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길동인가? 왜 강제노동을 강제노동이라고 부르지 못하나
‘강제노동’을 인정하는 것은 단순한 용어의 문제가 아니라, 일본이 식민 지배 시기 국가 차원의 반인도적 범죄를 인정하는 문제다. 일본에게는 이 용어를 피하는 것이 제국주의 과거와 관련된 법적·외교적 책임을 회피하는 수단이 된다.
1305 Shimoaikawa, Sado, Niigata 952-1501
〒952-1501 新潟県佐渡市下相川1305
https://maps.app.goo.gl/KYrnHZ5L1x68HLNS9?g_st=ipc
도쿄에서 신칸센으로 두 시간을 달려 니가타역에서 내렸다. 다시 버스로 니가타항으로 이동해 페리를 타고 두 시간 반. 조선인 강제 징용의 현장, 사도섬은 멀고도 고립된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이 먼 섬에서 조선인 약 1,500명이 노예처럼 강제로 노동에 동원되었다. 조선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더 힘들고. 더 위험한 작업에 내몰렸다. 그런 그들의 고통이 왜 잊혀야 하는가. 사도광산을 찾았다.
사실상 일본 최대의 금광이자 도쿠가와 가문의 금고 역할을 했던 사도광산은 2024년 7월 27일, 제46차 세계유산위원회에서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우리 정부는 오랫동안 사도광산의 세계유산 등재에 반대해 왔지만, 막판 협상을 거쳐 동의에 이르렀다. 그 이유는 일본 측이 광산의 전체 역사를 아우르고, 조선인 강제 동원과 관련된 전시물을 마련하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이라고 알려져있다. 그러나 전시물 설치를 약속했음에도 불구하고 ‘강제성’을 나타내는 표현 유무로 논란이 이어지고 있다. 등재 당시 일본 내에서는 한일 양국 정부가 사전에 ‘강제노동’이라는 용어를 쓰지 않기로 합의했다는 보도가 있었다고 한다.
https://www.yomiuri.co.jp/world/20240726-OYT1T50096/
2024년 7월 26일 자의 요미우리 신문 기사에서, 한국 정부가 일본 니가타현 사도섬의 ‘사도광산’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에 반대하지 않기로 결정했으며 이는 일본이 광산의 전체 역사를 반영하고, 관련 전시를 포함한 실질적 조치를 약속했기 때문이라는 보도가 있었다. 또한 유네스코 자문기구인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ICOMOS, 이코모스)가 애초 일본이 신청했던 에도시대까지의 역사뿐만 아니라 근세를 포함한 채굴이 이루어진 모든 시기의 역사와 맥락을 전시·설명할 것을 일본에 요구했다는 내용이 언급됐다.
https://www.yomiuri.co.jp/politics/20240728-OYT1T50009/
또한 위의 기사는, 한일 양국이 사전에 ‘강제노동’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기로 합의했다고 보도했다. 한국은 한반도 출신자들이 강제 동원된 피해 현장이라는 점을 강조하며 반발했지만, 일본이 비공식 협상을 통해 ‘강제노동’이라는 표현을 배제하는 대신 현지 시설에 상설 전시를 설치하겠다고 제안했다는 보도였다. 또한 일본 측은 전시를 통해 약 1,500명의 한반도 출신 노동자가 있었다는 사실과 열악한 노동 환경을 소개하겠다는 방안을 내놓았고, 한국이 최종적으로 이를 수용했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이다. 군함도 때와는 상황이 확연히 달랐기 때문. 사도광산의 경우, 우리나라는 21개 위원국 중 하나였고, 세계유산위원회 21개 위원국의 전원 동의 방식으로 최종 결정이 되는 상황이었다. 즉 대한민국 정부의 동의가 없다면 등재는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 우리가 매우 유리하게 협상할 수 있었음에도 왜 '강제성'을 인정하는 표현을 두고 합의를 했을까. 일본이 강제성에 집착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뒤에서 살펴보기로 한다. 우선은 일본이 약속했던 실제 상설 전시가 어떤 수준에서 이뤄지고 있는지, 그리고 1,500명의 노동자와 그들이 겪은 열악한 노동 환경이 어떤 방식으로 다뤄지고 있는지를, 직접 현장을 찾아 확인해 보기로 했다.
페리를 기다리며 페리 터미널 안에 위치한 기념품샵을 둘러보았다. 사도광산을 활용한 관광상품들을 심심찮게 찾을 수 있었다. 이곳을 찾는 어느 누가 이곳이 가혹한 노역과 착취가 자행된 뼈아픈 역사 현장이라고 생각할까. 이곳 사도섬에 강제로 끌려와 흘린 피와 눈물의 역사를 지운다면, '아이러브사도'도 단순히 공허한 울림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페리에 탑승하여 조금 가다 보니 데이터가 터지지 않았다. 예기치 못하게 세상과 단절된 시간. 그 시간 동안 준비해 온 것들로 위의 피켓을 만들었다.
