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랑주리 미술관과 지베르니
마음이 산란할 때 이따금씩 오고 싶은 곳이 있다.
바로, 오랑주리 미술관.
타원형의 방 가운데에 앉아 나를 둥글게 감싸고 있는 모네의 수련을 바라보고 있으면 마음이 이내 고요해진다. 하얀 페인트가 칠해진 갤러리의 벽 마저 나를 따스하게 감싸 안아주는 것만 같다. 햇살 때문일까. 천장을 통해 들어오는 햇살이 방 안을 가득 채운다. 일출 장면은 방의 동쪽에, 일몰 장면은 서쪽에 걸려 있다. 하루 동안 시간의 경과에 따라 햇빛의 방향이 바뀌는 것까지 고려한 것이다. 지베르니의 야외 정원에서 느낀 인상을 실내에 그대로 옮겨 오기 위한 모네의 치밀함이 바로 이 정도이다.
캔버스 안에는 수평선이 없다. 어디가 시작이고, 어디가 끝인지 가늠할 수 없는 물을 바라보면 아득해진다. 잠시 현실을 잊어 본다. 가까이서 보면 거친 붓자국들만 보이지만, 멀리서 보면 거대한 풍경이 된다. 하루, 매 시간, 매 분, 매 초를 들여다보면 거칠고 불안한 호흡으로 가득하지만, 멀리서 바라봐야 진짜 인생이 되듯이.
오랑주리는 원래 오렌지 나무를 재배하던 온실이었다. 미술관의 이름인 ‘오랑주리(Orangerie)’가 불어로 오렌지 온실이라는 뜻이다. 모네에게는 조르주 클레망소라는 친구이자 후원자가 있었다. 그 덕분에 모네는 오직 자신만을 위한 공간을 얻게 되었고, 오직 수련을 전시하기 위한 공간을 재설계하게 된다. 그는 이전에 한 번도 시도하지 않았던 거대한 사이즈의 연작을 기획하게 된다. 모네가 붓을 내려놓을 때에도 계속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설득하고, 이 거대한 작품들을 스튜디오에서 미술관으로 옮긴 것도 클레망소였다.
그리고 지금과 같이 모네를 영원히 기억할 수 있는 미술관이 되었다.
하지만, 당시 모네의 인상주의 그림은 너무나 급진적이어서 대중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한 세기 이후, 지금은 고전 중의 고전이 되었는데 말이다. 평론가를 비롯한 대중들은 모호한 형태, 느슨하게 발려진 물감 자국에서 무엇을 지 몰랐던 것이다. 그렇게 모네는 수십 년 간 잊혀있었다. 1950년대에 들어서 마크 로스코, 잭슨 폴록과 같은 추상화가들이 모네를 재발견하기 시작했으며, 수련에서 큰 영감을 받았다.
오랑주리 미술관이 다녀오고 며칠 후, 지베르니로 향했다.
지베르니에는 모네가 사랑한 자연, 열정, 때로는 좌절로 점철된 그의 43년 간의 삶이 남아 있다. 그는 늘 아침부터 저녁까지 정원에 나와 빛의 변화를 포착하고, 그 인상을 캔버스에 옮겼다. 빛에 대한 그의 열정은 결국 백내장까지 앓게 했다. 그야말로 집착에 가까웠다.
나도 그처럼 연못 위에 반사된 빛과 색채들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오랑주리의 수련을 연못 위에 겹쳐 보았다. 아직 연못은 다 피지 않았고, 보랏빛보다는 초록 잎으로 청량함이 가득했다. 아마도 모네와는 다른 계절, 다른 시간이었겠지.
연못뿐만 아니라 집과 정원까지 모네의 다정한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다. 정원을 보면 그가 얼마나 자연을 곁에 가까이 두고 애정했는지 느낄 수 있다. 무언가를 사랑할 때, 오랫동안 정교하게 관찰하고, 가꾸는 그의 사랑방식이 ‘예술’의 시작이 아니었을까.
나는 훌륭한 화가가 아니다.
훌륭한 시인도 아니다.
나는 그저 내가 자연에서 느낀 것을
최선을 다해 표현할 뿐이다.
-모네