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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상윤 Sep 24. 2015

박氏연대기 6

제 1 부 고향

6. 땔감 장수


가 5살 때, 그의 아버지는 시청의 땅을 불하받아 개간을 시작했다. 만여 평이 넘는 넓은 땅을 쟁기로 갈고 지게로 돌을 날라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밭으로 만들었다. 과실수를 사다 심은 지 5년이 지나 복숭아와 사과를 수확하기 시작했다. 과수원 고랑 사이사이에는 포도를 심었고 자두와 살구도 심었다. 그와 그 동생들은 누렁이에게 줄 꼴을 비러 가거나 포도밭에 가서 포도에 봉투를 씌우는 일을 돕기도 했다.


그렇게 여름이 다가올 무렵, 시청에서 사람이 나왔다. 그는 의 아버지에게 서류 봉투를 하나 들이밀고는 말했다.


“여기가 젤 적합하다는 게 나라의 결정이라 어쩔 수 없게 되었습니다. 금년 농사까지만 가능하답니다.”


그의 아버지가 몇년 동안 힘들게 땅을 개간해서 이제 수확을 앞둔 마당에 불하했던 땅을 다시 내놓으라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다. 의 아버지는 겨우내 집을 떠나 돌아오지 않았다. 고향의 겨울은 눈밭에서 아이들이랑 토끼 사냥을 하거나, 옥수숫대를 엮어서 만든 광에 쌓아 둔 고구마를 구워 먹는 일, 철사로 만든 외발 썰매를 타는 일들로 바쁘게 지나갔다. 이듬해 봄, 그의 가족은 트럭에 이삿짐을 가득 싣고 고향을 떠났다. 의 아버지가 장터 국밥집에서 의 엄마를 만나 충주에 정착한 지 18년 만의 일이었다.




박철은 봉천에서 김창호와 함께 남경으로 피신한 후, 중국 국민당의 정보조직인 남이사에 의탁하고 있었다. 한인애국단은 상해와 대련 테러사건의 배후로 밝혀지면서 활동하기가 어려워졌다. 박찬우는 한인애국단이 활동을 중단한 후에도 김원봉이 이끌던 의열단에 들어가 항일 무력투쟁을 계속했다.


광복군이 연합군과 함께 국내로 진격하기 직전인 1945년 8월, 일본이 항복하고 해방이 되자 박철과 박찬우는 임시정부 2진을 따라 경성으로 돌아왔다. 경성에 돌아온 그들은 환대를 받았지만, 갈등 또한 심했다. 해방의 기쁨만 가슴에 안은 채 고국에 돌아온 그들에게 정치의 세계는 냉혹했다. 민족 공통의 적인 일본이 패망하자, 그동안 동지였던 사람들이 이념이나 이익에 따라 갈라섰다. 겨우 해방된 나라의 주도권을 쥐려는 정치인들의 모습이 그들의 눈에는 곱게 보이지 않았다. 좌익과 우익의 대립은 더욱 심해졌다.


그런 와중에, 김원봉이 우익으로부터 린치를 당하고 숨어 지내다가 평양으로 가 버리자, 박찬우는 갈 곳이 없었다. 그는 좌익이나 우익의 이념을 이해하고 행동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신채호가 쓴 의열단 선언문에 따라 그도 자연스레 무력에 의한 민족 혁명을 가슴에 담고 있었다. 그러나 그 대상이 이제는 서로 같은 민족이라는 것이 그를 가슴 아프게 했다.


"이 상황에서 내가 갈 길은 하나뿐이네. 여기 있어 봐야 개죽음일 뿐."


"자네 의지는 내래 잘 알고 있디. 어디를 가든 부디 몸조심하게."


박찬우는 그의 정신적인 지주였던 김원봉을 따라가기로 결심하고 박철에게 작별을 고했다.


박철은 해방된 조국에서 새로운 일을 하며 살아갈 결심을 했다. 더는 쫓겨 다니며 인생을 허비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다시 교편을 잡고 싶었으나 대학을 마치지 못한 문제로 인해 쉽지 않았다. 그는 일본인들이 버리고 간 요꼬 기계로 양말을 짜서 시장에 내다 파는 일을 했다. 미군부대에서 나오는 헌 옷 실을 풀어서 썼다. 그렇게 사업이 순조롭게 잘 나가고 있을 때 6·25 동란이 일어났다.


박철은 6·25 동란이 나는 바람에 고향인 평안도로 돌아가지 못했다. 그는 가족들과 생이별을 한 채 혈혈단신, 남한을 떠돌며 고향으로 돌아갈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전쟁이 끝났을 때, 그가 하던 양말 공장은 이미 잿더미가 되어 있었다. 당시 서울은 전쟁의 여파로 생활이 궁핍했고, 연료도 산에서 베어 온 나무나 마른 풀이 고작이었다. 그는 만주에서 만났던 거부 김창호가 했던 대로 땔감을 해다 팔아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게로 하기에는 너무 힘들고 달구지 같은 것도 있을 리 만무했다. 그는 모아 두었던 돈을 털어 폐차 직전인 제무시(GMC) 한 대를 사서 땔감 장사를 시작했다.


지방에서 나무를 싣고 올라와 땔감 도매상에 넘겨주는 산판 사업이었다. 산판 일이 없을 때는 여주에서 쌀을 팔아 싣고 강원도 속초로 넘어갔다. 여주 쌀을 주고 그 값어치만큼 동태나 오징어를 사서 서울로 돌아와 팔았다. 이러한 구상무역방식은 그에게 많은 이익을 가져다주었다. 호사다마라고 한창 사업이 잘되던 그에게 위기가 찾아왔다. 산판을 하러 경상도 깊은 산골에 들어갔다가 무장공비를 만나는 바람에 차를 버리고 달아나야만 했다. 어깨에 총을 맞고 산비탈을 굴러 떨어져 겨우 목숨을 건졌다.


그가 다시 차를 사서 찾아간 곳은 문경새재가 가까운 충주 땅이었다. 문경새재가 있는 조령산은 백두대간을 잇는 높은 산으로 전쟁에도 불구하고 나무가 많은 편이었다. 충주는 예로부터 중원경이라 하여 나라의 중심으로 불릴 만큼 지리적으로 중요한 사통팔달의 지역이기도 했다. 서울과 강원도, 경상도를 들락거리기가 수월해 산판 사업을 하기엔 안성맞춤이었다. 그는 음성이나 제천, 점촌 장을 찾아다니며 필요한 물건을 사서 서울에 올려다 팔기도 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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