DON'T HIDE THE TRUTH ACKNOWLEDGE KOREAN FORCED LABOR
(진실을 숨기지 마라 한국인 강제 노동을 인정하라)
그렇게 무거운 마음으로 사도섬에 도착했다. 그러나 도쿄에서 사도섬까지 가는 데 하루를 꼬박 다 썼기에, 섬에 도착한 다음 날이 되어서야 겨우 사도광산을 둘러볼 수 있었다.
사도광산의 관람 동선은 에도 시대의 소다유갱(宗太夫坑)을 먼저 둘러본 뒤, 근대의 도유갱(道遊坑)으로 이어지도록 구성되어 있다. 일본이 자랑하고 전시하고자 하는 소다유갱에서는 당시 광산의 작업 환경과 노동자들의 생활상이 모형과 설명을 통해 생생하게 재현되어 있었지만, 정작 한국인 강제노동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도유갱은 그렇지 않았다. 그러나 이는 놀랄 만한 일은 아니었다. 일본은 애초에 사도광산을 세계유산으로 신청하면서, 채굴 역사를 ‘에도(江戸) 시대까지’로 한정하고 근대 시기를 의도적으로 제외하려고 했으니 말이다.
지하 수천 미터에서는 지하수가 마그마의 열을 받아 약 300°C의 고온·고압 상태(열수)로 존재합니다. 이 열수에 금, 은 등의 금속 성분이 오랜 시간 녹아들어 갑니다. 화산 활동으로 생긴 단층이나 암석 틈을 통해 열수가 분출하면, 금·은 성분이 냉각되어 침전된 것이 바로 금·은 광맥입니다.
도유갱 내부에는 위의 내용과 같이 금·은 광맥이 형성되는 과정, 금광석, 도유맥(道遊脈) 채굴 흔적 등이 설명된 안내판이 곳곳에 설치되어 있었지만, 그게 다였다.
더군다나 있어야 할 건 없는데, 없어야 할 것은 또 있었다. 주류숙성소가 바로 그것. 갱도는 연중 8~13℃로 일정하게 유지되고 빛이 차단되기 때문에 지주(地酒), 과일, 커피 등의 숙성 장소로 활용되며 상품으로도 판매된다는 적혀있었다. 완전히 관광지로 전락한 모습이었다.
그런데 무숙인(無宿人)에 대한 언급을 찾아볼 수 있었다. 무숙인이란 에도 중기에 에도·오사카 등지에서 배수 인부(水替人足)로 강제적으로 끌려온 사람들을 가리키는데, 일본어에는 '強制的に(강제적으로)'라는 문구가 들어가 있고 영어 안내에도 'captured and sent(붙잡혀 보내졌다)'라는 함의된 강제성이 보인다. 그렇다면 무숙인에 대한 언급 말고, 한국인에 대한 언급은 아예 없는 걸까?
갱도에서 나와 멀지 않은 곳에 기기공장이라는 곳이 있다. 그곳에서 한국인 노동자에 대한 언급을 찾아볼 수 있었다.
昭和十四年 労務動員計画で朝鮮人労働者の日本への募集始まる。
쇼와 14년(1939년) 노무동원계획에 따라 조선인 노동자의 일본에의 모집을 시작했다.
*'조선인 노동자의 일본에의 모집'이라는 표현에는 문제가 있다. 겉보기에는 단순히 ‘모집’했다는 중립적 표현처럼 보이지만, 역사적 맥락을 고려하면 강제동원과 차별적 착취가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은폐하거나 희석하는 효과를 낸다. 즉, ‘모집’이라는 단어 선택 자체가 강제성을 제거하는 전략적 언어 사용이다.
昭和二十年九月 敗戦により、 朝鮮人労働者が帰朝。
쇼와 20년(1945년) 9월 패전으로 조선인 노동자들이 귀국하였다.
강제동원 여부의 언급 및 내용을 떠나, 우선 주목해야 할 점은 세 가지다. 첫째, 해당 내용이 일본어로만 표기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사도광산의 근대사 연혁 중 한국인 노동자에 관한 언급은 단 두 줄에 불과하며, 그마저도 일본어로만 적혀 있어 외국인, 특히 한국인 방문객이 내용을 쉽게 인지하기 어렵다. 이러한 정보 비대칭은 단순한 언어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이는 특정 집단만을 위한 서술, 더 나아가 ‘누구를 위한 전시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게 만든다. 결국 이는 사도광산의 역사를 객관적으로 보여주기보다, 일본 내부의 시선으로 미화된 역사 내러티브를 유지하려는 시도로 읽힌다.
