동물들은 자신의 감정의 기복에 따라서 지각능력이 달라지거나 그런 일은 거의 없습니다. 근데 인간은 훌륭한 능력을 갖췄지만 본인의 어 생각 감정에 따라서 지각하는 능력이 굉장히 달라질 수 있습니다. 굉장히 흥미로운 우리말 표현들이 있습니다. ‘돈에 눈이 어두워서’, ‘권력에 눈이 멀어서’와 같은 표현들이 시사하듯이 본인의 생각, 감정에 따라서 지각하는 능력이 굉장히 많이 달라질 수가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실제 우리 삶에서도 나타나는지 한번 그림을 보면서 알아보겠습니다.     


젊은 연인들이 데이트를 하고 있는 장면이죠.     


그런데 자세히 보면 남자는 지금 시선이 딴 곳으로 향하고 있죠. 한번 상상을 해 보았습니다. 최근에 엄마 친구의 소개로 몰래 외국 학위를 가진 여성을 만나기 시작했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 남자는 계산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지금 이 순간이 아마 전혀 안 느껴질 가능성이 높겠죠. 둘이서 함께했던 수많은 순간들 기다림, 설렘, 만난 이 모든 것들이 까마득하게 사라져 버리고 계산하는 이성이 작동하는 순간에는 존재가 소멸되어 버립니다. 오로지 어떤 사람하고 내가 결혼을 하는 것이 더 나을까. 계산하고 평가하고 가치 매김하는 그런 삭막한 세상으로 바뀌는 것이죠.      

계산은 철학적인 용어로는 표상이라고 합니다. 개념이죠. 개념적 사고를 하는 것인데 그 개념적 사고를 하는 순간에는 우리가 세상을 현실을 느낄 수가 없게 됩니다. 표상적 사고에서 나타나는 것은 허상이고 신기루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하이데거는 데카르트 철학 이후로 존재가 망각되고 존재자만 남게 되어서 인간의 존재가 상실되는 일이 벌어졌다고 탄식했습니다. 즉 존재가 사라지고 존재자만 남았다고 하는 말의 뜻은 비유를 들어서 설명을 한다면 물고기와 바다를 볼 수가 있습니다. 물고기가 존재자라고 한다면 바다는 존재죠. 바다가 사라진 물고기가 어떤 의미가 있겠습니까. 오늘날 우리의 삶이라는 것이 우리가 물고기라고 한다면 바다가 사라져 버린 혹은 사라져 가고 있는 그런 환경에서 우리가 살아가고 있다는 얘기가 될 수 있죠. 그래서 존재는 사라지고 계산만 남게 된 즉 인간이 사물과 똑같이 취급이 되고, 도구화되고 수단화되고 있는 일이 벌어졌다는 것이죠. 인간의 가치라는 것이 이용 가치가 있는 것인가. 쓸모가 있는 것인가에 따라서 결정되는 비극적인 현상이 현대에 와서 초래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쇼펜하우어는 우리의 의지와 표상이라는 개념으로 설명을 하는데 우리는 실제 있는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어떤 욕망에 의해서 생각을 통해서 어떤 상상을 해서 세계를 마음속에서 그려낸다는 것이죠. 마음을 만들어내 가지고 그것에 따라서 우리가 행동을 하는 것이죠. 실제 세계에서 그대로 우리가 대응하면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만들어 낸 생각의 세계, 말하자면 허구의 세상이 되겠죠. 그 세상을 가지고서 우리가 반응을 하기 때문에 실제 세계와 만나지 못한다. 진정한 현실이라는 것은 실상의 세계가 되어야 할 텐데 계산하는 계산적 이성에 의해서 평가되고 가치매김되는 그것을 우리는 현실이라고 생각하고 자녀들에게 현실적이 되어라. 이렇게 얘기를 하면서 삽니다.    

