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마흔 번째 생일>이란 동화책이 있다. 마흔 번째 생일을 맞은 엄마의 자아 찾기란 점에서 ‘82년생 김지영’의 아동용 버전 같은 느낌이 좀 든다. 미술학도였던 가영이 엄마는 마흔 번째 생일을 맞아 출산과 육아로 단절되었던 자신의 꿈을 다시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는데 남편은 자신의 어머니 병시중에 소홀해진 부인을 용납하지 못하고 분노한다. (동화는 열세살 가영이의 시선에서 서술된다. 할머니 병시중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이 집에 있을 자격도 없다고 엄마에게 으름장을 놓는 아빠가, 정작 자기 여가 시간은 살뜰히 챙기는 걸 보고 가영이는 의아해한다.)
한편 학교에서 가영이에게 닥친 갈등 상황은 축구 시합 출전을 둘러싼 주변인들의 반대다. 가영이는 축구 실력이 뛰어나 교내 축구팀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왔지만, 상대편 학교에서 여자가 낀 팀 하고는 시합을 못하겠다고 하자 심적으로 갈등하게 된다. 선생님을 비롯해 많은 이들이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면서까지 출전을 고집해야겠냐고 가영이를 나무란다. 엄마 또한 시어머니가 아픈 와중에 뒤늦게 무슨 화가를 하겠다고 수선을 피우냐는, 여러 사람들의 비난에 부딪힌다. 엄마와 가영이의 갈등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가영이는 점차 엄마를 이해하게 된다.
초등학교 고학년쯤 되는 아이들과 이 책을 읽고 토론하다 보면 아이들보다 내가 더 몰입한다. 그리고 한 명 한 명의 의견에 귀를 쫑긋 세우게 된다. 재미있는 건 성별을 나눠 의견을 취합한 것도 아닌데 어린 나이임에도 자연스레 의견이 갈리는 광경이다. 여학생들은 보통 자신의 부모에 대한 돌봄 노동을 전적으로 배우자에게 맡겨 버리는 아버지에게 분개한다. 그에 반해 남학생들은 작품 속 아빠 엄마에 대한 판단을 보류하거나 ‘어쨌거나 가정 내 맡은 역할에 충실해야 한다’는 원론적인 주장을 펼치는 경우가 많다. 그중에서 특히 기억에 남았던 말은 주인공 소녀와 할머니에 대한 한 남학생의 평가였다.
“가영이는 억센 애 같아요. 그리고 가영이 할머니는 억척스럽고요.”
‘억세다’나 ‘억척스럽다’는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언중이 자연스레 여자에게 주로 쓰고 있다. ‘남자애가 참 억세요’나 ‘그 아저씨 억척스럽게 살았어’ 같은 문장은 어딘지 부자연스럽다. ‘억세다’나 ‘억척스럽다’의 뜻은 겹치는 부분이 있지만 보통 ‘억세다’로 수식되는 여자는, 화자에게 그다지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 인물은 아닐 가능성이 높다. 그에 반해 ‘억척스럽다’는 그래도 생활력이 강하다는 뉘앙스를 포함하고 있어서 화자가 그 수식어로 표현하는 인물에 대해 호의적인 감정일 때가 더 많은 것 같다.
자신의 꿈인 축구 선수가 되기 위해 편견과 맞서는 가영이는 ‘억세고’, 돈 벌어 자식들을 공부시킨 가영이 할머니는 ‘억척스럽다’. 초등 아이의 스쳐가는 문장에서 그 아이에게 직간접으로 스며든, 성별을 둘러싼 고정관념과 편견을 엿보았다고 하면 너무 넘겨짚는 걸까.
