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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수 Apr 10. 2024

졸업반 학생과 면접 보다-잠입 취준기 1

얼마 전 새로운 일에 도전장을 냈습니다. 제가 평소 관심을 가진 분야였고, 꼭 배워서 일해보고 싶었던 곳이어서 지원서를 냈어요. 지원서에 '작가 이력'을 밝힐까 고민하다 굳이 쓰지 않았어요.

사실 작가 이력을 빼 버리면 그다지 내세울 게 많이 없는 이력서라 고민이 됐지만, 업무에 직접적인 연관도 없어 보이고, 작년에도 '작가 계급장'을 떼고 합격한 후 일했던 경험이 저로서는 참 의미 있고 좋았거든요.


유명 작가도 아닌데 그게 무슨 계급장까지 되냐고 하실지 모르지만 중간중간 경력 공백이 많았던 저로서는 나를 설명해 주는 중요한 단서를 일부러 누락하는 게 쉬운 선택은 아닙니다. 어떻게든 합격하고 싶은 마음에 그냥 쓸까도 고민했지만 실질적으로 관련성이 없는 이력을 넣는 게 아무래도 내키지 않았습니다.


꽤 경쟁이 치열했던 것 같은데 서류 전형에 합격했다는 연락을 받고 면접을 보러 갔어요. 그런데 "다대다" 면접이라 당황스러웠어요. 여러 명이 함께 면접을 보는 건 생각보다 에너지가 많이 들거든요. 여럿이 면접을 보면 서로 자기를 '어필'하고자 좀 세게 말해서 경쟁적인 분위기가 됩니다. 다섯 명 중에 제일 먼저 자기소개와 지원동기를 말해야 했습니다.

제가 집을 나설 때 고등학생인 작은아이에게 말했었어요. 이 나이에도 면접은 여전히 떨리고, 문 앞에서 도망가고 싶다고. 역시나 면접관들 앞에서 나를 소개하려니, 그간 많은 청중 앞에서 강의했던 이력이 무색하게 또 덜덜 떨렸어요.


그런데 제 옆자리 지원자의 자기소개를 들으니 올해 막 대학을 졸업한 사람이더군요. 기분이 묘했어요. 긴 면접이 끝나고 나오는데 마음이 복잡했습니다. 이제 졸업한 처지라 역시나 다섯 명 중에 경력은 제일 부족했지만 차분하고 열정적인 느낌이 들어서, 같은 지원자라는 것도 잊고 뭔가 응원해 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어요. 저에게 몇 살 차이 나지 않는 큰아이가 있기 때문일까요?


빙 이미지 크리에이터로 생성한 이미지입니다

그날 공교롭게 큰아이와 대학로의 뮤지컬 <오즈>를 보러 갔어요. 주인공 젊은이가 기계를 수리하는 일을 하는데 반복적인 그 업무에서 이렇다 할 보람을 찾지 못해요. "누구나 할 수 있는, 그렇고 그런 일을" 매일매일 똑같이 해야 하는, 쓸쓸하고 초라한 자신의 젊음을 한탄하는 대사를 읊는데 다시 한번 옆자리에 있던 지원자가 떠올랐어요.


저도 그 나이 때 취업 준비하면서 힘들었거든요. 서류도, 면접도, 연달아 떨어지고 취업 준비생으로 집에 있다 보면 그렇게 울적했어요. 아침이면 시끌시끌 모두가 어딘가로 향하는 뒷모습을 보면서 그 바쁜 사람들 틈에 너무나 끼고 싶어서 눈물이 날 지경이었지요.


우여곡절 끝에 공공기관의 좋은 자리에 면접을 보고 온 날, 사람이 이렇게까지 간절해질 수 있다는 데 스스로 놀라움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정말로 합격하고 싶다. 합격 전화를 받고 나도 출근하고 싶다. 월요일이면 출근하기 싫다고 투덜거리고 싶고, 일이 많아서 힘들다고 속앓이도 하고 싶다. 주말이면 지쳐 쓰러져 늦잠 자는 직장인이 되고 싶다.