 

생각이라는 것이 현실을 압축해서 요약해서 스케치한 것이 생각이라고 보시면 돼요. 있는 그대로 본 게 아니라 예를  들어서 개념이 다 생각이거든요. 생각은 개념을 가지고서 파악해 나가는 방식이 개념인데 ‘나무’그러면 실제 나무는 없어요. 내가 나무라고 얘기하는 개념만 있을 뿐이지. 세상에 나무란 건 없어요. 꽃이란 것도 없어요. 그럼 장미꽃, 국화꽃은 있지 않느냐. 아니요. 그것도 없어요. 물컵이 존재하느냐, 존재한다고 믿느냐 이렇게 물어보죠. 물컵이 있죠. 여기 있잖아요. 물컵. 이것도 물컵이고 저렇게 좀 다르게 생긴 것도 물컵이고. 물컵은 개념일 뿐이잖아요. 이것이 이 세상에 있는 모든 물컵을 대변하는 물건은 아니잖아요. 수없이 많은 물컵들을 추상화시켜서 물컵이라는 개념을 하나 만들어 놓은 것에 불과하죠.      


이름을 붙이는 순간 걔의 실상, 있는 그대로의 모습은 사라지는 거에요. 사랑이 무엇이냐, 정의가 뭐냐. 자유가 뭐냐. 진리가 무엇이냐. 다 개념들이잖아요. 그런 것들은 그런 실상의 세계를 가리키는 손가락에 불과한 것인데 그런 것들이 마치 실제인 것인 양 붙들고 그걸 가지고 네가 옳으니 내가 옳으니 떠드는데, 그것은 다 추상화되고 간접적인 방법이고 그러니까 결국은 실제 어떤 삶이 사라져 버린단 말이에요.      

아까 연인의 경우에 이제 부잣집 딸한테 마음이 뺏긴 거잖아요. 왜 뺏겼겠어요. ‘부잣집 딸’이라는 그게 멋있을 것 같단 말이에요. 부잣집 딸이라는 게 실제로 존재하지도 않거든요. 사회적인 계층, 신분이 높다. 이 여자가 한부모 가정의 출신인 여자다. 한부모 가정이라는 게 실제로 있어요? 재벌이라는 게 있어요? 다 개념일 뿐이죠. 그런 것들을 우리는 그 속에서 훈련이 너무 많이 된 거죠. 표상적 사고가 그런 것들이 있는 것인 줄 착각하니까. 돈에 매달리고, 돈이라는 것이 실재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권력이라는 것이 실재하는 것으로 생각하니까. 다 미친 듯이 공부하고 자식들 통제하는데, 그게 실상의 세계에서는 없는 거에요. 허깨비를 보고서 덤벼들고 있는 거에요.     

 

#표상적 사고에 갇히면 떠오르는 생각들     


우리가 불안이라고 경험하는 것은 좀 더 파고 들어가 보면 ‘나는 쓸모없는 사람이 될지 몰라’라는 걱정. 그것이 불안이죠. 우울이라는 것은 ‘나는 쓸모없는 사람인 것 같아’라는 그런 생각이 바로 우울이거든요. 내가 이미 ‘나는 쓸모없는 사람인 것 같아.’라는 생각을 하게 되면은 우울이 되는 것이고. ‘나는 쓸모없는 사람이 될지도 몰라.’라는 생각을 하게 되면 그것은 불안이라고 말을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느끼는 가장 흔히 느끼는 감정이 불안 아니면 우울인데 그런 것들이 다 쓸모 있음과 없음에 의해서 다 생겨나는 감정이라는 것이죠.      

