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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살랑하늘 Jun 02. 2023

+ 여담 셋. 남사친과 건전하고도 즐거운 여행이 될까?

사실 사귀기 전에 여행을 먼저 갔었다.

남편과 한창 자주 연락하고 거의 매주 토요일마다 만났던 시기는 마침 휴가가 다가오고 있는 무더운 여름이었다. 나는 여행을 참 좋아하는데 항상 내 시간에 맞춰주는 엄마 말고는 같이 갈 수 있는 사람을 찾기가 하늘의 별 따기였다. 해가 갈수록 점점 더 그랬다. 아마 직장인이라면 다들 공감할 것이다, 친구와 여행 날짜를 맞추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당시의 남편은 일을 안 하고 있고 나에게 호의적이었으므로 같이 여행을 가자고 제안하기에 딱 괜찮은 상대였다. 다만 딱 한 가지, 남자라는 점만 마음에 걸렸다.

일단은 내가 남녀사이의 관계에 대해 그다지 관대한 편이 아니고(난 아직도 남녀 사이에 100% 우정만 있는 관계는 없다고 본다!), 사회적 시선에서도 남자와 여자가 단둘이 여행을 간다고 하면 단순한 친구 사이로 보지는 않기 때문에 고민이 됐다.

하지만 내적으로 가장 신경 쓰였던 건, '스킨십'에 관한 것이었다. 나는 남편이 사람으로서는 많이 좋아서 즐겁게 대화를 나누다가 막차 시간에 쫓겨 헤어져야 하는 게 늘 아쉬웠고, 여행을 가면 막차 시간에 신경 쓰지 않고 여유롭게 대화를 오래 나눌 수 있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딱 거기까지일 뿐 남녀 간의 진한 스킨십에 대한 마음은 전혀 없었다. 그런데 여행을 가자고 먼저 제안한다면 그런 스킨십까지 포함한 개념으로 받아들일 것 같아 고민이 됐다.






그러나 하고 싶은 건  해야 직성이 풀리는지라, 나는 결국 휴가를 2주 정도 앞두고 남편에게 1박 2일 여행을 제안하고야 말았다. 그리고 그날 남편과 여행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면서 '이 여행, 괜찮을 수도 있겠는데?'라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게 되었다.



1.

아마도 남편과 점심을 먹고 영화를 보기로 한 날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식당에서 점심을 먹을 때 틀어져 있던 TV 프로그램에서 부산이 나왔고 좋아 보였다. 또, 갈 때마다 좋은 기억을 많이 안고 왔기에 여름의 부산을 유난히 좋아하기도 한다.

그래서 의식의 흐름대로 처음엔 무려 부산을 가자고 했다. 상영관 안으로 들어가기 전 얘기했던 것 같은데, 영화를 보고 나와서 남편은 '부산'은 어려울 것 같다고 했다. 그런가 보다 하다가 저녁을 먹으면서 그럼 좀 더 가까운 곳은 어떠냐고 다시 물었다. 자금 사정이 어려운 남편에게는 '여행'이 아니라 '여행 비용'의 고민이 커 보였고, 비용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부산까지 교통비(KTX 왕복 비용)만 12만원이 든다고 말한 게 선택에 결정적 역할을 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적당히 '가평' 정도로 물었더니 원했던 OK 답변이 나왔다. - 나와 하룻밤을 자고 오는 것보다 비용을 더 생각하는 사람이라 오히려 안심이 됐다. '이 여행, 괜찮을 수도 있겠는데?'



2.

정류장에서 내 버스를 같이 기다려 주며 사뭇 진지한 얼굴로 자기도 남잔데 1박 2일로 같이 여행 가는 게 괜찮겠냐며, 자신을 믿느냐고 물었다. 나는 솔직히 답해줬다.

- 100% 믿지는 않는다. 다만, 나는 사귀지도 않는 사이에서 그런 일이 벌어지는 건 원치 않고, 만약 그런 일이 생긴다면 우리가 더 이상 만나는 일은 없을 거라고. 그리고 객관적으로 내가 힘이 훨씬 약한 건 사실이라 내가 원하지 않는 상황이 벌어져도 막을 수 있을 거란 생각은 안 들지만, 여행을 가서도 지금처럼 함께 있는 시간이, 함께 나누는 대화가 내내 즐거울 수 있을까가 너무 궁금해서 가보고 싶다고. -  

정말이었다. 나는 본능을 통제하지 못하는 남자는 싫었고, 나에게 그런다면 다른 사람에게도 충분히 그럴 것 같아 만약 연인이 된다 해도 믿지 못할 것 같았으며, 그런 일이 벌어진 상태에서 계속 친구로 지내는 건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작정하고 테스트를 한 건 아니었지만 명백히 선택권을 남편에게 넘긴 셈이 되었고, 내 답을 들은 남편은 더 심각한 표정이 되었다. (다시 생각해 보니 본인집으로 돌아가는 막차를 못 탈까 봐에 대한 걱정이 더 컸던 것 같기도 하지만) - 그 모습에서 아이 같은 순수함이 느껴져 오히려 안심이 됐다. '이 여행, 괜찮을 수도 있겠는데?'