둘째, 서기(西暦)가 아닌 일본식 연호(年号)를 사용해 연대를 표기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쇼와’, ‘헤이세이’와 같은 연호 표기는 일본인에게는 익숙할지 모르나, 외국인 방문객에게는 시대를 가늠하기 어렵게 만든다. 실제 연도를 병기하지 않음으로써 근대 이후, 특히 식민지 시기와 전쟁기의 맥락을 흐리게 하는 효과를 낳는다. 즉, 연호의 선택 자체가 역사적 거리 두기이자, 불편한 과거를 은폐하는 또 하나의 장치로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세 번째로 주목할 점은, 해당 두 문장이 배치된 위치이다. 주력인 소다유갱 다음 순서인 도유갱 코스에 포함되어 있어 이미 관람객의 관심과 흥미가 떨어지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거니와, 해당 문장이 포함된 연혁은 기기공장으로 들어갔을 때, 입구 정면에서 완전히 벗어난 시야에 위치한 전시실에 자리하고 있다. 또한 어떻게 해당 전시실 안에 들어간다고 하더라도, 연혁은 다시 정면 시야에서 벗어난 등진 곳에 배치되어 있다. 이는 일본이 약속한 대로 마련한 전시 공간, 즉 아이카와 향토박물관에서도 마찬가지인데, 일부러 그렇게 배치한 것이 아니라면 설명이 어렵다. 식료품 마트에서 물건을 진열할 때 아무 생각 없이 배치하지 않듯, 전시관의 배치 역시 우연이 아니다. 아이카와 향토박물관에 대해서는 뒤에서 자세히 살펴보기로 한다.
출구에 위치한 기념품샵. 축 세계문화유산 등록 1주년 플래카드가 보였다. 이미 사도광산은 유네스코에 등재되었고, 잊혀가는 약자를 앞에 두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한 개인의 무력감은 커져만 간다. 사도광산을 둘러본 후에는 당시 강제노동을 하던 조선인들이 살았다는 기숙사터인 제1상애료터, 제3상애료터, 제4상애료터 및 공동취사장터를 둘러보기로 했다. 특히 이 중 제4상애료터는 2024년 11월 25일, 우리 정부가 별도 추도식을 가진 곳. 원래 참석하려고 했던 '사도광산 추도식'의 일본 대표 이쿠이나 아키코 정무관의 야스쿠니신사 참배 이력 문제와 강제성 표현 인정 문제 등으로 불참을 결정. 제4상애료터에서 별도로 추도식을 가지게 된 것이다.
https://imnews.imbc.com/news/2025/politics/article/6754891_36711.html
그리고 올해 역시 우리 정부는 추도식에 불참했다. 결과적으로 지난해와 같은 결정을 반복한 셈이다. 이번에도 일본 측의 입장은 변함이 없었다. 사도광산의 조선인 노동 동원에 대해 “합법적 식민 지배 아래 합법적 징용령에 따른 조치”였다는 것. 이는 일본의 기조 논리이기도 하다.
이 논리는 일본 정부가 한일 간 역사 문제를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는지를 여실히 드러낸다. 그러나 조선이 일본에 합병된 과정 자체가 무력과 불평등조약에 기반했다는 점에서, 그 아래에서 이루어진 모든 강제동원은 ‘합법적’이라 할 수 없다. 결국 일본이 ‘강제성’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이유는 명확한데, 강제성을 인정하는 순간, 이는 '합법적 식민 지배 하의 합법적 동원령에 따른 조치'가 아니라 '국제법상 전쟁범죄와 인권침해에 대한 국가책임 문제'로 이어지기 때문.
그렇기에 일본은 역사적 사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기보다, 서사적 전략을 택하고 있고, 사도광산을 비롯한 근대 산업유산에 대한 일본의 서술 방식은, 가해와 피해의 구도를 지우고 '근대화의 상징'이라는 프레임으로 전환하려는 일관된 경향을 보인다. 더 나아가 조선인이 강제로 노동했던 근대 산업유산은 군함도와 사도광산에 국한되지 않는다. 일본은 앞으로도 다른 산업유산의 세계유산 등재를 추진할 가능성이 높으며,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역사 서사 왜곡의 움직임에 대해 지속적인 관심과 대응을 기울여야 한다.
그러나 조선인 기숙사 터를 찾는 일은 쉽지 않았다. 구글맵에서 ‘사도광산 조선인 기숙사 터’, ‘상애료터’, ‘소아이료터(상애료의 일본어 발음)’ 등 다양한 키워드로 검색했지만 결과가 나오지 않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일본어로 ‘相愛寮跡(상애료터)’를 입력하자, 그제서야 ‘제1상애료터(第一相愛寮跡)’와 ‘상애료급식시설터(相愛寮給食施設跡)’ 두 곳이 검색되었다. 우선 ‘상애료급식시설터’부터 방문하기로 했다.
