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롯이 좌절하고 싶습니다."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에서 찾은 작가와 부모의 공통점

by 은수
"오롯이 좌절하고 싶습니다.
좌절을 해야 한다면 저 혼자서 오롯이 좌절하고 싶습니다. 저는 어른이잖아요.
아버지가 매번 이렇게 제 삶에 끼어들어서 좌절까지도 대신 막아주는 거 싫습니다.
하지 마세요."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각본을 쓴 문지원 작가는 부사를 쓰는 데 탁월한 감각을 지닌 듯합니다.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 스티븐 킹은 '지옥으로 가는 길은 부사로 덮여 있다'고 말할 만큼 부사 쓰는 걸 극도로 꺼리고, 예비작가들에게도 글을 잘 쓰고 싶다면 부사를 함부로 쓰지 말라고 조언합니다. 하지만 드라마를 보면서 저 문장에 '오롯이'란 부사만큼 그 순간 주인공이 느낀 갈망을 잘 표현해 줄 단어가 또 있을까 생각이 들었어요. '오롯이' 대신에 '온전히', '혼자서', '철저하게' 등 다른 말을 넣어 봤지만 그 느낌이 안 살더군요.


'오롯이'란 단어 덕분에 인생의 실패와 좌절마저도 나의 것으로 끌어안고 가겠다는 주인공의 결연한 의지가 돋보였고, 자식의 시련을 지켜보는 일만큼 부모에게 고통스러운 일은 없지만 그것을 견뎌야 진정한 부모로 거듭난다는 진리를 다시 상기하게 됐습니다. 이제 곧 성년이 되는 아이를 둔, 조만간 20년 차 부모가 되는 입장에서 아이의 실패를 의연하게 지켜보는 것이야말로 '부모 되기의 최종 관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아이가 어릴 때는 어린 대로, 크면 큰 대로, 생애 주기에서 아이를 덮치는 난관을 보면 어떻게든 내가 다 해결해 주고 싶은 마음이 불쑥불쑥 올라옵니다. 하다 못해 놀이터에서 친구들이 안 놀아준다고 울상인 아이를 지켜보는 것도 애가 타지요. 군것질 거리라도 사 와서 주변 아이들에게 나눠주며 대신 친구를 만들어 주려고 노력하게 됩니다.


학령기에 들어서면 아이가 처하는 갈등 상황이 좀더 복잡해지고 부모가 어떻게 개입해야 할지 선뜻 판단이 안 되는 순간이 생기기 시작해요. 어릴 때 놀이터라는 좁은 반경에서는 부모가 쉽게 관여할 수 있었지만, 반장 선거에서 떨어졌다고 낙심하거나, 학교 과제를 제때 내지 못해서 혼났다고 울면서 오는 아이를 보면 무슨 말부터 해야 하는지, 아니 어디서부터 뭐가 잘못된 건지 아득한 기분이 듭니다. 훌쩍 지나고 보면, 크는 과정이었다는 걸 알게 되지만 그 시간을 현재로 지나는 부모들에게는 선배 부모들의 이 깨달음이 그다지 와닿지 않습니다.


둘째 때라고 모든 상황에 태연하고 능숙하게 대처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첫째를 키우며 과도한 간섭과 관심은 독이었다는 걸 알고 둘째는 초원에 풀어놓은 망아지처럼 맘껏 뛰어놀라고 다독이며 키웠습니다. 그런데 둘째가 고학년이 되었을 때 뒤늦게 찾아간 수학 학원에서 선행학습이 너무 안 되어서 못 받아주겠다는 원장 말에 충격을 받았어요. 다들 선행학습을 하면서 달리는데 나 혼자 너무 다른 세상에 산 건가, 첫째를 키우면서 지나친 선행학습이 좋은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는 걸 알았는데 또 혼란스러웠어요. 부모 노릇이 어려운 건 한번 했다고 반드시 그만큼 노련해지는 건 아니라는 데 있습니다. 몇 년 사이에 바뀐 세상 흐름을 내가 못 따라가는 건지 고민이 됐습니다.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의 한 장면

이제 겨우 초등학교 고학년인 아이를 세 시간씩 붙잡고 시키는 스파르타식 학원에 보내야 할지 잠깐 고민도 됐지만 아이 의사도 그렇고 저도 내키지 않아 아이 진도와 수준에 맞는 공부방에 보냈습니다. 처음에는 자기만 늦은 건가 조바심을 느꼈던 아이도, 점차 자기에게 맞는 속도로 따라가기 시작했어요. 토끼의 잰걸음으로 선행학습을 해서 저만치 앞선 아이들 틈바구니에서 거북이걸음으로 꾸준하게 공부하기를 몇 년, 얼마 전 기말고사를 마친 아이가 기쁨에 겨워 시험이 끝나자마자 전화를 했어요.


