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고3이 되고 나서 감정이 널뜁니다. 하루는 당장 내일 시험 앞둔 사람처럼 공부 의지를 불태우다, 하루는 아무래도 늦은 것 같고 지금부터 해봐야 뭐하느냐고 울적해하다 눈물까지 보이네요. 주변 엄마들 말을 들어보니 우리 아이만 그런 건 아닌 것 같고, 성적이 좋은 아이도, 나쁜 아이도 모두 불안해하고 시험이 주는 압박감에 지치고 있는 듯합니다.
울상인 아이에게 말했어요. 엄마 때는 시험 점수도 모르고 지원해야 하는 '선지원 후시험' 제도였던 데다가, 지금처럼 전형이 다양하지도 않아 학력고사 하루로 12년 모든 노력이 결정되었다고. 그날 배가 아프거나 컨디션이 안 좋으면 그냥 망하는 거였다고 우스갯소리를 해줘도 아이 표정은 좀처럼 풀리지 않습니다. 말해놓고 보니 그때에 비하면 지금은 편하단 소리밖에 안 되네요. 위안이 되기는 어려웠겠습니다.
우리 때도 다 초조하고 무서웠어도 어떻게든 시험 봤고 그렇게 인생이 지나가는 거라는 말은, 이미 그 시간을 통과한 사람들이나 할 수 있는 말일 것입니다. 제가 학력고사 보던 그해에도 시험 당일 아침에 자살한 수험생이 있었어요. 시험이 주는 무게감에 얼마나 짓눌렸으면 그랬을까 싶어서 마음이 아픕니다. 아이 낳고 나니 출산의 고통을 잊어버리는 것처럼, 수험생 시절 불투명한 미래를 앞두고 덮쳤던 어마어마한 불안을 어른들은 쉽게 잊습니다. 그리고 아이들한테 우리 때도 다 마찬가지였다는 말을 위로라며 건네죠.
요즘 아이들이라고 해서 불안의 크기가 더 작을까요? 물질적으로 더 풍요해진 시대지만 그만큼 경쟁은 더 심화되었습니다. 정보가 많아진 만큼 박탈감도 더 자주 느끼게 되죠. 예전에는 그랜저만 부러워하면 됐는데 이젠 아우디, 벤츠, 람보르기니 등 부러워할 대상도 늘었으니, 선수들 입장에선 그만큼 넘어야 할 허들이 많아진 셈입니다. 모르면 되는데 정보가 넘쳐나는 인터넷 세상이니, 맘대로 모를 수도 없어요.
안 그래도 경쟁해야 할 종목도, 손에 넣어야 할 상품의 가짓수도, 올라가야 할 계단도 늘어서 힘든데 시중에 나온 자기계발서는 또 어떤가요. 끝끝내 일등이 되라는 메시지를 넘치게 쏟아냅니다. 그런 책은 말하죠. 계단 맨꼭대기에 올라서 온갖 사치품에 둘러싸여 사는 삶이 정답이라고요. 아니라고, 나는 그렇게까지 욕심이 없다고 해도, 더 욕망하라고 닦달하며 내 입에서 부자 되고 싶고, 일등하고 싶고, 독식하는 승자가 되고 싶다는 말이 나올 때까지 어깨를 잡고 흔들어대는 느낌이 듭니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아이들은 옆자리 친구도 경쟁자로 삼느라 마음 한 구석이 텅 빈 채 공부하는 기계가 되어야 합니다. 얼마 전 한 신임 교육감이 '현실 안주 교육을 바로잡겠다'고 당선 소감을 밝히던데 수험생 아이를 지켜본 입장에서는 이 아이들이 무엇에 안주한다는 건지 이해하기 어렵더군요.
아침 7시 반에 학교에 가서 밤 12시까지 학교와 학원, 스터디 카페에서 공부하는 아이들이 어떤 현실에 안주하고 있다는 건지, 얼마나 더 살 떨리는 경쟁을 해야 만족할 건지 알 수가 없네요. 종일 책상에만 앉았을 뿐 1분 1초를 아껴서 공부하지는 않는 게 불만이라면, 본인들은 학창 시절 내내 그렇게 살았는지, 그리고 그게 정녕 이 땅의 아이들에게 필요한 교육인지 묻고 싶어요.
아이가 발 딛고 있는 현실이 이런데 엄마까지 안달하면 아이는 더욱 견디기 어려울 것입니다. 건너서 아는 분이 아이가 중간고사를 너무 못 봐서 내신 등급이 떨어졌다며 엄마가 막 울고불고하시던데 솔직히 답답했습니다. 그 집 아이는 우는 엄마를 보며 울 수도 없었을 거예요. 제일 힘든 사람은 아이 본인일 텐데 부모가 감정적으로 동요하는 건 어른스럽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얼마나 안타까웠으면 그랬을까 일면 이해가 되기도 하지만, 냉정하게 보면 아이 인생과 자신의 인생이 분리되지 않은 미성숙한 부모 모습이 아닐까요.
