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능력에 대한 과소평가와 과대평가
연인한테도 들어보지 못한 아주 로맨틱한 말, 내 인생의 방향을 바꾼 말이 되었다.
발리에 온 지 두 달째, 화이트 워시에서만 구르며 저 멀리 라인업을 바라보기만 한세월
도전을 안 해 본 건 아니지만... 매번 울면서 나오길 수차례 (더 이상 무섭다고 말하기도 민망했다)
엄청 무섭게 생긴 상남자 스타일 인스트럭터 드위와 1:1로 강습받던 날,
"상어, 라인업 같이 들어가자, 네가 파도 타고 나오면 같이 타고 나올게, 걱정하지 말고 가자"
드위의 캐릭터가 워낙 상남자, 세심한 케어보다는 좋은 파도를 골라 주는 스타일이었다.
그런 드위가 이런 스위트 한 말을? 정말 감동(?)을 받고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다고 생각했다.
라인업에 들어가려고 파도를 보는데 이미 내 심장은 튀어나와 저 라인업에 있었다.
너무너무 무섭고 당장이라도 울 것 같았는데, "상어 가자"라고 외치는 드위가 바로 옆에 있었다.
무서운 드위의 얼굴이 갑자기 믿음직하게 보이며, 그래 한 번만 더 해보자!라는 마음으로 들어갔다.
라인업에 들어가자마자 항상 마음이 두근두근 어쩔 줄 모르며 울기 직전이었는데
드위가 옆에서 "상어 지금 패들 해, 파도 온다. 내가 너 따라갈 거야 옆에 있을 거니까 걱정하지 말고 타"
역시 상남자 드위, 내가 딴생각할 새도 없이 바로 파도를 골라서 밀어줬다.
눈물 찔끔 흘리며 무사히 타고 해변에 도착했을 때의 감격이란....!
와 오늘은 이제 했다 이제 그만 타도 되겠다고 생각한 순간... "잘했어, 빨리 다시 가자 레츠고"
드위는 아주 스파르타 선생님... 바로 패들을 시켜서 얼떨결에 두 번째 라인업에 도착했다.
드위는 약속대로 타고 나올 때마다 옆에 있어줬다. 바다에서 가이드 역할을 아주 잘해줬지만,
패들을 해서 라인업을 나간 것도 나, 테이크 오프 해서 타고 나간 것도 결국 나였다.
처음으로 무서워서가 아니라 체력이 떨어져서 라인업에서 나왔다. 그것도 퇴근 파도를 타고
무언가 해 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 성취감을 느꼈는지도 기억이 안 났는데 오랜만에 맛본 성취감은 너무나도 짜릿했고,
무서움을 극복한 나 자신이 너무나 대견했다. 사람들이 결국 넌 해낼 줄 알았다고 칭찬해줬는데,
사실 나는 내가 못할 줄 알았지, 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을 못했다.
내가 해 낼 수 없을 거라는 생각, 그게 나의 두려움의 원천이었던 것 같다.
"나는 저 파도를 뚫고 라인업에 나가지 못할 거야, 나가더라도 다시 해변으로 나오지 못할 거야"
내가 평가한 나의 능력은 그랬지만,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충분히 할 수 있어 보였던 것
그리고, 나는 나 자신은 못 믿었지만 프로페셔널한 인스트럭터는 믿었기에
조심스레 도전했고, 도전하고 나니 내가 할 수 있는 능력을 믿게 되었달까?
어렸을 때 나는 내가 봤던 주인공들처럼 엄청난 재능을 가진 사람인 줄 알았고,
새롭게 도전하는 모든 일에 내가 잘할 수 있을 것이라는 나 자신의 능력에 과대평가를 하곤 했다.
나 이거 완전 잘할 것 같은데? 준비도 없이 최소한의 지식도 없이 뛰어들었다.
당연히 나는 소설 속 만들어진 주인공이 아니기 때문에 대부분의 과대평가는 현실에 부딪혔고
어느 순간부터 기존의 경험에 빗대어 나의 능력을 과소평가하곤 했다.
잘하는 사람은 너무 많고, 나는 늦게 시작했고, 내가 주로 배웠던 건 이런 게 아니니까
나 자신에 대해 과소평가를 하면 생각보다 잘했을 때 만족감이 컸다.
그래 실망하는 것보다는 만족하는 게 더 좋으니까
어느 순간 나 자신에 대한 과소평가를 너무 하다 보니, 도전 자체를 못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던 것.
한국에 있을 때는 스스로 과소평가를 해도 크게 문제 될 일이 없었다.
도전할 일도 거의 없으니, 그리고 어느 정도 나의 능력치에 대한 적당한(?) 판단 기준이 있었다.
새로운 삶에서 새로운 분야에 도전을 하다 보니, 그제야 명확하게 보였다.
나는 안전 지향주의에 도전과 실패를 두려워하고 내 능력에 대한 믿음을 너무 과소평가하고 있다는 것.
나 자신을 다시 직시하고 나서 과거처럼 무조건적으로 나는 잘할 거야 라는 과대평가를 하지는 않지만
다행히 지금은 발리에서 적당히 과대평가와 과소평가를 하며 새로운 도전을 계속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