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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살리 Sep 03. 2023

오를리 공항에서 10시간

Côte d’azur 코트다쥐르 여행기 1편


파리지앙 없는 파리의 여름, 나도 떠나자


파리의 여름은 어느 때보다 여행 성수기이다. 그리고, 어느 때보다 파리에 파리지앙들이 없는 시기이다. 파리 시내는 여름휴가를 즐기러 온 관광객들로 북적하다. 파리지앙들은 7~8월에 다른 도시로 바캉스를 떠난다. 내가 사는 동네만 해도, 평일 출근 시간의 지하철이 텅 비어 있고, 문을 연 빵집을 찾기가 힘들 정도이다. 괜스레 나도 그들처럼 여름을, 아니 인생을 즐기고 싶어졌다. 딱 3박 4일만 짧고 굵게 바캉스를 떠나기로 했다.


4개월 차 파리지엔느의 첫 번째 여행지는 바로, Côte d’azur 코트다쥐르. 가고 싶은 소도시들이 정말 많지만, 여름이니까 한 번은 바다에 풍-덩 빠져야 했다. 그리고, 예술이 있는 곳 (물론 프랑스에서 예술이 없는 도시란 없다만). 내가 사랑하는 고전화가들의 혼을 느낄 수 있는 도시들부터 먼저 가고 싶었다. 사실 10년 전에 배낭여행으로 갔었지만, 굳이 한 번 가본 도시를 또 가기로 한 이유가 있다. 10년 사이 니스를 사랑하게 될 새로운 이유들이 생겼기 때문이다. 마티스와 샤갈이 머물렀던 Nice 니스, 마티스 성당이 있는 Vence 방스, 그리고 피카소가 머물렀던, 모네의 화폭에 담겼던, 스콧 피츠제럴드의 소설 속 첫 장면이었던, Antibes앙티브. 한 번 더 가야 할 이유는 이로써 충분했다.





하루라도 바짝 더 일해서 입에 풀칠하기 바쁜 와중에, 텅장을 탈탈 털어 떠나는 여행이었다. 그런 만큼 미술관을 비롯해 그 도시만의 문화와 사람들을 경험하며 ‘풍부한 영감을 얻어 오리라!’ 하는 야심 찬 포부가 있었다. 한데, 그것은 시작부터 크림브륄레 위의 설탕처럼 바사삭 부서지고 말았다.


아침 7시 비행기를 타러 새벽부터 택시를 타고 오를리 공항을 향하던 중, 운항이 취소되었다는 메일을 발견하였다. 불과 이륙 3시간 전에 도착한 메일이었다. 이거 너무 비상식적인 거 아니냐고요…? 한인 커뮤니티에서 비행기나 기차가 취소되어 애먹었다는 경험담을 종종 본 적은 있다. 이렇게 빨리 내 이야기가 될 줄은 몰랐다. 아직 불어가 어눌한 4개월 차 이방인이 감당하기엔 조금 버거운 미션인 것 같은데 말이지.


일단 다음 수순이 무엇인지 파악하기 급급했다. 순간 무력감이 밀려와 여행이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집에 돌아가고 싶은 심정이 욱하고 올라오기도 했다. 그래도 한 달 동안 기다려온 예술기행을 허무하게 포기할 수는 없었으니, 다음 항공권을 빠르게 예매했다. 원래 항공권은 62유로로 최저가 중의 최저가였지만, 당일 제일 빠르고 제일 저렴하게 예매할 수 있는 건 388유로짜리. 허공에 326유로를 뿌리는 셈이었다. 원래 항공권은 바로 환불 신청을 해서 빠르게 환불받았다. 대체항공권까지 보상이 가능한지 확신은 없지만, 일단 보상 신청은 해두었다. 나중에야 알게 된 사실은 다른 항공사 비행 편으로도 무료 변경이 가능했다는 것… Jesus…






아무튼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시간은 어떤 방법으로도 보상받을 수 없다는 사실이다. 오후 3시 반까지 공항에서 꼼짝 않고 기다려야 했다. 새벽 5시 반부터 장장 10시간을 공항에서 체류하는 신세가 되었다. 그리고 또 뒤늦게 깨달았다. — 인간은 언제나 한 발 먼저 걱정하고, 한 발 뒤늦게 깨닫는 동물 — 기차라는 또 다른 선택이 있었다는 걸. 니스까지 5시간 반이 소요되기에 애초에 배재했던 교통수단이었다. 하지만, 공항에서 하릴없이 시계만 보고 있는 것보다는 창 밖 풍경이라도 보면서, 느리지만 어쨌든 여행을 떠나고 있다는 안도감은 느낄 수 있었을 테다. 후, 어찌 매 순간 최선의 선택만 할 수 있겠느뇨. 그리고, 직접 경험해보지 않으면, 무엇이 최선의 선택인지는 결코 알 수 없다. 기차 역시 당일 취소되고 지연되는 경우도 왕왕 있는 걸! (이렇게라도 합리화를 해 본다)






