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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수 Dec 18. 2024

맘카페 정치글 금지의 결과?


비상계엄의 공포가 밤을 뒤흔든 이튿날이었습니다.

80년대 대학을 다녔던 지인은 간밤의 소란으로, 그 시절 공포스러운 기억이 다 떠올라 밖에 한 걸음도 나가기 싫었다던데, 저는 반대였습니다. 평소라면 즐겼을 집안의 고요가 그날따라 무거운 적막처럼 느껴져 집에 있는 게 더 힘들었어요. 일부러 조금 북적이는 카페를 찾았습니다.


처음에는 괜찮았어요. 카페에 흐르는 오래전 가요도 지난밤 어수선한 마음을 적당히 풀어줬고, 가져간 책도 좋았습니다.

진은영 시인의 <나는 세계와 맞지 않지만>. 여러 나라 시인의 생애와 작품 해설을 곁들인 작가의 유려한 글을 따라가다 보면 삐져나오는 불안도 가라앉았습니다. 시중에 많이 나오는 "힐링" 류의 서적은 아니었지만, 히틀러의 집권이나 독재정권의 위협 앞에서 한 치의 타협도 없었던 예술인들의 이야기를 읽다 보면 덩달아 의연해지는 느낌마저 들었습니다.


<산띠아고에서의 마지막 왈츠>를 쓴 칠레 작가 아리엘 도르프만의 이야기를 읽을 때였을 거예요.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피노체트 장군 때문에 칠레 국민들은 말도 못 할 만큼 고통스러운 시간을 견뎌야 했지요. "놈들은 아들을 옆방에서 고문하고 있었소/ 놈들이 우리 여성 동지의 몸속에 쥐를 집어넣었단 말이오, 정말이오"를 읽는데, 갑자기 옆에서 행간을 깨고 들어오는 목소리가 있었어요.


"그러니까, 우리는 항상 감사해야 해요~!"


높은 도 음으로 내는 목소리.

바로 옆 테이블에 네 사람이 앉았는데 그중 한 명의 목소리가 소프라노처럼 높고, 작은 카페를 울릴 만큼 컸습니다. 포교 활동 중이신 것 같았어요.


빙 이미지 크리에이터로 생성한 이미지입니다


간밤의 소동 때문에 예민해진 상태가 아니었다면 크게 신경 쓰지 않았을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믿는 사람은 세상 일에 마음 쓰지 말고 오직 감사하고 기쁘게 살아야 한다',  '신문도, 방송도 객관적인 기사만 보고 자세히 볼 필요도 없다'고 강조하는 높은 음자리표 목소리가 거슬려서 책장이 잘 안 넘어갔어요.


마음 깊은 곳에서 그 사람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쏟아졌어요.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인간의 고통 앞에 중립은 없으"며, "정치야말로 다른 사람에게 베풀 수 있는 가장 큰 자선"이라고 했다고, 이 비상계엄이 선포된 와중에도 세상 일에 무신경하게 살라는 게 당신네 종교의 가르침이냐고 따지고 싶었습니다.


우리가 누리는 평범한 일상이 그냥 주어진 것인 줄 아냐고, 지난밤에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날 뻔했는 줄 아느냐고,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화가 났습니다.


애먼 사람한테 역정을 낼까 스스로 무서워 책을 덮고 온라인 커뮤니티를 들여다봤습니다. 그런데 더 기분이 나빠져 버렸어요.

어떤 온라인 카페는 이 와중에도 "정치글 금지"를 내세워 계엄 관련 게시물이 올라오는 즉시 삭제하고 있더군요. 누군가 항의했습니다.


국가의 수장이 국민에게 총을 겨눈 엄청난 사건이 있었는데, 그런데도 우리는 엊그제 본 드라마 이야기나 하고, 무슨 옷을 살까, 여행 숙소는 어디가 좋을까, 학원은 대치동으로 보낼까, 그런 이야기만 해야 하냐고 항의했지만 그 글조차 삭제되었습니다.


그렇게 계엄 관련 글들이 사라지니 누군가 말했던 것처럼 정말로 연예인 이야기, 학원 문의, 잘난척하는 동창 험담 등으로 게시판이 채워졌습니다. 기괴했어요. 정치글 금지의 결과가 이런 건가 싶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내 아이 좋은 대학 보낼지 묻는 글은 허용하지만 교육정책의 문제를 언급하면 정치글이라고 삭제.

어떻게 하면 내 집 마련을 할지 방법을 묻는 글은 허용하지만 부동산 정책의 모순을 지적하면 정치글이라고 삭제.

초등생을 방과 후에 대체 어느 기관에 맡겨야 할지 고민하는 워킹맘의 글은 허용하지만, 정부 돌봄정책의 허점을 비판하면 역시 정치글이라고 삭제.


새는 오른쪽과 왼쪽 양 날개로 날고, 자동차에는 속력을 내는 엑셀이 있지만 멈추게 하는 브레이크도 있으며, 엘리베이터에도 닫힘 버튼과 열림 버튼이 모두 있습니다.


그러나 온라인 카페는 오직 한 방향만 허용합니다. 우린 유순하지만 깊은 생각은 할 수 없는 산토끼들처럼, 몽둥이 든 사람이 토끼몰이식으로 몰아가면 몰아가는 대로, 그렇게 생각도 하지 말고, 따지지도 말고 삼시 세끼 먹는 데만, 하루하루 사는 데만 신경써야 하며 이 범위를 벗어나는 질문은 누가 하든 밀쳐내야 합니다.


여러 맘카페의 흥망성쇠를 20여 년간 지켜본 입장에서는 이렇게 변해버린 맘카페가 낯설고 안타깝습니다. 한때 맘카페를 비롯한 온라인 커뮤니티는 기성 언론이 외면하는 소수자와 약자의 목소리가 활발하게 재생산되는 곳이었습니다.

사회의 이면을 비추는 작은 플래시였어요. 정치글 금지라는 검은 셀로판을 붙여 버리니 어둑어둑해지고 여론을 호도하는 가짜뉴스가 더욱 기승을 부리는 것 같습니다.


잠깐 생각에 잠겼다 눈을 들어보니 어느새 네 사람이 있던 자리는 비었습니다. 어디로 간 걸까. 한 번쯤은 어제의 사태에 대해서 생각은 해볼까요? 여전히 객관성이나 중립성이라는 허울에 갇혀 있을까요?


엄혹한 80년대를 지나온 누군가 그랬습니다. 똑바른 세상을 삐딱하게 보는 게 아니라, 삐딱한 세상을 똑바로 보고 있는 거라고.

삐딱한 세상을 삐딱하다 말하는 모든 목소리에 '정치글'이라는 프레임을 씌워 재갈을 물린 온라인 세상. 어쩌면 우리 사회 민주주의가 큰 위기를 겪게 된 데에는 이런 배경도 있는 것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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