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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상윤 Sep 24. 2015

박氏연대기 5

제 1 부 고향

5. 남이사로 가다


몇 달 동안 그는 유난히 추운 겨울을 보냈다. 그는 아직 이른 봄볕에 앉아서 며칠 전에야 받은 미찌꼬의 편지를 또 꺼내 읽었다.


‘잘 지내고 계시나요?

당신 그렇게 떠나고 나서 나는 우리의 아들을 낳았답니다.

부모님은 난리를 쳤지만 나는 목숨 걸고 우리의 아이를 지켰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아이를 데리고 당신이 있는 곳으로 가고 싶지만, 여건이 너무 안 좋습니다.

나는 아직 몸도 약하고, 아이는 더 약합니다.

지금은 우리 둘의 건강을 찾고 당신을 만나러 갈 기회를 기다립니다.

비록 멀리 떨어져 있지만 아이 때문에 늘 당신과 함께 있는 듯합니다.

어쩌면 당신과 그리 같은지 신기할 지경입니다.

당신, 나와 우리 아들을 하루라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도 여기서 당신을 생각하고 있으니까요.

우리가 여행할 수 있는 날이 빨리 왔으면 좋겠습니다.

아직 한겨울이지만 곧 봄이 오겠지요?

봄이 오면 당신에게 먼저 가겠어요.


당신의 미찌꼬가’


그는 편지를 들고 멍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그리고 고향 집으로 그녀가 아이를 안고 들어서는 상상을 해 보았다. 무슨 큰일이야 나지 않겠지만, 부모 형제들은 그녀를 쉽게 받아들이지는 못할 것으로 생각했다. 그렇다고 그녀를 이곳으로 부르는 것도 해결책은 아니었다. 그는 우선 그녀에게 기다려 달라는 편지를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개학이 되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을 때, 박찬우가 찾아왔다. 봉천에 서너 명이 머물 수 있는 장소를 마련해 달라는 것이었다. 학교 외에는 아는 곳이 없던 그는 김창호에게 부탁하기로 했다. 그는 김창호의 아이들 과외를 하기 위해 자주 그의 집을 방문하였기 때문에 그의 심중을 대강 짐작하고 있었다.


“그 사람 믿을 수 있는 사람인가?”


박찬우가 물었다.


“그도 일본 놈들에게 부모를 잃고 쫓겨 이곳으로 온 사람이네. 그 사람 정도의 세력이면 자네들을 도와줄 수 있을 것이네.”


“나도 따로 알아볼 테니 우선 그의 의중을 물어봐 주게.”


김창호는 만주에서 성공한 조선인 사업가로 유명했다. 그는 젊은 시절 만주로 넘어와 땔감 장사로 억척스럽게 돈을 모았다. 그리고 봉천 시내에 평양면옥이라는 냉면집을 차려 크게 성공했다. 그는 중국말과 일본말에 능통하고 사업 수완이 뛰어났다. 냉면집으로 돈을 번 그는 식당을 정리하고 ‘금파루’라는 요정은 열었다. 금파루는 봉천 일대에서 곧 유명해졌다.


봉천으로 사람들이 몰려들고 장사들이 잘되다 보니 자연스럽게 유흥가가 생겨나고 여기저기서 주먹 깨나 쓴다는 건달들이 몰려들었다. 조선에서 밀려난 건달도 있었고 일본 사업가들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생긴 일본 건달패도 있었다. 금파루에는 그 지방의 내로라하는 유지들이 들락거렸는데 그중에 요시무라라는 건달이 있었다. 그는 무역업을 하는 일본 부호의 아들이기도 했다. 그는 천성이 방탕하고 말을 함부로 했다.


어느 날, 기생을 사이에 두고 요시무라와 중국 상인 사이에 싸움이 벌어졌다. 그는 안하무인격으로 중국 상인을 몰아붙였다. 중국 상인도 이 지방에서 알아주는 부호였으나, 일본인들의 횡포에 늘 불만이 많았던 사람이었다. 그는 젊고 버릇없는 일본인을 혼내 줄 결심을 하고 그의 멱살을 잡아 내팽개쳤다. 그러자 요시무라는 지니고 있던 단도를 꺼내 그를 찔러 죽이고 말았다.


소식을 듣고 달려온 김창호는 새파랗게 질리고 말았다. 자신이 평생 공들여 만들어 놓은 모든 것이 사라지는 것 같았다. 그러나 김창호는 침착했다. 그는 요시무라에게서 칼을 빼앗아 들고는 그를 뒷문으로 도망가게 했다.

경찰은 김창호를 살인 용의자로 붙잡아 갔다.