돈도 시간도 잃었지만, 아직 3일 하고도 한나절이나 남은 여행을 이 기분으로 계속 망칠 수는 없었다. 이제 잊자! 공항 여행을 하는 거야! 공항에 가만히 앉아 오가는 사람들을 구경하고 있으니 알랭 드 보통의 <공항에서 일주일을 (히드로 다이어리)>라는 책이 생각났다. 프랑스 작가 알랭 드 보통이 런던의 히드로 공항 대합실에서 일주일 간 보고 듣고 경험한 이야기를 생생하게 담은 에세이이다. 읽은 지 오래되어 자세한 에피소드가 생각나지는 않지만, 나도 공항에 체류하는 10시간 동안 보고 듣고 떠오르는 온갖 생각들을 기록하고 싶어졌다. 그가 책에서 기록한 공항은 대체로 고조된 감정의 사람들이 오가는 장면들로 가득했다. 오랜만에 만나 반가움에 포옹을 하는 사람들, 헤어지기 전 눈물의 작별 키스를 하는 사람들, 쫓기듯 빠르게 움직이는 사람들. 공항만큼 다양한 국적과 목적을 지닌 사람들이 모이는 곳도 없을 테다.


니스 해변에서 먹었어야 할 점심 대신 대합실 의자에 앉아 샐러드와 과자를 먹고 있으니, 한 노숙인이 다가와서 자기도 배가 고프니 먹을 것 좀 달라며 구걸을 했다. 공항 안에도 구걸하는 노숙인들은 있다. “Désolée (미안)”이라며 단호하게 거절하니, “Bonne appétit(맛있게 드세요)”라고 인사하며 쿨하게 떠났다. 프랑스는 거지도 노숙인도 심지어 소매치기도 인사성이 참 바르다. 소매치기가 지갑을 훔치다가 주인과 눈이 마주치면 ”Bonjour”라고 인사한다는 이야기도 있을 정도이다.


의자에 드러누워 숙면을 취하고 있는 또 다른 공항 체류자, 영어를 비롯해 당최 어느 나라인지 모르겠는 다양한 언어들이 내 눈과 귀에 다가왔다. 그러나 그다지 흥미로운 소재거리는 더 이상 없었다. 다른 사람을 관찰하는 시도는 접어두고, 이내 나의 여정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10시간을 제자리에 멈춰 있으니, 그동안 왜 그렇게 빨리 가려고 했는지 나의 속도에 대해 생각했다. 앞만 보며 달리다가 번아웃까지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왜 여전히 조급해하는 걸까.





<Le paradis>, Marc chagall, 1961


여행이 쉼이 아닌 삶, 불행일까?


이번 여행은 결코 쉼이 목적이 아니었다. 내가 사랑하는 예술가들이 머물렀던 도시의 정취를 음미하며 그들이 왜 이 도시를 사랑할 수밖에 없었는지 오감으로 느끼고 싶었다. 미술관에서 미술사 상식도 몇 줄 채워 넣고, 감상 후기도 기록하고, 내 그림을 위한 영감도 얻고 말이다. 그리고 돌아오면 글과 그림, 양질의 콘텐츠를 만들 수 있을 거라 기대했다. 아니, 그래야만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모든 순간마다 온 감각 세포를 날카롭게 세운 채 끊임없이 느끼고 생각하고 흡수해야 한다. 내 모든 일상과 경험이 축적되어 나만의 콘텐츠가 탄생하는 건 맞다. 하지만, 매분 매초 생산적이어야 한다는 압박감은 영원히 쉼으로 도피할 수 없는 삶을 사는 운명인 것만 같아서 조금 불행하게 느껴졌다.




오후 비행기는 다행히도 정상운행하여 노을이 지기 전 니스 해변에 무사히 도착하게 해 주었다. 파랗고 투명한 빛깔의 바다, 동글동글한 조약돌, 시원하게 펼쳐진 해안 도로는 10년 전 그대로였다. 2016년 이 해안 도로에서 벌어진 테러 뉴스를 접했을 때, 한 번 가본 곳이라고 정이 들어서인지 함께 마음 쓰렸었다. 지금의 니스는 그날의 아픔을 흘려보낸 채 일상을 잘 회복하고 여행자들을 반갑게 맞아주는 듯 보였다.



바다로 뛰어들어 달빛에 비쳐 반짝이는 윤슬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노을이 완전히 지고 밤하늘이 될 때까지. 허무하게 흘러가는 이 밤을 붙잡고 싶을 만큼, 소중한 밤이었다. 늦게 온 대신 깊게 잠기고 싶었다.








*Pic de pollution


한 가지 예상 밖의 행운도 있었다면, 여행 첫날 하루는 대중교통이 무료였다. 대기 오염 경보라고 하여 시에서 환경보호를 위해 대중교통을 장려하는 캠페인이었다. 대중교통 타기 외에도 카풀하기, 에어컨 온도 높이기, 유해제품(접착제, 페인트 등) 사용 일정 미루기, 농업 비료 사용 일정 미루기 등 환경 보호를 위해 시민들의 자발적 참여를 권장하는 내용들이 있었다. 실제로 사람들이 얼마나 참여하는지는 모르갰지만, 개인의 노력보다 정부와 지자체의 노력이 선행되는 모습은 좋은 예다. 그리고 덕분에 나는 트램 티켓비용이 한 번 굳었다, 예!








그리고, 남은 여행 역시 내가 감히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자꾸만 흘러갔는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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