昭和13(1938)年以降、 佐渡鉱山では金の増産に向けて新たな施設の整備が進められ、 相川地区内に鉱山労働者のための住宅が多く建設されました。 相川大工町にあった共同炊事場は、 近隣の第一相愛寮、第三相愛寮、 第四相愛寮用の食事がつくられており、鉱山会社直営の農園からも食材を供給していたこ とがわかる記録が残っています。
From 1938 onward, new facilities were developed at the Sado Mines to expand gold production, and many accommodations for mine workers were constructed in the Aikawa area. The community kitchen, located in Aikawa-Daiku-machi, provided meals for mine workers who lived in nearby dormitories such as the First Souai Dormitory, the Third Souai Dormitory and the Fourth Souai Dormitory, and one record shows that foodstuffs were also supplied from the farms directly operated by the mining company.
1938년(쇼와 13년) 이후, 사도광산에서는 금 생산을 늘리기 위한 새로운 시설 정비가 진행되었고, 아이카와 지역 내에는 광산 노동자들을 위한 많은 주택이 건설되었습니다. 아이카와 다이쿠마치(相川大工町)에 있었던 공동취사장은 인근의 제1소아이료, 제3소아이료, 제4소아이료에 거주하는 노동자들의 식사를 준비하는 곳이었으며, 광산 회사 직영 농장에서 식재료가 공급되었다는 기록도 남아 있습니다.
안내판의 설명을 찬찬히 읽어보았다. 공동취사장터는 제1상애료, 제3상애료, 제4상애료에 거주한 노동자들의 식사를 준비하던 장소였다. 즉, 조선인 기숙사에 거주하던 노동자들을 위한 취사시설이었다. 기록에 따르면 제1상애료에는 조선인 185명, 제3상애료에는 157명, 제4상애료에는 124명이 살았다고 한다. 그러나 안내판의 설명 어디에도 이들이 ‘조선인 노동자’였다는 사실은 명시되어 있지 않았다. 단순한 누락일까, 아니면 의도된 생략일까.
게다가 안내판의 지도는 심지어 방향이 거꾸로였다. 지도상으로는 현 위치에서 왼쪽으로 가면 제1상애료터가, 오른쪽으로 가면 제3상애료터와 제4상애료터가 나올 것처럼 표시되어 있었지만, 실제로는 그 반대였다. 일본은 ‘안내판을 설치했다’는 형식적 약속 이행에만 머무를 뿐, 그 내용의 진정성과 정확성에는 책임을 지지 않고 있다. 이에 대해 필자는 직접 사도시에 문의를 보냈고, 그 결과는 뒤에서 다시 살펴보겠다.
相川新五郎町にあった第一相愛寮は、鉱山労働者 の単身者用の寄宿舎として利用され、戦時中、 この 寮に朝鮮半島出身の労働者が居住していたことがわ かる記録(昭和18年5月末時点で185人在籍) が残っています。戦後、佐渡鉱山の縮小に伴い、寄宿舎が取り壊さ れると、拘置所が新たに建設され(現存建物:旧相 川拘置支所)、昭和29(1954)年から昭和47(1972) 年まで利用されました。
The First Souai Dormitory, located in Aikawa-Shingoro-machi, was used as a single-occupancy dormitory for mine workers, and one record shows that workers from the Korean Peninsula lived here during the war (185 workers were registered as occupants as of the end of May 1943). After the war, following the downsizing of the Sado Mines, the dormitory was demolished and a local penitentiary was constructed in its place and used from 1954 to 1972.
아이카와 신고로마치(相川新五郎町)에 있던 제1소아이료는 광산 노동자 단신용 기숙사로 사용되었습니다. 전쟁 중에는 이 기숙사에 조선 반도 출신 노동자가 거주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으며, 1943년 5월 말 기준으로 185명이 등록되어 있었습니다. 전후에는 사도광산 축소로 기숙사가 철거되었고, 그 자리에 구 아이카와 구치지소(旧相川拘置支所)가 건설되어 1954년(쇼와 29년)부터 1972년(쇼와 47년)까지 사용되었습니다.
얼떨결에 도착한 제1상애료터. 해당 안내판에서는 한국인에 대한 언급을 찾아볼 수 있었다.
전쟁 중에는 이 기숙사에 조선 반도 출신 노동자가 거주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으며, 1943년 5월 말 기준으로 185명이 등록되어 있었습니다.
앞서 2024년에 우리 정부가 별도로 추도식을 진행한 이유로, 일본 정부 대표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 이력과 강제성 표현의 인정 문제를 언급한 바 있다. 그러나 조선인이 실제로 거주했던 기숙사터의 안내 표지판조차 ‘강제동원’을 명시하지 않고 있는 일본이 과연 앞으로의 추도식에서 강제성 표현을 인정할까?
<2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