입시를 위해 부모의 정보력과 재력이 중요해진 시대라고 미디어에서는 끝없이 말하지만, 입시 터널을 지나고 있는 부모로서 느끼는 바는, 결국 입시는 아이 몫이라는 겁니다. 안내나 조언은 해줄 수 있지만 선택은 아이가 해야 해요. 이게 왜곡되어 선택을 부모가 하고, 아이를 물가에 데려가는 정도가 아니라 물을 떠먹여 주면 반드시 탈이 나죠. 학과나 진로 선택을 두고 아이와 갈등하기 시작하면 출발선에 서기도 전에 지치고 긴 수험생활 내내 잡음이 끊이지 않습니다.
수험생 아이와 적정 거리를 유지하기 위해 제가 선택한 건 글쓰기였습니다. 이웃 언니가 아이 고3 때 CAD 학원을 다니길래 재취업이라도 하려고 그러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아이한테 쏟는 관심을 스스로 덜어내기 위해서였어요. 부모의 과도한 관심은 곧 욕망으로 이어지고, 이게 좋을 게 없는데 스스로 제어하기 어렵다고 느낀 거예요. 그래서 일부러 에너지를 딴 데 쏟았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수험생 자녀와 적정 거리를 두며 현명하게 대처한 덕분인지 몰라도 입시 결과도 나쁘지 않았고, 힘겨운 수험생 시기를 지나면서도 부모 자녀 관계가 손상되지 않았습니다.
아이들은 20년만 살고 말 존재가 아니죠. 이정모 교수의 <과학이 가르쳐 준 것들>에 보면 2010년대 태어난 사람은 물론, 현재 스무 살 전후 사람들도 사고만 당하지 않는다면 120살까지는 충분히 살게 될 거라고 합니다. 142살로 보는 연구자들도 있어요. 2017년 노벨 화학상은 세 분의 과학자들이 받았는데 그분들 나이가 77세, 75세, 72세였어요.
어쩌면 120살, 혹은 140살까지 살 우리 아이들에게 단기간 내 학습 결과가 인생의 전부인양 안달복달 하는 부모는 자녀에게 '독'이 될 거예요. 대학 입시에 낙방해 한두 해 다시 공부한다거나 기껏 들어간 대학을 그만두고 몇 해 다시 다른 공부를 한다거나, 우리 아이들한테는 큰 문제가 아닐 겁니다. 아이들의 시간은 우리와는 다르게 흐를 거니까요.
중요한 건 실패를 견디는 힘을 아이가 키우는 거고 부모는 기다리는 힘을 키우는 겁니다. 김영하 작가가 자기 인생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준 사람들은 결국 기다려준 사람들이라고 했잖아요. 저는 아무것도 안 하면서 이 기다림의 미학을 몸소 실천할 만큼 수양이 잘 된 사람이 아니라 글쓰기로 저를 다스리고 있어요. 글을 쓰다 보면 자녀를 향해 생기는 부모의 비뚤어진 욕망도 경계할 수 있고, 쓰기 위해 다양한 주제를 다룬 책을 읽으며 세상을 보는 시야도 넓힐 수 있거든요.
저희 아이들은 제가 학교 성적에 무심한 줄 압니다.
"엄마는 우리 공부에 별 관심이 없으니 내 인생은 내가 챙겨야 한다"고 둘다 입버릇처럼 말하거든요. 실제로 학교 선생님이나 주변인들도 저희 아이들이 상당히 능동적이라고 평가합니다. 사실 교육에 열성인 다른 부모처럼 점수 몇 점에 예민하게 굴지는 않지만 저라고 마냥 학업에 무관심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누가 보든 안 보든 매일 읽고 쓰는 일상의 루틴을 지키다 보니 상대적으로 아이들만 바라보고 있는 부모에 비해 간섭을 안 하게 되는 것 같아요.
제가 거리를 두는 만큼 아이들이 자기 인생을 스스로 챙기는 걸 보니 당장의 입시 결과와는 별개로 이 방법이 나쁘지 않아 보입니다. 건강한 독립이 육아의 최종목표라는 점을 상기하면 아이들과 제가 예행연습을 하는 거겠지요. 수험생 엄마가 되고서도 글쓰기란 동반자를 놓지 않는 이유. '기다림'을 실천하는 부모가 되기 위해 제가 선택한 전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