며칠 전에 시부모님이 다녀가셨다. 평생을 남편과 자식들만 바라보며 사신 시어머니는 뭐 그다지 큰돈을 벌고 있는 것 같지도 않은 ‘바깥일’에 내가 많은 시간을 쓰는 걸 내심 못 마땅해하신다. 신혼 때는 ‘남편 내조를 잘 하는 게 너를 위한 길이다’고 자주 훈수하셨지만 며느리가 중년의 나이쯤 되니 그때만큼 대놓고 말씀은 안 하신다. 하지만 이번에도 은근히 남편을 잘 챙기는지 매의 눈으로 살펴보시는 느낌이 들어 여간 거북한 게 아니었다. 가시방석 같은 만남이 끝난 후 남편에게 말했다.
“어머니는 참 뭘 모르시네. 내가 남편한테 얹혀살려고 결혼했다고 생각하시나? 당신도 알겠지만 내 한 몸 충분히 건사할 수 있었어. 난 당신과 결혼해서 직장도 그만두고 커리어도 단절된 경우잖아. 그 뒤에 몇 번 기회가 있었지만 연고지도 아닌 곳에서 애 둘을 맡길 데도 없으니 일을 본격적으로 다시 하기 힘들었지. 오히려 나를 희생해 가며 가정을 돌보는 중인데 자꾸 ‘남편이 돈 벌어야 너도 먹고 살지’, 라는 식으로 말씀하시면서 이런 저런 주문사항을 늘어놓으시는 거, 듣기 참 불편하고 힘들어.”
“부모님 세대는 많이들 그렇게 사셨으니까. 아무래도 자기가 살아온 방식과 견줘서 말씀하시는 거지. 나이 든 분들을 바꾸기는 어려우니 우리가 그 세대를 이해해야지.”
그 말을 하는 남편은 어딘지 뒤처진 노인 세대를 이해하는 통 큰 젊은이 같고(이제 젊은이도 아니지만) 난 세대 간 격차도 이해 못하는 속 좁은 어른 같았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개별적인 갈등을 그 자체로 포착하지 않고 집단 간의 갈등으로 치환해서 ‘말하는’ 건 주로 직접적인 피해 당사자(?)가 아닌 경우에 많이 보이는 대화 방식이란 생각이 들었다. 고통은 철저히 개인적인 건데 대상을 ‘통칭’해서 말해 버리는 순간, 그 고통이 갖고 있는 개별성을 간과하게 된다.
“저기, 내가 정정해 줄게. 지금 이 순간 힘든 건 나고, 나를 힘들게 하는 건 당신 부모님이야. 당신은 부모님 ‘세대’를 이해하라고 하면서 나한테 무슨 시대적인 소명이라도 부여하는 것처럼 말하는데 그건 그저 당신이 내 고통을 가리기 위해 동원한 알록달록한 포장지 같은 거야.
지금 주목해야 하는 건 나와 당신, 그리고 당신 부모님이야. 이 개인들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문제에 ‘세대’란 단어를 끌고 들어오지 마. 우리 지금 논문 쓰려는 거 아니잖아. 그리고 부모님 세대라고 해서 그 삶이 천편일률적으로 똑같지도 않고 생각보다 다양해. 모든 부모님이 당신 부모님처럼 자식만 바라보고 사는 것도 아니고, 모든 부모님이 며느리에게 고압적인 것도 아니거든. 세대차 운운하기 이전에 당신은 자신을 낳고 키워준 고마운 부모님이니까 어떤 논리도 필요 없이 그냥 다 이해되는 거야. 당신만 어르신들의 마음을 헤아리는 속 깊은 어른이고 난 바로 전 세대도 이해 못하는 철부지라서가 아니고. 당신은 이 상황이 불편한 당사자가 아니기에 고통을 뭉뚱그리고 대상화해서 말하고 있는 것뿐이야.”
억세다와 억척스럽다에서 출발한 이야기가 많이도 왔다. 우리를 둘러싼 언어에 스며든 편견, 거꾸로 우리를 제대로 표현하기 힘든 언어 습관들. 우리에게 필요한 건 논리가 아니라 편견 없이 고통과 갈등을 정확히 포착하는 언어 습관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