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과 파리에서 발견한 세대 간의 문화 격차
내가 가는 모든 곳은 젊음과 활력으로 가득했다. 망원동에 살 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동네에 젊은 사람이 많아서 좋아!” 상권이 활성화되려면, 젊은 유동 인구가 많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망원동이 활력으로 가득한 동네가 된 것은 망원시장이 미디어를 통해 유명해지고, 젊은 손님들이 많이 놀러 온 덕분이었다. 이후 골목마다 인스타그래머블한 카페들이 우후죽순 생겨났고, 길거리의 평균연령이 눈에 띄게 낮아졌다.
그러나, 망원동이 단지 젊은 사람들의 놀이터만은 아니었다. 나는 출근길 아침마다 골목길 어귀의 낡은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계신 어르신들과 마주치곤 했다. 몇십 년을 그 동네에서 살아온 토박이 주민들에게는 핫플레이스이기 전에 삶의 근거지였다. 그분들은 지나가는 사람과 차를 가만히 바라보고만 계셨다. 이렇게 활기찬 동네에 어울리지 않는 무료함이었다. 그 당시에 나는 의아했다. 바로 옆에 아늑한 카페들이 넘쳐나는데, 굳이 골목길에 앉아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커피값이 비싸서였을까? 아니면 아메리카노보다 다방 커피가 취향이라서?
도시의 한 구역이 핫플레이스로 부상할 때는 명확한 특징이 있다. 다른 지역과는 차별화되는 그 동네만의 독특한 개성과 문화를 바탕으로 공공 혹은 상업 공간이 주목을 받기 시작하고, 유동 인구가 늘어난다. 이 유동 인구를 타깃으로 한 상점들이 많아지며 상권이 활성화된다. 그리고, 이 핵심 유동 인구는 2030 세대이다. 새로운 자극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젊은 세대가 트렌드의 주도권을 쥐는 건 지극히 당연한 현상이다. 문제는 지역 문화를 향유하는 소비층이 확장되는 게 아니라 교체가 된다는 데에 있다.
경의선 숲길이 조성된 이래로 연남동의 오아시스가 된 ‘연트럴 파크’. 버스킹 하는 사람들, 벤치에 앉아 맥주를 마시는 사람들, 반려견과 함께 산책하는 사람들, 동네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이 사람들은 대부분 젊다. 쾌적하고 활기차며 젊음이 가득한 이 모습이 이제는 가장 연남동다운 한 장면이 되었다. 사실 나의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는 20년 넘게 연트럴 파크 초입에 사셨다. 딱 연트럴 파크가 생기기 전까지. 만약 그곳에 계속 사셨더라면, 두 분도 연남동다운 장면을 완성하는 구성원일 수 있었을까? 상상해 보면 어쩐지 그림이 어색하다.
낙후된 공장단지에서 팝업스토어의 성지가 된 성수동. 과거의 기억이 고스란히 담긴 붉은 벽돌과 허름한 인테리어를 그대로 보존한 리노베이션 공간들이 많다. 카페와 갤러리, 팝업 스토어에는 평일이든 주말이든 젊은 손님들로 붐빈다. 만약, 그 동네의 과거를 정말로 기억하는 동네 어르신들이 가도 자연스러울까? 문래창작촌도 세월의 흔적은 그대로 간직하면서, 아기자기한 카페와 바로 인해 젊고 힙한 동네가 되었다. 그러나 손님이 없는 낮에는 철공소에서 쇠붙이를 자르고, 용접을 하며, 기계 돌아가는 소리가 울려 퍼진다. 철공소 아저씨들은 어디서 점심을 먹을까? 어디서 커피를 마실까? 확실한 건, 그 동네의 유명 맛집과 카페들이 오랜 주민을 위한 곳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파리로 이사 온 지 어느덧 4개월 차. 파리에 오는 이방인이라면 누구나 꿈꾸듯, 화창한 햇살 아래 카페테라스에 앉아 에스프레소와 함께 여유 한 모금을 즐기고 싶어 진다. 이것은 진정한 파리지앙이 되기 위한 생활양식 중 하나임이 분명하다. 파리 시민(아마도 모든 프랑스인)들은 너나 할 것 없이 테라스를 정말 사랑하기 때문이다. 한 블록 건너 모든 카페마다 테라스에서 아침을 먹고, 커피를 마시고, 책을 읽거나, 담소를 나누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그 안에 나이가 지긋한 백발의 노인들이 섞여 있는 것 또한 아주 자연스럽고 평범한 일상이다. 파리가 파리다울 수 있는 도시의 한 장면을 이루는 구성원이 되는 조건에는 결코 나이가 없다.
