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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살리 Jun 26. 2023

양치를 잘하자

타지에서도 잘 먹고 잘 씻고 잘 닦기


프랑스에 오기 전, 치과부터 산부인과까지 회진 돌 듯이 병원 진료를 받고 왔다. 몸뚱이가 유일한 자산인 나는 한국의 편리함을 결코 따라갈 수 없다는 이 나라의 의료 서비스가 제일 걱정되었다. 그래서 최대한 건강하고 깨끗한 신체 조건으로 떠날 준비를 했다.


언제부턴가 어금니 한 개에 충치가 생긴 것 같아서 치과를 가긴 가야 했는데, 계속 미루고 있다가 드디어 치료를 받았다. N년 만에 스케일링도 받았다. (치과, 나만 무서운 거 아니잖아?) 스케일링을 받다가 너무 아파서 눈물이 또르르 흐르기도 했다. 부끄럽지만, 치석이 많을수록 아픈 거란다.



게다가, 처음 알게 된 사실은 주인도 모르는 사이 자란 과잉치였다. 왼쪽 두 어금니 사이에 수상한 덧니 하나가 빼꼼히 튀어나와 있었다.


"빼야 하나요?" 겁에 질린 채 물어보았다.

"지금은 이상이 없어서 괜찮은데, 염증이 생기면 빼셔야 해요. 근데 위치가 큰 수술이에요. 양치질 잘하세요. 그 방법밖에 없어요."라고 의사는 무시무시한 경고를 했다.


손수 칫솔질 시범을 보여주며 양치하는 법도 알려주었다. 유치원생처럼 세심하게 보살핌을 받는 기분은 나름 나쁘지 않았다.





몸과 마음이 새롭게 준비된 덕분이었을까. 새로운 시작을 향해 달려가는 모든 과정이 순조로웠다. 파리에서 살 집을 일주일 만에 구한 건 최고의 운이었다. 운이 안 좋으면 아무리 발품을 팔아도 두세 달 넘게 숙소 생활을 하는 경우도 더러 있다고 들었다. 그런데, 딱 좋은 타이밍에 매물이 나왔고, '마침 널 위해 준비했어. 어서 와!'라며 이 도시가 날 부르는 것만 같았다. 부동산 중개인, 친절한 주종 아저씨를 만나 처음 집을 보러 간 날, 나는 충격적일 만큼 이 집이 마음에 들었다.


어쩜 집이 이렇게 이쁠 수 있지?


아담하고 화사하고 깨끗한 이 집이 바로 나의 첫 번째 보금자리라니. 곰팡이 하나 없는 새하얀 벽, 고장 하나 없는 가구들, 그리고 널찍한 창문으로 방 안 가득 넘치게 들어오는 햇살이 이 외로운 이방인을 꼬-옥 안아줄 것만 같았다. 무엇보다 제일 마음에 든 건 물때조차 없이 매끈하게 빛나는 화장실이었다. 샤워부스가 따로 있는 건식 화장실이 너무 좋았다. 이 뽀송뽀송한 화장실에서 매일 양치질을 하고 싶어졌다.


주종 아저씨는 한국의 치과의사만큼 세심하게 집 안 구석구석을 보여주었다. "냉장고, 쎄봉!", "주방, 쎄봉!", "온수도 쎄봉!", "에브리띵 쎄시봉!" 그는 연신 엄지척을 날렸다.



첫 보금자리로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이 집에 필요한 건, 단정한 나의 몸과 마음뿐이었다. 이 집의 단정함을 닮고 싶은 마음으로 충만해졌다. 아침에 일어나면 이부자리를 단정하게 정리하고, 빛막이 창을 올려 아침 햇살을 흠뻑 맞는다. 사과 한 조각이라도 아침을 챙겨 먹고, 점심이나 저녁밥을 먹은 후에는 설거지를 바로 한다. 너무 피곤하면, 최소한 물에 담가 두기라도 하기. 샤워 후에는 창문을 열어 환기한다. 퀴퀴한 화장실만큼 싫은 건 없으니까. 수납장에 수건이 비지 않도록 제때 빨래하고 예쁘게 개서 차곡차곡 넣어준다. 아, 새 수건 한 장은 수건걸이에 쫙 펼쳐서 걸어준다. 호텔처럼 뽀송뽀송한 수건이 걸려있는 화장실에서 양치질을 하고 싶으니까.



불어 자격증을 따는 것도, 인스타툰 팔로워를 늘리는 것도, 브런치 구독자를 늘리는 것도, 책을 내는 것도, 언젠가 큰 프로젝트를 수주하는 것도, 충치가 생기면 다 무슨 소용이람. '저는 일을 잘하고 돈도 꽤 법니다.'라고 말하는 것보다 '저는 매일 몸과 마음을 깨끗하고, 단정하게 합니다.'라고 말할 때 어쩐지 더 후광이 비친다. 일상의 균열이 생기지 않도록 잘 먹고, 잘 씻고, 잘 닦는 사람이 일이든 뭐든 윤기 나게 잘 해낼 것 같다.





물때 없이 새하얀 세면대 위에 이케아에서 새로 산 칫솔 꽂이를 올려 두었다. 물이 빠질 수 있게 구멍이 뚫린 바닥이 아주 마음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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