더 이상 존재로서가 아니라 어떤 도구화되고 수단화되는 현실이 펼쳐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세상이 최근에 와서 생긴 것이 아니라 이미 19세기에 벌써 만연하고 있었습니다. 톨스토이의 명작 <부활>에서 러시아 귀족가문의 자식인 네플류도프 공작이 젊었을 때 시골 고모댁의 정원에 가서 순박한 농촌 처녀 카튜사와 사랑을 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되게 진실된 사랑이었어요. 그러나 나중에 떠날 때는 카츄사를 농락하고 버린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데, 카츄사가 매춘부가 되어서 파란만장한 삶을 살게 됐는데 어느 날 살인자로 누명을 쓰고 교도소에 수감되는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네플류도프가 우연히 법정의 배심원으로 가서 그녀를 만나게 됐는데 카츄사는 이미 많이 변해있었습니다. 그녀는 지금까지 자기가 만난 모든 여성들은 다 자기를 이용해서 돈을 벌려고 했고 남자들은 모두 자기를 쾌락의 도구로만 대했다는 것이죠. 즉 대상화시켜서 자기를 봤다는 것이죠. 담배와 술과 남자들의 유흥을 그냥 받아들이면서 그 즐거움을 자기 삶의 낙이라고 생각하면서 그러면서 자기 인생관을 새롭게 정립하게 됩니다. 자기는 매력 있는 여자이므로 남자들의 욕망을 채워줄 수 있는 쓸모 있는 사람이다. 따라서 자기는 매우 중요한 사람이다. 그런데 갑작스럽게 네플류도프가 나타나서 사죄를 하면서 자기를 구해주겠다고 나서니까 굉장히 당황스러운 것이죠. 자기는 자기가 처한 비참한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했고 그래서 어렵게 쟁취한 어떤 자존감을 위협받게 되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죠. 그래서 네플류도프의 구해주겠다는 제안을 단호히 거부합니다.     


오늘날 우리들 대부분은 카츄사와 얼마나 다를까요? 성이 되었든 돈이 되었든 명예가 되었든 권력이 되었든 우리 모두는 그런 것들을 쟁취하기 위해서 즉 쓸모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피나는 노력을 하면서 살아오지 않았습니까? 그 대가로 술과 담배, 유흥 혹은 다른 보상을 원하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그런 것들을 행복으로 믿고 행복으로 살아오지 않았습니까. 그 결과 우리는 수많은 것들에, 물건들에 재산에, 권력에 명예에 집착하고 소비하고 하지만 우리의 허기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허기는 심해지고 이런 개념적 사고, 생각은 모든 것을 쪼개고 파편화시킵니다. 생각이라는 것이 바로 욕심이거든요. 욕심에 의해서 세상이 만들어지는 거에요. 다른 사람을 개념화시켜서 이렇게 좋은 사람, 나쁜 사람 만들어내잖아요. 대상화시키는 거에요.

     

‘대상화’라는 말이나 ‘표상화’ 같은 말이에요. 결국은 이제 존재 상실로 가는 그 과정을 그렇게 표현하는 거예요. 되게 중요한 부분이 다른 사람을 대상화시키기 이전에 자기 자신을 대상화시키지 않으면 그게 되지를 않아요. 원리적으로 자기가 먼저 파괴가 되는 거에요. 명심보감에 보면 똑같은 얘기가 나와요. 되게 소박한 표현이 나오는데 옛날에는 원수, 적으로 만났을 때 그 사람을 저주하는 방식이 피를 입에다가 머금어가지고 그 사람 얼굴에다가 확 뿌리는 게 최고의 공격이에요. 근데 그렇게 하려면 먼저 자기 입에다가 피를 머금어야 되지 않느냐. 함혈을 해야만 상대방에게 피를 뿌릴 수 있다는 거예요. 한마디로 그 독을 내가 이렇게 입에다 품지 않으면 어떻게 상대방에게 덮어씌울 수 있느냐 이거에요.    