하루는 바우하우스 출신의 건축가 전시를 보러 갔다. 루브르나 퐁피두처럼 큰 미술관은 아니었고, 소규모 갤러리에서 열린 전시였다. 전시장 안에는 건축과 학생처럼 보이는 젊은이들이 열심히 사진을 찍고 있었고, 동네 마실 나온 듯 보이는 어르신이 뒷짐을 지고 고개를 끄덕이며 작품을 감상하고 있었다. 전시를 보고, 밖에 나오니 다양한 고서와 그림책, 포스터, LP 등의 빈티지 물품을 파는 벼룩시장이 열리고 있었다. 그림책을 파는 젊은이들 옆에는 와인을 마시며 분위기를 즐기고 있는 어르신들이 있었다. 언뜻 서울의 동묘 구제시장이 떠오르는 풍경이었다.
단지 서울과 다른 점이 있다면, 파리에는 이렇게 청년부터 노년까지 어울렁더울렁 모여있는 공간이 어디에나 존재한다는 것이다. 도서관에서 책을 읽고 컴퓨터를 하는 노인들. 독립영화관에 영화를 보러 오는 노인들. 힙한 빈티지 샵에서 라이더 재킷을 사는 할아버지와 스카프를 사는 할머니. 도심 광장 한가운데서 탱고를 추는 중장년의 무리. 한 도시에서 같은 공간을 이용하고, 같은 취향을 갖고, 같은 문화를 향유하는 모습이 서울에서 온 이 이방인에게는 꽤 이색적이었다.
사회문화를 움직이고 콘텐츠를 생산하는 주체의 세대교체는 당연한 순리이다. 그러나 공공의 지역 문화가 일부 집단만이 향유할 수 있는 전유물이 된다면, 이전 세대 혹은 소수 집단은 소외될 수밖에 없다.
프랑스는 ‘문화 민주화’라는 기조 아래 1960년대부터 국가적으로 문화예술정책을 펼쳐왔다. 프랑스 국가헌장에는 ‘모든 시민이 문화에 접근할 수 있는 평등한 기회를 보장해야 한다’ 고도 명시 되어 있다. 이를 위해 지리적, 경제적, 사회적 차원에서 문화 접근의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한 여러 정책들을 행했다. 이들은 문화는 반드시 공공자산이어야 한다고 여긴다. 이들이 정의하는 문화는 단지 좁은 의미의 순수예술만을 일컫지 않는다. 대중가요, 요리, 패션, 사진, 영화 등의 다양한 대중 문화를 비롯해 사람들의 생활방식 그 자체 또한 문화 영역에 포함된다고 보았다. 프랑스에서는 문화가 곧 일상이고, 모든 것이 문화이다.
시민들이 밤새 문화예술을 즐기는 날인 ‘라 뉘 블랑슈(La Nuit Blanche)’. 도심의 모든 박물관과 미술관 및 문화 공간들이 무료로 개방하거나 하루 종일 문화 행사를 연다. 고전 예술부터 현대 예술까지 다양한 카테고리와 장르의 행사들이 열린다. 파리에 머무는 누구나 이 혜택의 수혜자가 될 수 있다. 하루 종일 온 도시에서 음악이 끊기지 않는 ‘음악 축제의 날(Fête de la Musique)’. 온 시민들은 나이, 그리고 지역에 구애받지 않으며, 음악을 즐긴다. 낮에는 광장에서 클래식 공연을, 밤에는 길거리에서 DJ 공연을, 시민들은 각자 취향껏 축제를 즐기면 된다.
파리 19구에 위치한 ‘104 상카트르(Le Centquatre)’는 낙후된 장례식장을 개조한 복합문화공간이다. 모든 시민을 위해 열린 공간을 표방하며, 출입구가 없는 넓은 광장에서는 아마추어 댄서들이 공연을 하고, 지나가던 시민들은 잠시 멈춰 서서 구경을 한다. 이곳에서는 패션쇼, 전시, 춤, 연극, 서커스 등 다양한 예술 활동이 이루어진다. 이곳 역시 문화 콘텐츠를 생산하는 주체는 젊은 예술가들이 많다. 하지만, 백발의 노부부가 공연을 보러 와도 전혀 이질감이 없고, 동네 주민들이 이곳에서 제공하는 문화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마음껏 즐기는 데에 아무런 거리낌이 없다.
2025년이면 대한민국도 초고령사회에 진입하며, 이미 60대 이상이 인구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다. 서울은 힙하고 트렌디한 문화 공간들이 끊임없이 생겨나며, 세계적으로도 독보적인 개성을 지닌 문화도시로 거듭나고 있다. 하지만, 오직 50%의 사람들만이 자유롭게 즐길 수 있는 문화라면, 결국 반쪽짜리 문화이지 않을까?
매년 4월이면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는 마포구 희우정로. 소문을 듣고 온 젊은 커플들은 사진을 찍고, 카페나 식당들은 덕분에 문전성시이다. 하지만 나는 매일 아침, 인도 한편에 쭈그리고 앉아 가만히 흩날리는 벚꽃을 바라보는 어르신들을 보았다. 그 어르신들은 어디에서 커피를 마실까?
- 황혜진, 국가주도형 프랑스 문화정책과 시사점, 「유라시아연구」, 제7권 제1호(통권 제16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