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정부가 약속했던 것들은 전부 형식적 이행에 지나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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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상애료터와 제4상애료터를 비교해 본 결과, 두 기숙사는 위치한 마을 이름과 조선인 노동자 수만 다를 뿐, 문구는 완전히 동일했다. 조선인 노동자들에 대해 더는 할 말이 없었던 걸까? 남아 있는 기록이 적지 않은데도, 왜 안내문에는 그들의 존재가 이렇게 공허하게 처리되어 있을까. 지도는 거꾸로 실려있고, 찾아가는 길에는 이정표 하나 없었다. 겨우 도착한 자리에는 복사해 붙인 듯한 설명판 한 장이 전부. 사도시에 직접 문의해 보았다.
사도시청 담당자님께
지난번 사도섬을 관광하던 중, 사도금산 관련 안내판에 몇 가지 오류가 있는 것을 발견하여 이렇게 연락드립니다. 구체적으로는 공동취사장터, 제1상애료터, 제3상애료터, 제4상애료터에 관한 안내판입니다.
먼저 공동취사장터 안내판의 경우, 설치된 위치를 기준으로 보면 지도가 거꾸로 인쇄된 것처럼 보였습니다. 지도상에서 ‘왼쪽’으로 표시된 방향이 실제 현장에서는 ‘오른쪽’이 되어 있었고, 그 결과 안내에 따라 이동했을 때 제1·제3·제4상애료터에는 도착할 수 없었습니다. 또한 이들 장소는 매우 찾기 어렵고, 현장으로 가는 이정표도 설치되어 있지 않아, 공동취사장터의 경우에는 구글지도를 이용해 가까스로 찾을 수 있었지만, 다른 상애료터들은 발견하기가 매우 어려웠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관광객 입장에서 매우 혼란스럽고, 잘못된 안내로 인해 불편을 초래할 우려가 있습니다. 지도가 거꾸로 인쇄된 경위는 알 수 없지만, 부디 빠른 시일 내에 확인해 주시고, 가능하다면 수정도 검토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상입니다.
확인과 조치 부탁드립니다.
그러자 다음과 같은 답변이 돌아왔다.
이번에는 바쁘신 와중에도 사도시 홈페이지로 문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또한, 저희 시의 답변이 늦어진 점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문의해 주신 공동취사장터, 제1상애료터, 제3상애료터, 제4상애료터의 안내판에 게재된 지도와 관련하여 확인하였습니다. 해당 안내판의 지도는 아이카와향토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패널과 연동된 형태로 보이도록 하기 위해, 박물관에서 사용 중인 지도를 바탕으로 제작된 것입니다. 이 때문에 설치 장소에 따라 지도의 방향이 달라지게 된 부분이 있으며, 그에 대한 대응으로 지도 내에 방위 표시(동서남북 표기)를 넣어 처리하였습니다.
불편을 끼쳐드려 죄송하지만, 부디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지도가 뒤집혀있는 건 맞지만, 아이카와 향토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패널과 연동된 형태로 보이도록 하기 위해 그러한 것이며, 방위 표시를 넣었으니 문제없다는 답변이었다.
그러나 솔직히 말해, 이 답변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현위치(現在地, You are here)가 표시된 지도 위에 방위가 있어도, 과연 어떤 관광객이
“방위가 있으니 왼쪽이 동쪽이겠구나, 지도는 거꾸로 봐야겠구나”
라고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까? 이 안내판과 안내지도는 정녕 누구를 위한 것인가? 아이카와향토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패널과의 통일성이 우선될 수 있는가? 조선인 노동자들의 흔적을 충분히 설명할 수 있는데도, 안내판에는 단순 복사 문구와 거꾸로 된 지도만 있을 뿐. 관광객을 위한 정보 제공과 역사적 기억의 보존이라는 두 가지 목적 사이에서, 이 안내판은 어느 쪽에도 충실하지 못한 상태다.
이곳을 찾아갈 이들을 위해 혹시 몰라 위치를 남긴다.