  

동시생 동시멸. 그러니까 나는 너고 나는 너다. 그게 될 수가 없다는 얘기에요. 그게 마르틴 부버가 하는 얘기에요. 결국 관계성이 존재라는 말인데 우리가 그렇게 살고 있느냔 말이죠. 게슈탈트 치료자들도 다 대상화시켜서 이야기하고 있어요. 인간이 대상화를 넘어서기가 참 어려워요. 한 70%-80% 정도까지는 대상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는 그런 관계를 우리는 인정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나머지 10%든 20%든 하다못해 5% 정도라도 우리가 진정한 존재와 존재로서 만날 수 있는 그런 시간들이 정말 소중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한테 다 그런 능력이 있거든요. 생각 속에 깊이 빠지면 마음도 아프고 몸도 아파요. 도저히 이대로는 안 되겠구나. 한계 상황에 부딪치면 왜 이렇지 그러면서 정신이 깨어나요. 생각을 비우는 순간 뭔가 이렇게 크게 잘못될 것 같은 두려움. 그건 에고의 생각일 뿐이에요. 실상은 그렇지 않은데 늘 우리가 앞당겨서 생각해 보고 미래에 대해서 계획을 세워보고, 그렇게 하는 것이 굉장히 안전하다고 믿고 있는데, 그것이 생각의 본질이에요. 거기서 벗어나는 것은 굉장히 위험하게 느껴지는데 생각 속에서 묻혀서 살았던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 나중에 깨닫게 되죠. 그렇게 되기 전에 사물들 아니면 나무나 뭐 하늘이나 바깥에 있는 사물들 환경을 알아차리는 것이 도움이 되고, 아니면 심호흡을 한번 하면서, 심호흡을 하면 우리 몸에 생기가 돈단 말이에요. 몸이 살아나는 그 느낌을 생생하게 느껴보는 것. 우리 주의를 몸으로 돌리는 것. 그것이 굉장히 도움이 됩니다.      

창밖에 있는 풍경들을 바라보거나. 차 지나가는 소리를 듣는다거나 하여튼 실제 실상이죠. 이런 것들이 다. 실상을 딱 접하는 순간 우리 몸이 제대로 작동하기 시작해요. 몸이 편안해지면서 에너지가 다시 들어오면서 생기가 살아나는 것이죠. 기분도 좋아지고 마음도 평온해지고. 정말 좋은 필요한 생각들은 그렇게 휴식을 취할 때 정말 마음 깊은 곳에서 지혜로운 생각이 떠오릅니다. 그런 생각들은 우리가 붙들고 있는 그런 생각들하고는 종류가 좀 달라요. 삶 자체가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우리가 노력하지 않아도 그런 삶과 직접 만나게 되는, 존재가 다시 우리에게 살아나는 그런 경험을 하게 되는 것이죠.      


지금까지 열한 번의 강의가 우리의 심리적인 차원에서 어떤 것이 경험될 수 있는가. 그런 것들이 또 미해결 과제를 다루고 나면 어떻게 회복될 수 있는가. 이런 모든 것들을 자세하게 하나씩 말씀을 드렸는데 이렇게 하나씩 해결이 되어 나가면 맨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결국은 우리 존재를 온전히 회복하는 것이 궁극적인 목적이 되는 것이죠. 고도의 기술 사회에 살고 있는 우리는 존재가 우리에게 들려주는 말들에 늘 깨어서 귀 기울여야 할 것 같습니다.           




이전에는 제 얼굴을 잘 바라보지 못했습니다.

얼굴에 잔뜩 난 피부트러블이 보기 싫어서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거울을 볼때마다 늘 쫓기고 있는 내가 보였던 것 같습니다.

눈이 나쁜데도 안경을 쓰지 않은 이유는 '세상을 흐릿하게 바라보고 싶어서요.' 라는 말도 했습니다.


흐릿한 세상을 바라보면서 저를 외면하면서 방향도 모른채 열심히 달렸습니다.