모두가 바쁘게 움직이는데 혼자 유폐된 것처럼 집에 있자니 눈치도 보이고 그렇게 서럽더라고요. 합격했다는 전화를 받았을 때 눈물이 났습니다.


'나도 그때 참 힘들고 외로웠는데... 혹시 내가 어떤 젊음의 기회를 뺏는 건 아닐까?'


어차피 저도 되기가 쉽지 않은 자리예요. 나이도 제일 많더군요. 한국 사회에서 나이가 '제일' 많은 건 대체로 좋지 않습니디. 모임의 '왕언니'가 된다는 건 늘 부담스러운 일이에요. 사석에서뿐 아니라 취업 시장에서는 말할 것도 없지요. 상사보다 나이가 많다는 건 불리한 조건이거든요.

그럼에도 졸업반 학생인 그 지원자가 경력이 너무 없어서 위축되는 듯하는 태도에 마음이 쓰였습니다. 그 나이 때 나처럼 절실한 취업 준비생은 아닐까, 그 심정을 헤아려 보게 되고요.


연극이 끝나고 큰아이한테 이런 마음을 솔직히 말했어요. 당연히 나도 그 자리에 합격하고 싶지만, 네 또래의 누군가와 경쟁을 벌이자니 이게 맞는 건가 고민이 되었다고요. 큰아이가 말하더군요.


"그렇지, 아마 그 사람은 취업이 안 되어서 힘들 거야. 그야말로 취업 준비생이지. 엄마도 그렇긴 한데, 그 사람에 비해 엄마가 가진 게 많다는 생각은 들어."

"가진 게 많나? 흠, 그렇긴 하지. 집도 있고, 차도 있고, 원하지 않는 이도 있겠지만... 여하튼 가정도 있지."


그러다 갑자기 결정적인 게 생각났어요.


"그런데 그 친구는 나에게 없는 중요한 게 있어."

"뭐?"

"젊음이 있잖아. 나에게는 이제 시간이 별로 없거든. 나처럼 여기 지원한 분이 있었는데 나이가 많으셔. 그래서인지 서류에서 안 되셨더라고. 지금도 시간은 계속 흐르고 있어. 언젠가는 나도 서류에서 안 될 거야. 하지만 그 친구는 여기에서 떨어져도 앞으로 나보다 기회가 많을 거잖아?"


갑자기 되묻는 저를 보며 아이가 조금 떨떠름한 표정을 짓습니다. 마음속으론 여전히 '엄마는 가진 게 많은데'라는 생각을 하는 걸까요? 엄마를 이해하지만 아무래도 비슷한 또래 누군가의 간절함이 더 와닿는 걸까요? 잠시 어색해진 우린 말없이 음료를 주문하고 기다렸습니다. 조금 어수선한 마음으로 돌아와서 작은아이에게도 이 이야기를 했더니, 고등학생인 아이는 간단히 답하네요.


"에이, 뭐 그런 생각을 해?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엄마도 붙고 싶잖아."


나이가 달라서 답이 다른 건지, F와 T의 차이인 건지, 확연히 다른 두 아이 반응에 잠시 웃음이 났습니다. 아무튼 결과는 조만간 발표가 납니다. 제가 붙기를 간절히 기도한다면 젊은 사람한테 양보할 줄 모르는 속 좁은 어른인 걸까요? 그가 붙기를 기도한다면 같은 경쟁자로서 대등하게 상대를 바라보지 않고 주제넘게 구는 걸까요?


딱히 결론을 못 내리겠습니다. 다만 자기소개서를 쓰고, 이력서를 작성하고, 면접 예상 질문을 뽑아서 달달 외우고 영상도 찍어 보면서 제가 다시 젊은이가 되는 기분은 들었어요. 어쩌면 붙는 것보다 이렇게 나이 들어서도 도전하는 제 자신을 격려해 주는 게 더 중요한 일일지 모르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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