제3상애료터: 북위 38.03664°, 동경 138.25209°
제4상애료터: 북위 38.03578°, 동경 138.25134°
마지막으로 아이카와 향토 박물관을 찾았다. 이곳은 일본이 약속했던 상설 전시관이 있는 박물관이다. 조선인 노동자에 대한 전시는 D전시실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
조선인 노동자에 대한 전시는 사도광산의 기기공장에서처럼 관람객의 시야에서 가장 먼 곳에 있었다. D전시실은 아이카와 향토 박물관의 메인 전시와는 동 떨어져, 계단을 올라 복도를 지나야 닿을 수 있는 건물의 가장 깊은 구석에 자리하고 있었다. 또한 그렇게 도착한 D전시실 정면에는, '조선반도 출신자를 포함한 광산 노동자들의 삶'이 아닌 '사도광산의 노동과 복리후생' 전시가 있었다. 앞서 1편에서도 언급했듯, 마트 진열조차 무작위로 이뤄지지 않는다. 전시는 공간의 언어로 메시지를 전한다. 이러한 전시 배치는 결코 우연이 아니다. 나 역시 그들이 의도한 동선대로, '사도광산의 노동과 복리후생' 전시부터 먼저 관람해 보았다.
오오야마즈미 신사의 제례는 한동안 중단되어 있었으나, 메이지 시대에 들어 독일의 광산 축제를 본떠 다시 부활하였다. 이후 산차(山車, 장식 수레)와 민요 행진이 마을을 누비는 활기찬 ‘광산축제(鉱山まつり)’로 발전하였다. 이때, ‘야와라기(やわらぎ)’ 또한 함께 부활하였다.
광산에서 작업 중 부상을 입거나, 규폐증이나 안질 등에 걸린 사람을 치료하기 위해 사도광산병원이 세워졌다. 노동자는 업무상 질병이나 부상일 경우, 무료로 진료를 받을 수 있었다.
사도광산에서는 노동자와 그 가족이 즐길 수 있는 오락과 다양한 행사(催し)가 열렸다. 엄격한 노동의 틈틈이, 노동자와 가족이 즐길 수 있는 여가활동이 풍부하게 마련되어 있었다. 경영이 미쓰비시합자회사로 이관된 뒤에는 노동자들을 위한 클럽이 세워져, 여러 가지 행사나 취미 활동이 진행되었다. 또한 매년 광산 전체가 함께하는 ‘광산축제(鉱山祭り)’가 성대하게 열렸으며, 그 밖에도 영화, 연극, 연예대회, 운동회, 수영대회 등이 개최되었다.
이 전시는 열악했던 당시 노동 환경, 특히 조선인 노동자에게만 특별히 더 열악했던 당시 노동 환경을 조금이나마 상쇄시켜보고자 하는 부단한 미화의 노력처럼 보였다. 복리후생으로 포장하여 불편한 기억은 전시장에서 가장 깊숙한 곳으로 밀어 넣었다. 고립무원의 사도섬에서 부상당하고, 죽어간 조선인 노동자들은 여전히 관람객의 시선으로부터 교묘히 멀리 떨어진 자리에 있는 것이다.
2023년 5월 7일, 서울
“저 역시, 당시 열악한 환경 속에서 많은 분들이 매우 고통스럽고, 또한 슬픈 경험을 하셨다는 점에 마음이 아픕니다. 한일 간에는 여러 역사와 경위가 있습니다만, 어려운 시기를 극복해 온 선인들의 노력을 이어받아 미래를 향해 윤 대통령을 비롯한 한국 측과 협력해 나가는 것이 일본 총리로서의 제 책무라고 생각합니다.”
많은 분들이 매우 고통스럽고, 또한 슬픈 경험을 하셨다는 점에 마음이 아프다고 발언했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해당 문장 주어는 조선인 노동자가 아니다.
조선인 노동자들이 처했던 가혹한 노동환경을 기리는 새로운 전시물 설치. 이것이 일본이 한국에 약속한 내용 중 하나였다. 물론 조선인 노동자들이 더 위험한 작업을 맡았다는 기록은 명시되어 있었지만, 전시의 전체적인 초점은 ‘조선인 노동자가 있었다’는 사실 자체에 맞춰져 있었다. 예를 들어, ‘담배 배급대장’에 조선인 노동자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으니 조선인 노동자가 있었다, 특별고등경찰 월간 보고서에 조선인 관련 사건이 기록되어 있으니 조선인 노동자가 있었다, 조선인들의 취급 방법, 일본어 교육, 위생 교육 등과 관련된 사료가 있으니 조선인 노동자가 있었다―전시 내용은 대체로 이런 식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앞서 사도광산 내 기기공장, 상애료터 등에서도 살펴보았듯이 일본은 조선인 노동자가 ‘존재했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하지만 그 이상, 즉 조선인 노동자들이 겪은 구체적 고통과 불평등, 혹은 노동 환경의 현실을 드러내는 것은 넘지 말라는 보이지 않는 선이 분명히 존재했다.