시간이 흘러 여행 전날이 왔고, 그런 관계로 남자와 단둘이 떠나는 여행은 처음이라 괜찮다고 마인드컨트롤을 해봐도 싱숭생숭한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래서 할 말도 없으면서 남편에게 내가 더 준비해갈 게 있냐는 시답잖은 톡을 보냈는데, 금세 '즐거운 마음'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마음이 놓이는 경쾌한 답이었다. 덕분에 무거운 마음을 내려놓은 채 정말 즐거운 마음으로 잠이 들었고 기분 좋게 여행을 떠날 수 있었다.


아침에 버스터미널에서 만나자마자 예정에 없던 아침을 먹었다. 도착해서는 점심으로 잣닭갈비를 먹은 후 마트에서 장을 봤다. 투썸에 가서 커피를 마시고, 마침 기프티콘이 있어 약간의 돈만 보태 남편이 먹고 싶다는 판케이크도 하나 포장했다. 그걸 그렇게 좋아할 줄 몰랐는데 남편은 그때의 여행에서 제일 좋았던 게 남은 케이크를 집에까지 가져가서 먹었던 거라고 요즘도 말한다. 나는 케이크를 별로 안 좋아해서 안 먹은 것뿐인데 내가 기프티콘을 쓰고도 케이크를 얼마 먹지 않아서 너무 좋았다고 한다. (이 정도면 세상 안전한 남자가 맞는 것 같기도? ㅋㅋㅋ)


마트로 픽업 온 차를 타고 숙소에 도착해서는 영화를 봤다. 내가 보고 싶다고 해서 본 슬픈 영화였는데, 정작 나는 눈물이 안 났고(정말 감흥이 없었던지 제목도 기억이 가물가물), 남편은 화장실까지 가 눈물을 훔치고 와서 약간 당황했다.


소화가 다 되진 않았지만 대충 저녁 시간이라 먹을 준비를 했다. 남편이 파스타를 해주기로 해서 나는 완성되는 동안 기다렸다. 여행 전 남편이 미리 사 둔 내가 좋아하는 와인과 함께 맛있게 완성된 파스타도 먹고 카페에서 사 온 케이크도 먹었다. 그러면서 감격의 케이크 사진도 찍고, 시간에 쫓기지 않고 대화도 정말 많이 했다.


이후 남편은 방 한편에 있던 스파 기계에서 수영복을 입은 채 잠깐 스파를 했다. 업무로 워낙 바쁠 때 숙소를 예약해 나는 스파가 있는 방인지도 몰랐는데(복층인 것만 기억) 남편은 수영복까지 준비해 왔다는 게 놀라웠다. 어쨌든 그 모습을 보니 괜히 나도 같이 하고 싶어 져서 발만 살짝 담가봤다.


어느덧 밤이 깊었다. 남편이 평소에 잠을 잘 못 잔다고 해서 침대가 있는 복층을 양보하고 나는 1층 소파에서 예능을 보다가 잠들었다. 그런데 나한테 한 얘기와는 달리 남편이 너무 잘 자서 '불면증은 거짓말인가?' 생각했다. 나중에 물어보니 집에선 진짜 편하게 잔 날이 없는데 그때 여행에서는 이상하게 꿀잠을 잤다고 했다. 반면 나는 잠자리가 바뀌어서 잘 자지 못했다. 자다가 허리가 아파서 결국 아침에 남편이 있는 침대로 올라갔고, 우리는 아무렇지 않게 같이 잠깐 누워있었다.


그러다 남편이 내려가 해장라면을 끓여줬다. 얼큰한 국물이 들어가자 전날 마신 술로 불편했던 속이 바로 가라앉았다. 남편은 케이크러버답게 아침에도 케이크를 먹었다.


체크아웃을 하고 서울로 돌아왔다. 잠이 부족했던 난 얼른 집에 가서 쉴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남편은 저녁까지 더 놀고 싶어 했다. 정말로 피곤해서 몇 번 거절했지만 남편이 마치 주인에게 놀이를 거절당해 풀 죽은 강아지 마냥 너무 시무룩해 보여 같이 더 놀기로 했고, 우리 동네에서 한참을 더 놀다가 헤어졌다.






특별한 일정이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먹고 대화하고 노느라 바쁘고 분주했다. 걱정해야 하는 순간이 하나도 없었던, 너무 즐겁고 편안한 여행이었다. 그래서 여행 후 남편은 좋은 사람이라는 판단이 더 강해졌고, 더 오래 만나고 싶어졌다. '친구로도 좋을 것 같다.'라고 당시에는 진심으로 생각했다.



그때의 그 케이크


그때의 그 카톡



+) 공감, 댓글, 구독에 생각보다 힘이 많이 나더라고요. 모두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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