열심히 달리던 두 다리가 자동으로 움직일만큼 관성이 생기고

방향은 알 수 없었지만 일단 가고 있다는 거에 만족을 하고 성취감을 느끼고 있을 그때

큰 유리벽에 부딪쳤습니다. 전속질주중이었기 때문에 더 많은 충격이 옵니다.

천천히 달리든 빨리 달리든 결국엔 그 벽에 닿았을 테지만 '열심히' 달렸기 때문에 더 피투성이가 되었습니다.

땅에 누워보니 하늘이 보입니다. 바람도 살랑거립니다.


 '몸이 살아나는 그 느낌을 생생하게 느껴보는 것'


여기서부터 시작을 해보기로 합니다.

10여년전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하다'라는 감정을 느낀적이 있습니다.

그 순간을 기억해보자면 오후 두세시경, 열린 창문사이로 따뜻하면서도 선선한 바람이 불어왔고

저는 집앞의 수녀원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빽빽한 아파트 숲사이에 진짜 '숲'을 가지고 있는 수녀원을 20층에서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때 안정된 직업, 행복한 가족, 적당한 성취, 여유로운 시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언젠가 평범하다는 것은 뭐하나 부족한게 없다는 말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 당시 저는 '나는 평범하기 때문에 행복하다' 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김진규교수의 강의에서 말하길 그것들은 '표상'이라고 했습니다. '실재하지 않는 것'

저는 지금 저 모든 조건들이 변했습니다. 그러면 저는 더이상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해 질수 없는 걸까요.

애초에 저 조건들이 저를 행복하게 했던 것이었을까요?


저는 실험을 해보기로 했습니다.

마침 실험을 하기에 좋은 환경에 와 있습니다.

따뜻한 햇살, 푸른잔디, 하얀 구름이 있는 푸른 하늘, 흔들리는 나뭇잎들 사이로 보이는 반짝이는 그늘, 설레는 온도의 바람 그 한가운데 서봅니다.

불어오는 바람과 볕을 맞으며 숨을 깊게 들이쉬었습니다. 그 감각을 심장과 손과 발 끝으로 보내보았습니다.

미세한 두근거림이 느껴집니다.

이 느낌은 제가 전에 느꼈던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하다'라고 느꼈던 그 순간의 느낌이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10년이 지난 지금 그때와 모든 조건이 달라졌지만 그 행복의 순간이 다시 찾아옵니다.

이렇게 느낄수 있다는 걸 깨닫고 나니 앞으로는 더 자주 행복해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사람이 조금 더 행복해 지기 위해서는 '행복의 빈도'를 늘려야 한다고 합니다.


이 글을 쓰는 지금 키즈클럽에 와있습니다.

늘 오는 것 자체가 고역이었던 곳입니다.

볼풀장의 볼풀들의 색이 아름답습니다.

흰색, 푸른색, 선홍빛의 조화가 꼭 파도같아 보이기도 하고 바닷속 드문드문 있는 산호같아 보이기도 합니다. 아이들의 세상 근심없는 웃음소리가 제 몸을 뚫고 들어와 저의 근심까지 가져가는 것 같습니다.

아이들을 따라온 부모들에게서 지친 기색이 여력합니다.

그 지쳐있는 부모중 한명인 저는 이곳에서도 행복의 순간을 만났습니다.


요즘 거울 속의 저를 자주 바라봅니다.

예쁘다는 생각이 듭니다. 나에게 미소를 지어봅니다. 기분이 좋아집니다.

저는 저를 위로하고, 치유하고, 회복하고, 찾아가는 여정을 떠나기로 했습니다.


저는 제가 빛나는 이유에 대해 글을 써보고 싶었습니다.

어떤 좋은 점을 가지고 있고 또 그것이 날 어떻게 빛나게 하는지

그런데 인간은 그 존재 자체가 될 때 비로소 빛이 나는 것 같습니다.

존재가 우리에게 살아날 때 인간은 빛이 납니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나 빛이 날 수 있습니다.




작가의 이전글 발을 땅에 딛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