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테르 분노의 시위 혹은 폭동을 지켜보며
"Je suis désolée. Je vais être en retard de 10 minutes. Il y a un problème sur la ligne 2. Un train est stationné à Terne." (미안해요. 10분 정도 늦을 것 같아요. 지금 2호선에 문제가 생겨서 열차가 Terne역에 멈춰 있어요.)
어학원에서 한 달에 한 번씩 있는 문화의 날. 다 같이 몽마르트르 견학을 가기로 했다. 아침 10시까지 지하철 2호선 Blanche 역에 집결하기로 했지만, 열차가 도중에 멈추는 바람에 운행이 재개될 때까지 20분 정도 기다리거나, 다른 교통수단을 찾아야만 했다. 대부분 사람들은 평온한 표정으로 기다리는 방법을 선택하는 듯했다. 집결 시간이 다가오자, 학생들이 한두 명씩 자신의 상황을 왓츠앱으로 알리기 시작했다.
"Ce n'est pas grave. La joie des transports en commun à Paris!" (괜찮아. 이게 바로 파리 대중교통의 묘미지!)
Justine의 초연한 반응은 이제 놀랍지도 않다. 사실 늦어서 미안하다는 말이 한두 번 오간 것도 아니고, 별일 아니라는 태연한 대답도 한두 번 들은 것이 아니다.
"Bienvenue à Paris!" (파리에 온 걸 환영해!)
Marion의 맞장구는 마치 통과의례를 치른 후 받는 축하인사처럼 들렸다.
프랑스인들은 지각을 잘한다는 세계적인(?) 편견이 있다. <Emily in Paris>에서 주인공의 보스, Sylvie는 밥 먹듯이 지각한다. 드라마 속 수많은 판타지 중에서 이것만은 현지인들도 사실 기반임을 인정한다. 프렌치 타임은 존재한다. 하지만, 프렌치 타임의 원인은 게으름이 아닌 대중교통 문제 때문이라고 조심스레 추측을 해본다. (물론, Sylvie가 지각하는 이유가 이 때문인지는 확신할 수 없다) 시간 약속을 무색하게 할 만큼 이곳의 대중교통은 시간을 참 안 지킨다. 자주 멈추고, 자주 늦는다. 파리 외의 다른 도시는 아직 살아보지 않아서 잘은 모르겠지만, TGV(프랑스 고속열차)도 당일 운행 취소가 종종 발생한다는 이야기를 듣긴 했다.
"웰컴 투 프랑스~"
파리 지하철은 노후화가 많이 되어 잔고장으로 자주 멈추고, 파업으로 대중교통이 마비되기 일쑤이다. 버스 또한 상황이 크게 다르지는 않다. 지난주에는 버스 노선이 축소되는 바람에 길 위에서 한참을 방황했다. 나름대로 여유 있게 나왔지만, 파리 대중교통의 묘미를 감당할 만큼의 깜냥은 아직 못 되는 듯하다. 지하철을 탔다가, 버스를 탔다가, 결국 우버를 불렀지만, 우버마저 도로 위를 한참 헤매는 덕분에, 친구를 1시간이나 기다리게 했다. 파리 시내는 이곳저곳 땅을 쑤셔대며 도로 공사를 하고 있고, 시시때때로 시위대에 점거당하는 도로는 늘 변수로 가득하다.
그래서인지 프랑스인들은 시간에 관대하다. 나는 지하철이 멈춰도 평온한 이들의 표정이 마음에 들었다. 파업이나 시위로 나의 편의가 침해당한다 할지라도, 아무도 채근하지 않는다. 미화원들의 파업으로 길거리가 쓰레기로 뒤덮여도, 누구도 노동자를 원망하지 않는다.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는 것은 정당한 것이니까. 나의 자유가 기꺼이 침해당하는 것 또한 이에 대한 소극적인 동참인 셈이다.
그런데 근래 일주일의 상황은 조금 다르다. 파리는 저녁 9시부터 대중교통의 운행을 중단하였고, 다른 지역도 비슷하다. 밤마다 전국 각지에서 격렬한 시위가 끓어오르고 있다. 지난 27일 화요일, Nanterre(낭테르)에서 경찰이 교통 검문을 피하려던 10대 소년을 총으로 쏴 숨지게 한 사건이 방아쇠가 되었다. 전국 각지에서 경찰의 과잉 진압에 저항하는 화염병의 불꽃이 터지고 있다. 이 혼란을 틈타 상점을 약탈하고, 방화를 저지르는 폭동으로까지 번져나가고 있다. 때문에 정부에서는 야간 통행을 막기 위해 대중교통을 중단시켜 버렸다. 시민들은 밤새 각자의 집에 몸을 숨긴 채 그저 간밤의 무사를 바랄 뿐이다.
숨진 10대 소년은 아프리카 이민 가정 출신으로 이름은 Nahel(나엘). 그가 이민자 출신의 미성년자라는 사실이 프랑스 경찰의 폭력적 관행과 인종차별적인 이데올로기에 대한 시민들의 그간 쌓여 온 분노를 터뜨리는 기폭제가 되었다. 단지 이번 사건을 규탄하는 단발적 시위가 아니라, 오랫동안 쌓여 온 분노가 폭주하고 있다. 밤사이 격렬했던 소요의 증거인 불타버린 자동차와 부서진 건물의 처참한 잔해들을 보고 있자면, 21세기 현대판 프랑스혁명의 재현이 아닌가 싶다. 왕의 목을 내리친 역사의 후손들답게, 낡은 권력에 날것의 폭력으로 맞서 싸우는 것이 처음 있는 일은 아니다.
이민자들의 저항 또한 처음이 아니다. 2005년 방리유 소요 사태 때에도, 경찰의 추격을 피하다 사망한 청년들이 이민자 2세라는 사실이 방아쇠를 당겼고, 지금과 비슷한 시위와 폭동이 삽시간에 번져나갔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이 저항은 지배계층의 권력을 정당화하고 말았다. 3주간의 국가비상사태, 즉 더 강력한 진압과 통제가 있었고, 봉합 대신 더 깊은 갈등의 골이 생겼다. 이민자 2세들은 이 나라에서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로서 배제되고 억압당하며, 울분이 터져 나왔다. 물론 이들의 분노에, 슬픔에, 공감하며 함께 거리로 나서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사람들은 기꺼이 이들을 위해 자신의 자유를 침해당한다.
그러나, 초등학교에 불을 지르고, 관광객이 탄 버스에 돌을 던지고, 식료품을 약탈하는 폭도들의 분노는 어디를 향하고 있는 걸까? 기관총을 들고 번화가를 순찰하는 군인들의 방아쇠는 누구를 지키기 위해 당겨질 것인가? 나의 마지막 시위는 2016년 광화문 촛불시위. 그때 그곳과 참 많이 다른 양상에 당황스럽기도 하고, 섣불리 견해를 갖는 것이 조심스러운 것은 사실이다. 평화를 강요하는 것도, 폭력을 정당화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프랑스의 또 다른 얼굴을 드디어 마주하게 된 지금, 한 번은 의문을 던지고 싶다.
"나의 자유는 대체 누구를 위해 침해당하고 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