"엄마, 나 수학 96점이야! 잘했지? 애들 다 어려웠다고 했는데!"


아이의 목소리는 조금 떨리고 있었어요. 학교마다 편차는 있지만 중학교 수학 시험은 만만치 않아서 96점 받기가 쉽지 않습니다.


"사실 나 걱정했거든. 중학교에 들어온 이후로 다른 애들은 다들 고등학교 거 하는데 나만 너무 늦은 거 같았고, 작년에 첫 시험 망친 이후로 나는 수학을 못하는 아이인가 좌절도 했었어. 그리고 지난 중간고사는 진짜 열심히 했는데 실수도 많이 하고 또 점수가 별로라서, 나는 정말 안 되는 건가, 이번 기말고사도 이렇게 준비했는데 또 못 보면 어떡하지, 나 진짜 열심히 해서, 공부를 안 해서 못 봤다는 핑계를 댈 수도 없는데 어떡하지, 정말 두려웠어."


아이는 목이 메는지 잠시 숨을 가다듬었습니다. 그간 내색은 안 했지만 아이는 자신의 가능성을 두고 고민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노력했는데도 안 되는 상황이 올까 봐 무섭기도 했을 테고요. 사실 애썼는데도 결과가 좋지 않은 걸 감당할 자신이 없어서 어떤 이들은 일부러 노력을 덜어내기도 하잖아요. 그래야 핑곗거리가 생기니까요. 아이는 핑계 댈 수도 없을 만큼 자신은 열심히 했다고 자부했고, 저는 그 두려움을 느끼면서도 끝까지 최선을 다한 게 좋은 성적 자체보다 더 의미 있다고 생각합니다.


글을 쓸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롯이 좌절할 각오로 덤비지 않으면 금세 지칠 거예요. 매일 실패하는 기분이 들거든요. 나의 글쓰기는 왜 이토록 지지부진한지 답답함을 느끼는 건 당연하고요, 겨우겨우 글을 완성하고 투고해도 무명작가를 두 팔 벌려 환영하는 출판사는 없습니다.


스티븐 킹조차 편집자의 투고 거절 편지를 받으면 못에 끼워놨는데, 나중에는 그 못이 휘어질 정도로 많은 거절 편지가 꽂혔다고 하지요. <계속 쓰기: 나의 단어로>를 쓴 데니 샤피로 또한 간신히 첫 책을 냈지만 평점에서 별 하나를 준 독자에게 상처받기도 하고 출간 기념회를 열었더니 달랑 세 명이 와서 난감했던 일을 회고하기도 했습니다.


뉴욕타임스 선정 베스트셀러이자 '버락 오바마가 뽑은 올해의 책'으로 선정되기도 한 <하틀랜드>를 쓴 세라 스마시는 어떤가요. 생계에 쫓기며 절박한 일들 틈틈이 원고를 쓰는 인생에서 벗어나고자 무려 종신교수직을 사직하고 글을 쓰기 시작했지만 몇 개월 뒤 단 돈 10달러가 없어 체인 미용실조차 가지 못하고 거울 앞에서 우는 여자가 되어 버립니다. 친구들이 '너 같은 상황이었으면 난 자살했을 거야'라고 말할 만큼 좌절과 후회가 휘몰아치는 벼랑 끝에서 <하틀랜드>를 써서 '가난에 관한 가장 사려 깊고 정교한 증언자'로 자리매김합니다.


오롯이 실패해 보지 않으면 바닥을 치고 올라가는 희열도 느끼기 어려울 것입니다. 바닥을 치고 올라간다는 것이 꼭 대단한 성과나 업적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바닥을 치고 올라가는 감각을 익힌 사람은 인생이 던져놓는 어떤 과제도 크게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낭떠러지 밑으로 떨어져 본 사람보다 낭떠러지 위에서 내려다보는 사람이 느끼는 공포가 더 크기 마련이지요. 허공에 발을 내딛으며 발끝에서부터 몸을 타고 올라오는 공포를 두려워하지 않아야 '도약'이란 것도 가능합니다.


"이번에는 아주 긴 도약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생일대의 도약이었다. 나는 엉망으로 착지한 게 아니었다. 아직 착지하지 않았다"고 말한 세라 스마시처럼 말이죠. 그러고 보면 좋은 부모가 된다는 건 좋은 작가가 되는 것과 통하는 구석이 있습니다. 어쩌면 이 모든 게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한 길인지도 모르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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