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몇 년 전 일입니다. 첫 책을 내고 들뜬 마음에 친구들이 있는 단톡방에 소식을 전했습니다. 누군가는 축하 인사를 건넸고 누구는 책을 사보겠다고 말했는데 한 친구의 말이 좀 뜻밖이었어요.
"아, 책 냈구나? 나도 동창 중에 작가 있는데. <0000>란 책 낸 사람이 내 중학교 동창이야."
"와, 그분 유명한 작가잖아? 나도 그 책 읽었는데 너무 좋더라."
"응, 그렇지? 아 근데 좀 그런가? 이제 출발한 네 앞에서 내가 유명 작가 인맥 있다고 자랑한 거 같나?"
좀 당황스러웠습니다. 인맥 자랑이라고 느끼지 않았고 거기에 위축되지도 않았는데 기죽은 것 같은 반응이라도 해줘야 하는 건가 잠깐 고민이 됐어요.
"자랑? 아니야, 그럴 수도 있지. 설혹 자랑이라 해도 그게 어때서."
"그래, 너도 나중에 유명 작가가 되면, 그때는 내가 자랑하고 다닐게."
유명 작가가 되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었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그렇다고 또 그게 너무 중요했던 건 아니었어요. 일단 특별한 경력이나 이렇다 할 성공 스토리도 없는 평범한 내가 원고지 800-900매의 원고를 완성하고, 투고의 관문을 뚫고 책을 내게 되었다는 사실에 스스로 감동하는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유명 작가가 되면 자랑할게'란 말을 듣는 순간, 뜨거운 용기에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머릿속에서 '치이익' 소리가 나며 감격이 식어 버렸습니다. 친구로서 유명 작가 여부보다는 출간에 이르기까지 겪은 어려움을 헤아리며 수고했다고 한 마디 해주는 게 먼저가 아닐까 생각했어요. 지금은 자랑스러울 일이 아니라는 이야기를 돌려서 말하는 건가 의아했습니다.
출간만으로 뿌듯했던 마음이 단번에 차게 식는 일은 그 뒤로도 종종 있었습니다. 얼굴도 모르는 많은 독자들은 리뷰나 댓글을 통해 뜨겁게 응원해 줬지만 정작 아는 사람들은 의외의 반응을 보이며 상처를 주기도 했습니다. 다짜고짜 판매지수를 물어보거나 '누가 그러는데 10만 부는 팔려야 작가래'라고 자기만의 작가론을 펼치며, 내가 자기 앞에서 행여 작가 행세라도 할까 봐 서둘러 기를 죽였습니다.
이미 오래전에 유명 작가 반열에 들어선 동창이 있어요. 신문 지면에 가끔 젊은이들의 멘토로 등장할 정도로 확고한 입지를 다졌습니다. 피라미드 꼭대기에서 품위와 연륜을 빛내며 자리를 지키고 있는 동창을 보면서 이상하게 부럽기보다 올라야 할 계단이 한참 더 남아있는 제 상황이 다행이라고 느껴졌습니다. 그녀는 올라갈 계단이 몇 개 안 남아 보였어요.
방탄소년단 노래 가사 중에 "가진 게 꿈밖에 없었다"는 문장이 있는데 중년의 나이에도 여전히 가진 게 꿈밖에 없는 제가 처량하기보다는 올라야 할 계단 개수가 많이 남아 그만큼 더 설렜습니다. 많은 계단 앞에서 숨 고르기를 하며 힘을 모을 때면 젊은이로 돌아간 듯, 패기가 차올라 충만해집니다.
출간을 하고 싶은데 시작도 하기 전에 "네가 무슨 출간이냐" 주변에서 타박하거나, 수명이 단축되었다 느껴질 정도로 공들여 원고를 쓰고 출간을 했건만 베스트셀러가 아니라고 인정을 못 받아서 서글픈 작가님들이 있다면 오래전 울랄라세션 리더였던 고 임윤택 님 말을 곱씹어 볼 것을 권합니다. 저도 자주 되새깁니다. 오디션 프로그램 특성상 한 무대 한 무대가 다 살 떨리는 경쟁의 장이었지만 임윤택 님은 "단 한 번도 다른 팀을 경쟁자로 생각한 적이 없다. 언제나 제일 큰 경쟁자는 나 자신이었다"고 했습니다.
글을 쓴다는 건 나라는 큰 산을 넘는 겁니다. 그만큼 고되지만 동시에 '나 글 쓰고 있노라', 어디 가서 확성기에 대고 소리 지르며 말하고 싶을 만큼 벅찬 순간도 자주 찾아옵니다.
10만 부가 팔리는 것보다 중요한 건 나도 몰랐던 진정한 나를, 글 쓰면서 비로소 만나는 겁니다. 글을 쓰다 보면 내 인생의 굴곡마저 의미 있게 편집되어 지나간 과거에 새로운 의미가 부여되고 그것이 또 다른 미래를 만드는 동력이 되어 줍니다. 젊은이로 돌아간 것처럼 마음에 생기가 돌고 꾸준한 글쓰기 덕에 인생이 무료해지지 않는다는 추가적인 보상도 받습니다. 박완서 작가님도 "작가가 된 덕분에 지루하지 않게 인생을 보냈다"고 말씀하셨지요.
유명 작가가 되면 그때 자랑하겠다고 말하는 친구는 어쩌면 진짜 유명 작가가 된들, 진심으로 축하해 줄 마음이 없는 사람일지 모릅니다. 지금 당장 축하하고 응원해 주는 사람들만 생각하면 됩니다. 최소한의 관심이나 호의도 없는, 행인보다 못한 사람들 말에 휘둘려서 오늘의 글쓰기를 주저할 이유는 없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