니가타현 사도군에 위치한 미쓰비시 사도 광산에서 일하던 조선인 노동자 중, 김성주 외 2명이 내부 지주 설치 작업장에서 작업 중 실수로 암반 면에서 미끄러져 두개골 분쇄 등으로 사망하였다.
특히 위의 특별고등경찰 월간 보고서 1942년 1월호와 같이 가혹한 노동환경을 알리는 사료가 존재하긴 하였으나, 문제는 영어번역이 없어 외국인 관광객은 내용을 알아차리기 힘들다는 점에 있었다. 아래 전시물에서도 조선인 노동자들을 '비위생적・비도덕적 존재'로 간주하고 교화 대상으로 취급하며, '협화회' 등의 조직을 통해 생활 전반을 통제하고 감시했던 내용이 나타나있으나 영어번역이 존재하지 않는다.
반도인(조선인) 특유의 불결한 악습을 교정하기 위해 각종 시설의 완비를 도모함은 물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위생 강연회 및 청소 작업을 실시하여 위생 관념의 보급에 힘썼다.
조선인은 어떤 작업에 적합한가에 대한 견해
조선인들은 타고나길 우둔하고 게으르며(性來钝重), 기술적 재능이 매우 낮고, 또한 연구심이 전혀 없으므로, 주로 육체노동, 즉 갱내운반(坑內運搬)등에 적합하다.
조선인 노동자 도망의 원인은 첫째 자유방종(自由放縦)하고 떠돌기 쉬운 성격이기 때문, 둘째 부화뇌동하는 성향으로 계획적으로 도주하는 자에 의해 쉽게 휘말리기 때문, 셋째 일본으로 오기 전부터 이미 도망을 계획했기 때문이다.
반도인(조선인) 특유의 악습이 여전히 남아 있어 시정이 필요하다.
"강제노동이 없었다"라고 주장하기에는 감시・교화・민족차별・탈출 통제 등에 관한 구체적인 기록이 남아있었다. 그러나 앞서 이야기했듯 이러한 사료의 영어 번역은 찾아볼 수 없었다.
일본어와 영어가 병기된 패널 형태의 전시물은 단 세 개뿐이었다. 그중 하나는 ‘조선반도 출신자를 포함한 노동자들의 과중한 노동 환경’, 또 하나는 ‘조선반도 출신자를 포함한 노동자들의 출신지’, 마지막 하나는 ‘아이카와 광산 노동자들의 생활’이라는 제목이었다. 앞서 언급했듯, 과연 이 전시 공간이 조선인 노동자를 위한 전시인지 의문이 들 수밖에 없는 구성이다. 조선인 노동자는 단순히 ‘노동자’라는 큰 범주의 일부로 축소되어 있었고, 전시는 마치 모든 노동자가 비슷한 수준의 고된 환경에 처해 있었다는 인상을 은연중에 전달하려 하고 있었다. 게다가 전시물의 내용 또한 부실했다. 세 개의 전시물 중 그나마 실질적으로 과도한 노동 환경을 다루고 있는 ‘조선반도 출신자를 포함한 노동자들의 과중한 노동 환경’ 전시물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사도광산에서 일한 조선반도 출신 노동자들은 암석 파쇄, 지주 설치, 자재 운반 등 위험한 갱내 작업에 종사한 비율이 높았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노동 조건을 둘러싸고 벌어진 노동 분쟁과 사망사고에 관한 기록도 남아 있다. (특별고등경찰 월간 보고서 1942년 1월호 포함)
・한 기록에 따르면, 조선반도 출신 노동자의 월평균 근로일수는 28일이었다.
도표를 통해 직무별 조선인과 일본인의 수를 비교해 놓았지만, 그것만으로는 당시의 실태를 설명하기엔 부족했다.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사도광업소 조선인 관리에 대하여(1943년)」문서에는 조선인 노동자에 대한 노골적인 멸시와 차별이 여러 차례 언급되어 있었음에도, 이러한 내용은 영어로는 일절 제공되지 않는다. ‘도망 방지(逃亡防止)’라는 항목이 공식 문서에서 논의될 정도로 가혹했던 노동 환경을 고려한다면, 전시는 단순한 수치 비교에 그칠 것이 아니라 보다 구체적이고 진정성 있는 방식으로 재구성될 필요가 있다. 일본 정부와 사도시는 형식적인 ‘존재의 인정’에 머물지 않고, 실질적인 역사적 책임을 반영하는 후속 조치를 취해야 할 것이다.