이 사건으로 김창호의 요정은 문을 닫았고 유치장에 갇혀 재판을 기다리는 처지가 되었다. 요시무라는 자신의 죄를 뒤집어쓴 김창호를 도와줄 방법을 찾다가 친척인 봉천 신사 주지를 찾아가 부탁했다. 그는 많은 인맥을 가지고 있어서 그를 통해 김창호를 구명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 주지는 당시 만주의 실질적인 치안과 행정을 도맡아 하던 만주철도주식회사의 야마모토 총재를 찾아가 김창호의 의로움과 억울한 사연을 이야기했다. 덕분에 김창호는 정당방위로 사람을 죽인 것을 인정받아 얼마 후 풀려났다.


그런 일이 있 후, 요시무라는 김창호를 자신의 친척인 봉천 신사 주지와 만철주식회사 총재 야마모토에게 소개하여 주었다. 김창호는 야마모토의 권유에 따라 요정을 처분한 돈으로 봉천역 인근의 땅을 대거 사들였다. 봉천이 만주의 수도가 되자 봉천역 근처의 땅값이 수천 배씩 올라갔다.


박찬우는 김창호가 마련해 준 봉천 시내의 가옥에서 생활하였다. 그는 중국인처럼 행동하고 다녔는데 그 모습이 감쪽같았다. 4월이 지나고 5월에 접어들 무렵, 박찬우는 시종 하나를 데리고 다녔다. 그 시종은 중병을 앓고 있는 환자처럼 왜소하고 비쩍 마른 사내아이였다. 박찬우의 가방을 들고 다니는 것이 안쓰러울 지경이었다. 집안에 칩거하고 있던 박찬우는 5월 중순쯤 김창호에게 사례하고 봉천을 떠났다.


박찬우가 봉천을 떠나고 난 며칠 후, 봉천 시내에 관동군이 쫙 깔렸다. 삼엄한 경비 속에 봉천 시내를 뒤지며 누군가를 찾고 있는 듯했다. 김창호가 박철의 숙소를 찾아온 건 늦은 밤이었다.


“박 선생, 나와 잠시 갈 데가 있소. 어서 따라오시오.”


그는 매우 다급한 듯 말했다.


“무슨 일이십네까? 이곳까지 다 오시고,”


“내 가면서 말해 주겠소. 어서 갑시다.”


그는 어쩔 수 없이 김창호를 따라나섰다. 그들은 사람들 눈에 띄지 않는 골목을 이용해 봉천 시내에 있는 김창호의 집 지하실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몇 명의 남자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박 선생, 오면서 말했던 사람들입니다. 저쪽이 남경에서 오신 송자운 선생입니다.”


그는 맨 오른쪽에 앉아 있는 중년의 사내를 가리키며 말했다.


“만나서 반갑습네다. 박철이라고 합네다.”


송자운은 환하게 웃으며 그에게 악수를 청했다.


“지금 우리 정보에 의하면 박 선생과 김 선생은 관동군에 의해 수배가 내려져 있습니다. 자세한 것은 우리 동지가 설명해 드릴 겁니다.”


그 대원의 말에 의하면, 박찬우와 그의 시종을 도와줬던 일로 관동군에 김창호와 박철 두 사람을 체포하라는 지시가 내려졌다는 것이었다. 박찬우가 소속된 한인애국단의 암살자들이 5월 말경에 대련을 방문하는 국제연맹 조사단을 영접할 일본 요인들을 암살하려고 했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거사를 위해 대련과 봉천, 하얼빈 등에 잠복하고 있었으나, 주고받던 전보가 발각되는 바람에 다수가 체포되었다는 것이었다. 박찬우와 함께 다니던 시종 차림의 젊은이는 최흥식이라는 사람인데, 이번 일에 목숨을 걸고 나선 투사라는 것이었다.


“현재 두 사람이 관동군에 잡힌 것으로 파악됩니다. 박 선생과 김 선생도 이제는 우리와 함께 행동해야 합니다.”


남이사 대원이 설명을 마치고 뒤로 물러섰다


“장주석께서는 이번 한인애국단의 거사에 기대를 많이 걸고 있었는데 아쉽게 되었습니다. 다음 작전을 위해 우리는 이만 떠나야 합니다.”


송자운은 김창호를 보며 말했다. 어서 출발하자고 재촉하는 표정이었다. 김창호는 이미 결심을 한 듯, 박 철을 돌아보며 말했다.


“박 선생, 지금 이곳은 위험하니 우선 남이사로 가서 계획을 세워 봅시다. 이들과 함께 가면 안전할 겁니다.”


그는 동경에서와 같이 타의에 의해 또 이곳을 떠나야 한다니 기가 막혔다. 그가 직접 항일 운동에 참가한 것은 아니었지만, 저번과 달리 이번에는 박찬우를 도와주었으니 그도 관동군에 끌려가면 목숨을 부지하기 어렵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그는 김창호와 함께 송자운을 따라 국민당의 수도가 있는 남경으로 갔다. 남이사는 국민당의 정보기관으로 국민당과 적대관계에 있던 공산주의자들과 반체제 인사들을 제거하는 임무를 띠고 있는 비밀조직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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