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시절인가 책에서 물에 떠있는 빙산 그림과 함께 빙산의 일각에 대한 저자의 생각을 쓴 짧은 글을 읽었었는데 누가 쓴 글인지 기억에 없지만 저자는 빙산의 수면 위의 부분과 수면 아래의 부분을 인간의 외면과 내면에 비유하는 글을 썼던 것 같다. 내용은 자세히 기억할 수 없지만 그림만은 지금도 기억한다.
빙산은 작용하는 중력과 얼음과 물의 밀도의 차이로 빙산이 안정적으로 떠있기 위해서는 대략 90%의 부피가 수면 아래에 잠겨 있게 되는 것을 말하는데 보통은 나쁜 뜻으로 쓰인다. 어떤 나쁜 일의 경우, 수면 위에 드러난 부분은 그야말로 아주 작은 범위이고 실제는 그보다 훨씬 큰 문제가 수면 아래 숨어있다는 뜻으로 많이 쓰인다.
오늘 아침 유튜브에서 이 빙산의 사진을 노력과 성과의 관점에서 비교하는 자기 계발 관련 콘텐츠를 보고 문득 이 그림에 대한 기억이 되살아났다. 노력해도 성과가 없어 좌절하고 절망하는 기간에도 성장하고 있는 자신의 능력과 내공을 믿고 앞으로 나아가라고 독려하면서 이 그림을 보여주었다. 그는 어려운 시기를 빙산의 수면 아래의 부분에 비유하고 있었다. 겉으로 보이는 것이 전부로 여겨지는 것 같은 지금의 생태계에서도, 오늘 그 유튜브를 보고 고금의 진리는 변하지 않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상하게도 내게는 글의 내용은 희미하게 남아있지만 그 물에 떠 있는 빙산의 그림은 오래 아니 지금까지도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아주 간혹 이 그림이 떠오른 적이 있었다. 원래의 성격이 낙천적 이어서인지, 약간 나르시스 적이고 몸이 허약한 편인 나는 힘들고 시간이 오래 걸리는 일을 싫어하고 성과가 나지 않는 일에는 오래 연연하지 않는다. 젊은 시절 직장에서 일할 때는 그것은 나의 강점이 되어 주기도 했다. 그럼에도 어떤 일이든 힘들고 고된 바닥을 다지는 시간이 필요하고 그 어두운 터널을 걸어 들어갈 수 있는 용기와 그리하여 그 어두움을 견디고 다시 걸어 나올 수 있는 인내와 노고가 필요하다. 그런 시절에 나는 이 그림을 떠올리곤 했던 것 같다.
기억하건대, 의외로 남의 눈에 잘 뜨이는 아이였었다. 평범한 외모에 가난했으나 별 궁색함이 보이지 않고, 공부도 그럭저럭이지만, 잘해 보이고, 속으로는 부끄럼 타는 성격인데 당당하고 거침없어 보인다고 남들이 그랬다. 그럴 때마다, 뭔가 속이고 있는 것 같아 속으로 불편했다. 그런 저런 이유로 어린 마음에도 보이는 것 정도는, 아니 그 이상이 돼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고, 그러다 보니 조금은 원래의 자신보다 열심히 살았던 것 같다. 어린 시절 책에서 본 그림 하나가 사람의 인생을 바꾸지는 않겠지만 그 시절의 순수하고 깨끗했던 마음을 기억하게 된 아침이다.
어제는 오랜만에 동대문 시장에 다녀왔다. 겨울이 되고 연말이 되니, 좀 따뜻한 느낌의 커튼이나 쿠션으로 살짝 분위기도 바꾸고 싶고, 멀리 살다 보니 오랫동안 못 가본 시장도 구경할 겸 나섰었다. 천천히 걸으며 구경하던 중에 닫혀 있는 가게 문 앞에 앉아있는 한 여성 노숙인(?)에게 눈이 갔다. 검은색 코트와 스커트를 입은, 나이는 들어 보이지만 아직 매력적인 외모를 가진, 나이가 짐작이 가지 않는 여자. 커다란 검은색 슈트케이스 위에 앉아 있어서 노숙인으로 보이지만, 강하고 당당한 눈빛, 단정한 외모와 세련된 옷차림에 눈길이 갔다. 혹 민폐가 될 가 하여, 눈길도 두 번 주지 못하고 지나왔지만 마음에 남는다.
코로나로 많은 사람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고 그중에는 한순간에 뜻하지 않게 일상의 삶에서 밀려나 거리로 나앉게 되는 경우도 있다. IMF 때에도 경험하였었던 일이다. 그래도 그 후에 어떻게 해서든 어려움을 딛고 다시 사회로 복귀한 사람들의 후일담이 들리곤 했다.
지금도 60-70대 중에는, 그때 허리가 우지끈 꺾이는 일을 당한 이후로 힘든 삶을 사는 사람들이 많다. 같은 시기에 힘든 고비를 함께 넘어온 사람들 이어서인지 언제나 연대감이 있다. 폭풍우나 산사태로 물밑으로 가라앉았다 가도 다시 수면으로 떠오르는 빙산처럼, 그녀가 그간에 쌓아 올렸을 물 밑의 견고한 인내의 시간에 힘입어, 다시 포근한 삶의 터전으로 복귀하게 되기를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