에도 시대가 끝난 1868년 이후, 국내외에서 다양한 노동자들이 사도 광산에 와서 일했다. 전시 중 사도 광산에서 일한 조선반도 출신 노동자의 총수는 약 1,500명이었다고 기록한 문서가 있다.
노동자들의 출신지에 대해서는 주로 다이쇼기(1912~1926)의 문헌을 바탕으로 작성된 목록에 따르면, 상위 5위까지의 출신지와 인원은 나가노(184명), 니가타(165명), 사도(96명), 이시카와(71명), 도야마(52명)이며, 일본 본토 외 출신으로는 조선 출신이 21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특히 이해가 잘 가지 않았던 것은 위 내용이었다. 조선인 노동자는 대게 1940~1945년에 집중하여 사도섬에서 강제노동하였음에도 1912~1926년의 문헌을 바탕으로 그렇지 않아도 짧은 전시물의 내용 중 한 문단을 차지하고 있었다.
조선반도 출신 노동자들이 거주했던 기숙사에 관한 기록이 있다. 아이카와의 광산 노동자들의 생활을 설명하는 여러 문서들이 존재한다. 전후 아이카와의 한 담배 가게에서 발견된 「담배 배급 명부」에는 제1, 제3, 제4상애료에 거주하던 조선반도 출신 노동자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이는 이들에게 담배가 배급되었음을 보여준다. 1945년 6월 20일 자 기록에 따르면, 제3상애료에 거주하던 사람들 중 7명이 도주했고, 3명이 투옥되었다고 한다. (「담배 배급 명부」)또한, 광산 노동자들에게 식사를 제공하던 공동취사장 터도 남아 있다.
일본어로만 제공되는 핵심 정보, 관람객의 시야를 벗어난 전시 위치, 등재 구역 밖의 박물관, '복리후생'이라는 교묘한 프레임, 결정적인 사료의 영어 번역 누락, 그리고 의도를 의심케 하는 자료 구성(다이쇼 시대 노동자 통계 등)—은 개별적인 실수 또는 우연이 아니라, 하나의 일관된 전략을 가리키고 있다. 바로 조선인 강제동원의 특수성을 희석시키려는 의도이다. 일본의 속셈은 명확하다. 조선인 노동자를 단순히 '타지에서 온 일본인 노동자'의 부분집합으로 취급함으로써, '식민지배'라는 역사적 맥락을 제거하는 것. 이 논리 속에서 조선인 노동자는 단지 열악한 환경에서 일했던 수많은 노동자 중 하나가 되며, '강제성'이라는 핵심은 자연스럽게 증발한다. 결국 이는 '식민지 조선도 일본 제국의 일부였으니, 그곳에서 온 노동자들 역시 일본인이며, 따라서 강제성은 성립하지 않는다'는 기만적인 결론으로 이어진다. 강제성을 인정하는 순간 '국제법상 전쟁범죄와 인권침해'라는 국가 책임을 져야 하기에, 일본은 이토록 집요하게 진실을 축소하고 왜곡하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사도광산의 유네스코 등재는 끝이 아니라, 새로운 ‘기억’의 시작을 의미한다. 일본 정부는 앞으로 한국인 강제노동이 있었던 도치기현의 ‘아시오동산(足尾銅山)’까지 세계유산 등재를 추진할 가능성이 높으며, 이는 곧 사도광산에서 드러난 ‘역사 왜곡의 서사’가 다시 반복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따라서 우리 정부와 시민사회는 일본이 유네스코에 약속한 전시 원칙이 제대로 이행되는지를 지속적으로 감시하고, 약속이 위반될 경우 국제사회에 끊임없이 문제를 제기해야 한다. 일본이 집요하게 축소하고 왜곡하려는 진실을 바로잡아야 한다. 이는 감정적인 ‘반일’이 아니라, 역사적 사실과 국제적 약속에 기반한 정당한 요구이다. 또한 일본 정부에는, 진정한 미래지향적 관계는 부끄러운 과거를 교묘히 편집하는 데서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 직시하고 책임지는 자세에서 시작된다는 점을 명확하고 일관되게 전달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 자신은, 현장을 찾아가고, 기록하고, 질문을 던지는 일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 잊지 않으려는 개인들의 집요한 노력이 모일 때, 비로소 거대한 왜곡의 벽에 균열이 생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